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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인 부

LIFESTYLE

명예만큼 의무를 다하는 건 어렵다. 하지만 그걸 이룬 이들도 분명 있다. 유럽 난민 문제를 껴안은 부호들의 온정 어린 손길에 대해 알아봤다.

‘기부계의 만수르’라 불리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알왈리드 빈 탈랄 왕자(왼쪽)

난민들에게 호텔 방 5000개를 무료로 제공하겠다고 밝힌 노르딕 초이스 호텔 그룹의 회장 페터 스토르달렌

오슬로에 있는 노르딕 초이스의 호텔 ‘the thief’

지난 9월, 터키 해변에서 세 살짜리 시리아 꼬마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전 세계가 슬픔에 빠졌다. 이후 단란한 꼬마의 가족 사진들이 인터넷에 퍼지며 난민 동정론이 달아올랐다. 각국 정상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슬픔을 통감하며 애도를 표했고, 전 지구적으로 난민 문제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커졌다.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난민 정책에 큰 변화가 생길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 꼬마의 죽음 이후 석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난민들의 죽음은 계속되고 있다. 각국 정상들은 민주주의 운운하며 서로에게 대책을 내놓으라고 소리쳤지만 이 얘기, 저 얘기하다 세월만 보냈다. 그들이 자신의 이권을 위해 목청을 키우는 동안, 자국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난민에게 등을 돌리는 동안, 차가운 바다에 빠져 숨을 거둔 아이만 80여 명에 달했다.
그 와중에 한쪽에선 난민 유입을 막기 위한 장벽도 등장했다. 헝가리는 세르비아와의 국경에 4m 높이의 장벽을 쌓았다. 슬로베니아도 크로아티아 쪽 국경에 장벽 설치를 고려하고 있다. 심지어 그간 관대한 난민 정책을 펴온 오스트리아마저 슬로베니아 국경 지역에 장벽을 건설한다고 밝혔다. 더욱이 현재 약 400만 명의 난민을 떠안은 시리아 주변 국가들도 더는 견딜 수 없다는 입장이다. 얼마 전 CNN과의 인터뷰에서 요르단 왕비는 독일로 향하는 난민 행렬에 대해 “난민 따위가 뭐? 국가를 고른다고? 있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라는 뉘앙스의 발언을 했다. 그러니까 딱 이 정도가 현재 난민에 대한 국가 대부분의 인식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난민에게 온정 어린 손길을 내미는 이들이 있다. 노골적으로 난민을 추방하거나 장벽을 쌓는 유럽 정부들의 배타적 행동과는 분명 대비된다. 각국이 난민 사태에 대한 책임을 떠넘기는 동안 이들은 집과 생필품, 심지어 그들이 함께 모여 살 수 있는 섬까지 제공하겠다고 공언했다.

난민을 위해 자택을 개방하는 계획을 세운 핀란드의 총리 유하 시필레

난민을 위해 섬을 구입하겠다고 밝힌 오라스콤텔레콤 회장 나기브 사위리스

자산 대부분을 난민 구호에 쓰겠다고 밝힌 터키 출신 억만장자 함디 울루카야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이는 이집트의 나기브 사위리스(Naguib Sawiris)다. 그는 중동 최대 이동통신 기업 오라스콤텔레콤의 회장이다. 이집트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부자로 순자산만 29억 달러(3조4547억 원)에 달한다. 최근 그는 여러 매체에 그리스나 이탈리아에서 섬을 사는 데 1억 달러(약 1200억 원)까지 낼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또 섬을 산 후 집과 학교, 병원 등 기반 시설을 건설하는 데 난민을 고용하겠다는 구체적 계획도 제시했다. 정리하면 사회 기반 시설을 구축해 작은 도시 하나를 만들겠다는 얘기다. 그 스스로도 ‘미친 아이디어’라고 트위터에 올리긴 했지만, 이는 농담이 아니다. <포브스> 에 따르면, 사위리스는 이미 구입할 섬의 이름까지 지었다. 지난 9월 사망한 시리아의 꼬마 난민 아일란 쿠르디(Aylan Kurