당신이 ‘시’다
남들은 하나 둘씩 짐을 내려놓을 나이에 고은 시인은 그 짐을 여전히 즐겁게 이고 지고 간다. 질풍노도는 한 시기로 기억되는 대상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삶이라고, 눈을 감는 순간이 되어서야 비바람은 잦아드는 것이며 살아 있는 동안은 거칠게 숨 쉬며 전진해야 한다고 여든한 살의 고은은 격양된 목소리로 말한다.
이맘때면 늘 빠지지 않는 뉴스가 있다. 올해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예측하는 기사다. 다른 노벨상은 미리 수상 후보를 발표하는 데 반해 문학상은 예외다. 후보 공개 없이 드라마틱하게 수상자만 발표한다. 그래서 문학상 후보를 두고 언론에선 유독 온갖 추측이 난무한다. 온라인 배팅업자까지 문학상 후보를 흥미로운 비즈니스거리로 삼는다. 2006년 오르한 파묵의 수상을 맞힌 영국의 한 배팅 사이트에서는 자체적으로 수상 후보를 점치곤 하는 데, 이 사이트에서 올해 고은 시인은 7위를 차지했다. 기분이 나쁠 만한 뉴스는 아닌데, 고은 시인은 이러한 것에 일찌감치 이력이 났다. “10여 년째 듣는 이야기라 이제 메아리 같을 뿐이지. 저쪽에서 왔다가 이쪽으로 가는. 큰 의미 없는….” 우리가 고은 시인을 한국의 위대한 시인으로 칭하는 이유는 노벨 문학상 후보에 단골로 거론되는 작가 중 유일한 국내 작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많은 문학가가 고은 시인의 가치성에 엄지손가락을 드는 건 그의 시에는 부끄럽거나 자랑스러운 우리의 역사가 가감 없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는 시대와 그 시대를 살아낸 개인의 역사가 간결한 자음과 모음 사이사이 진실한 모습으로 표출되어 있다. 부끄러운 역사 속에서는 자기반성의 목소리를, 자랑스럽고 기쁜 역사의 순간에는 누구보다 앞장서 흥을 돋는 추임새를 넣은 것이 고은의 시다. 1933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난 고은 시인은 30여 년에 걸쳐 쓴 <만인보>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서술하며 시대와 사람에 대한 독립운동가 같은 면을 보여주다가도 아내에 대한 사랑을 담은 <상화시편>에서는 “상화의 사랑 없이는 지금까지 내가 살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라며 낯간지러운 애교를 부릴 줄 아는 로맨티스트의 면모를 보여준다. 살다 보면 누구라도 깊게 파인 상처를 얻는 것이 이치이나 그 안에 오래 머물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많은 이들이 모르는 것이 현실. 그러나 곱디고운 10대에 절망의 바닥에 뒤꿈치를 찧은 그는 1958년 ‘폐결핵’이라는 시를 통해 비좁은 구덩이에서 지혜롭게 빠져 나왔고, 그 후 진실된 혀의 힘으로 지금껏 150권 이상의 저서를 발표하며 절망과 희망 사이를 노래하고 있다. 1960년 시집 <피안감성>을 시작으로 <문의 마을에 가서>, <백두산>, <만인보> 등을 펴내고 만해문학상, 대산문학상, 스웨덴 시카다상 등을 받으며 한국의 시를 드높인 그는 최근 파블로 네루다, 에우제니오 몬탈레, 셰이머스 히니 등 다수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받은 권위 있는 문학상 ‘황금화관상’을 수상했다. 이를 기념해 5월 말, 영국 빅토리아 앤 앨버트 뮤지엄에서 시 낭송회를 진행했다. 낭송회는 런던과 베를린을 거쳐 시카고까지 이어졌고, 직접 노시인의 낭송을 들은 외국인은 생소한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을 표했다. 반가운 소식은 이게 끝이 아니다. 지난 9월 11일, 유네스코한국위원회에서 그를 평화친선대사로 위촉한 것.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2015년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열리는 제38차 유네스코 총회 기간에 세계 평화를 염원하는 고은 시인의 특별 시 낭송회를 추진할 계획이라고 한다. “나에게는 오로지 현재만이 내 꿈의 장소”라는 고은 시인을 만났다. 청년의 눈빛을 지닌 그에게서 발견한 위트 넘치는 은유와 이토록 뜨거운 열정을 전한다.
지난 하반기에 해외 일정이 꽉 차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와중에 인터뷰 요청을 수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매번 시로 만나다 이렇게 직접뵈니 느낌이 남다릅니다. 여러 곳에서 초청이 오면 참 반갑고, 날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요청에는 가능하면 응하고 싶어요. 그런데 10월만 해도 미국, 이탈리아에 가야 하고 11월에는 스웨덴에 가야 해요. 상을 준다는 데도 있고 낭송회나 강연도 있거든요. 날 원하는 장소가 지구 상에 있다는 자체가 감사한 일이에요. 그래서 일정상 초청을 거절할 수밖에 없을 때는 아프죠.
선생님의 시집 <마치 잔칫날처럼> 뒤에는 선생님의 프로필과 주요 행적을 서술한 연보가 있습니다. 16쪽이나 되어서 단편소설 한 편을 읽는 기분이었어요. 방대한 삶의 족적이 나타나 있더군요. 그걸 보니 문득 ‘선생님께서 걸어오신 길 자체가 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 떠오르는 게 있어요. 10년 전인가 독일에서 각국의 시인이 모이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아시아 출신 시인은 나와 인도에서 온 여류 시인 둘이었어요. 그녀는 바르셀로나 대학교수로 말없이 조용한 시인이었죠. 일주일 동안 행사를 마치고 떠나기 전날 고별 만찬을 했는데, 아마 다들 그동안의 긴장이 풀린 모양이에요. 갑자기 그 여류 시인이 내 옆자리로 오더니 “당신은 시인이 아니라 시”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난 당신의 아내를 질투해요.” 이러는 거예요. 낯선 사람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당황스러우면서도 순간 내 안에 조용히 타고 있던 불씨 하나가 파르르 떨리는 것 같았어요.
선생님이 걸어온 길은 참으로 다양한 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전쟁 시기 참혹한 보복 학살 사건을 겪으면서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았고, 그 후 십수 년간 자살을 기도했는가 하면 갑자기 속세와 인연을 끊고 출가했다 10년 후에 환속하셨잖아요. 그 중간에 ‘폐결핵’이라는 시를 친구가 대신 응모해 발표하면서 시인의 길을 걷게 된 일련의 과정이 참으로 드라마틱합니다. 한국전쟁과 많은 부분 관련이 있죠. 남과 북에서 내 또래의 절반 가까운 숫자가 총알받이로 전쟁에서 죽었으니까. 난 거기서 살아남은 자고. 살아남은 자에게는 생을 중단하고 떠난 생명에 대한 가책이 있죠. 그들은 없고 나는 여기 있으니까. 그들에 대한 원죄 의식이 있었어요.
산 자로서 미안함 같은 건가요? 그런 마음일 수밖에 없는 게 수많은 죽음, 송장과 구더기 속에서 살아남았으니까. 그 악취는 짐승의 것보다 더해요. 냄새가 딱 달라붙은 까닭에 빨랫비누로 아무리 몸을 씻어내도 시체 냄새가 사라지지 않아요. 죽음이 눌어붙은 거예요. 어린 10대 소년의 몸과 마음이 죽음에 감염됐죠. 이후로 사람을 봐도 사람이 아니라 그냥 흙으로 보이더라고요.
전쟁 중에 눌어붙은 죽음의 이미지가 선생님께 자살 기도와 같은 영향을 끼친 거군요. 누군가가 옆에서 ‘이제는 네 차례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전쟁 후 모든 것이 불에 타 폐허가 됐고, 나에게도 허무만 남았죠. 허무는 인간의 삶을 부정하게 만들어요. 그 때문에 난 ‘죽음’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게 됐죠.
슬프게도 10대 때부터 죽음을 갈망하게 됐네요. 네. 꽤 오랜 시간 그랬죠. 서른 살에 제주도로 내려가 금강고등공민학교를 개교하고 몇 년간 머문 적이 있어요. 주변에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무덤 수를 다 알 정도로 자주 갔어요. 술 마시고 취해서 무덤 옆에서 자고. 무덤이 친구였죠. 그곳에서도 여러 번 자살을 기도했어요.
그래도 선생님의 운명은 삶의 편이었나 봐요. 결정적 고비마다 늘 피해간 걸 보면. 추리소설에 나오듯 주도면밀하게 준비하는데도 살아요. 서른일곱에 정릉 골짜기에서 죽으려고 한 적이 있어요. 고개를 한참 넘어야 하는 곳이라 사람도, 짐승도 오지 않는 곳이었죠. 마침 그날 첫눈이 내렸어요. 소주에 약을 한 움큼 집어먹고 이제 진짜 생과 이별이구나 하고 누웠는데 눈을 떠보니 병원이더라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하필이면 약을 먹은 다음 날이 예비군 훈련이었어요. 예비군 훈련은 보통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곳에서 하거든요. 훈련병이 날 병원으로 옮겼고, 3일 만에 깨어난 거죠.

“나의 현재는 늘 비바람 속에 있고, 그건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해요.
살아 있다는 게 뭡니까? 숨 쉰다는 것인데, 나는 그 숨을 좀 더 힘차게 쉬고 싶어요.
앞으로도 나는 질풍노도를 기억하는 사람이 아닌 그 복판에 선 사람으로 살 겁니다.”
다시 10대 때 이야기로 돌아가서, 1951년 열여덟의 나이에 출가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당시 전쟁이 한창이라 승려들도 거리에서 떠돌 때였어요. 우연히 군산 부근의 동국사에서 혜초라는 승려를 봤는데 자석에 못이 끌려가듯 나도 모르게 그 승려를 따라가고 말았어요. 혜초 스님 이 뒤돌아보며 “왜 따라오느냐?” 해도 아무 말 없이 계속 뒤꽁무니를 쫓아가니까 결국 “같이 가자”고 하더라고요. 그분을 통해 스피노자, 칸트, 쇼펜하우어 등의 철학자를 알게 됐고 철학에 심취하게 됐어요.
절에 계시면서 죽음에 대한 상처도 조금씩 아물었나요? 공기, 바람, 거기서 만난 자연이 내 선생이자 학교였어요. 인간 자체를 부정하던 모습은 어느 정도 치유가 됐는데, 가까이서 본 종단의 현실에 실망해 결국 환속하면서 다시금 허무주의에 빠졌습니다.
환속할 정도로 실망이 컸다는 건 반대로 이상이 컸다는 이야기도 되는데요, 선생님은 본인이 속한 집단이나 사회 또는 개인의 내면에 대해 품는 이상향에 대한 욕구가 남다른 것 같아요. 현실과 잘 타협하지 않는 성격도 같은 선상이고요. 허무와 이상은 동전의 앞·뒷면이죠. 그것은 곧 허무주의자는 언제든 이상주의자가 될 수 있다는 말로도 볼수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맞아요. 보통 사람들이 나에 대해 이야기할 때 ‘허무’까지는 이야기하는데 나에게 ‘이상’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묻지 않아요. 근데 진짜 내 속에 있는 건 허무가 아니라 이상이거든. 예를 들면 난 아내와의 결혼을 결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30년이 지났지만 늘 연애 중이죠. 아내와의 삶이 나에겐 현실이 아니고 유토피아에요.
글을 대할 때도 그런가요? 난 시도 축제처럼 써요. 백지는 유일한 내 종교고, 백지야말로 수많은 꿈과 유토피아가 담기는 곳이죠. 보통 축제는 일탈하고 싶어 만드는 것이지만 난 일상을 축제처럼 살아요. 매일 힘들고 온갖 모순이 다 노출되는 시대지만 여기를 떠나서 다른 곳으로 도망가 내 이상향을 만드는 그런 수작은 안 해요. 여기에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사막, 폐허의 현실 위에 꿈의 집을 짓는 게 내가 살아가야 할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숱한 자살 기도, 그리고 문인들을 대표해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당시와 비교해보면 많이 달라진 모습이네요. 스무 살에도, 일흔살에도 선생님이 꿈꾼 이상향은 똑같았을 텐데 말이죠. 백지를 만나면서 치유가 된 거라고 생각하면 될까요? 생각해보니 그렇네. 사실 나는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절에서 나왔어요. 처음에 종교생활을 하면서 편지 같은 걸 남기곤 했는데 그중 하나가 ‘폐결핵’이라는 시예요. 친구가 한국시인협회 기관지에 나 몰래 그 시를 응모했고, <현대시>를 통해 발표되면서 문단 활동을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천직이 된 거죠.
1970년에 일어난 전태일 분신 사건을 계기로 사회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시점을 계기로 선생님의 시도 허무주의에서 민족주의 느낌의 시로 바뀐 것 같아요. 스스로도 변화의 기점을 그 시기로 보시나요? 1950년대부터 지독한 불면증을 앓고 있었어요. 술도 도움이 안 됐어요. 늘 피곤하고 아프고 우울했어요. 그러다 전태일 사건을 신문에서 보고 거리로 나왔고, 반독재 운동에 동참하면서 신기하게 불면증도 사라졌죠. 삶이 달라지니 시도 달라질 수밖에 없고요.
그때부터 선생님은 삼선 개헌 반대에 문인 대표로 참여하는 등 사회 현실에 격렬한 몸짓으로 대항했습니다. 문인으로서 꼭 그래야한 이유가 있었나요? 사회문제와 노동문제 등에 점점 많은 관심을 쏟던 때였어요. 가두시위를 벌이다 구금되기도 하고, 긴급조치 9호 선포로 가택에 구금되기도 했죠. 무엇보다 교도소 수감 때 힘들었는데, 특히 아무것도 쓸 수 없다는 사실이 날 더욱 힘들게 했어요. 파블로 네루다는 감옥에서 역사책을 썼고, 일제강점기에 홍명희는 구치소에서 <임꺽정>을 썼는데 나는 책은커녕 편지도 못쓰게 하니 그야말로 답답했죠.
1982년 8·15 사면으로 석방된 후 본격적으로 선생님의 시대가 펼쳐졌다고 생각합니다. 1990년대에 들어 활자의 힘이 더욱 커진 이유도 있고요. 특히 환갑 이후 선생님의 활동 반경이 급격히 넓어졌어요. 버클리 대학 한국학과 교환교수를 지내셨고, 남북 정상회담 특별 수행원으로 평양에도 가셨죠. 세계 여러 나라를 돌며 시 낭송회와 문학 축제에도 참여하셨고요. 김영삼 정권이 들어선 후 내여권이 처음으로 나왔어요. 근데 신기하게도 여권이 나오면서 해외에서 본격적으로 초청을 하기 시작했어요. 기분이 좋은 건, 해외 시 낭송회에 갈 때마다 늘 관객과 내가 일치하는 느낌을 받는 다는 거예요. 이번에도 독일에서 열린 시 낭송회에 500명의 유료청중이 모였어요.
시를 번역하는 건 참 어려운 일일 것 같아요. 모국어만이 전할 수 있는 느낌이 있잖아요. 시는 자기 본거지, 그 축복받은 장소에서 참 많은 사랑을 받아요. 더 이상 다른 곳이 필요 없을 정도로 행복해요. 그런데 시는요, 반대로 자기 보호라는 껍질을 벗고 싶어 해요. 머나먼 곳을 그리워하기 시작해요. 그게 시의 본능이에요.
사람과 비슷하네요? 인간도 어릴 때는 부모 품에 있다가 자라면서 또래를 만나고 싶어 하잖아요. 모국어를 쓸 때의 시는 젖먹이 단계예요. 시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잘 알아요. 엄마 품을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가차 없이 떠나죠. 다른 나라에 잘 정착한 시는 혹여 모국어로 쓴 시와 서로 소통이 안 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사람도 그렇잖아요. 한 부모 아래 태어난 형제도 생김새가 다르고 성격이 다른 것처럼. 시도 그래요. ‘내 시가 혹시 번역이 잘못되어 그 나라 정서에 맞지 않게 전달되면 어떡하지?’ 이런 걱정은 필요없어요. 내 품을 떠난 시가 그곳에 가서 잘 사는지, 아니면 죽는지, 저 멀리 떠내려가는지는 그 시의 운명이니까요.
다행히 선생님의 시는 해외에서도 자기 세계를 잘 만들어가고 있는 거죠? 25개국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읽히고 있잖아요. 네, 앞으로 아프리카 부족 언어로도 번역된다고 해요.
선생님은 30여 권에 이르는 <만인보> 같은 시를 쓰기도 했습니다. 이해하기 쉬운 시도 있지만 작가에게 해석을 묻고 싶은 시도 있어요. 시의 해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심하게 이야기하면 재앙이죠. 그럼에도 시를 문화의 척도에 의해 이론화할 필요가 있을 때, 해석의 행위는 의미를 갖게 돼요. 내가 걸어가는 길을 보고 그것을 나중에 해석하는 자가 있어야 할 것 아니에요. 그렇지만 현재 내 시를 규정하고, 값을 매기는 건 재앙입니다. 해석은 분명 중요해요. 세상의 척도니까 거기다 총을 쏠 이유는 없어요. 그렇지만 해석이 동시대에 이루어지는 건 재앙이라는 거죠.
환속하신 후 종교는 없나요? 난 아주 규모가 작은 종교를 가졌어요. 세종대왕이죠. 나에게 문자를 줬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내 운명이 결정되었으니까.
마음속 가득한 흙탕물이 가라앉으면 윗물이 맑아지듯 선생님의 삶도 천천히 그렇게 흘러온 것 같아요. 이제 흙탕물은 완전히 가라앉았고 선생님은 시를 축제처럼 쓰게 됐죠. 본격적인 유토피아적 삶을 살게 되셨고요. 이제 질풍노도의 시기는 끝난 건가요? 과거에도 질풍노도의 시기가 있었지만 의미가 없어졌을 정도로 지금은 새로운 질풍노도의 시기를 맞고 있어요. 나의 현재는 늘 비바람 속에 있고, 그건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도 해요. 살아 있다는 게 뭡니까? 숨 쉰다는 것인데, 나는 그 숨을 좀 더 힘차게 쉬고싶어요. 앞으로도 나는 질풍노도를 기억하는 사람이 아닌 그 복판에 선 사람으로 살 겁니다.
에디터 김이신 (christmas@noblesse.com)
사진 이규열 장소 협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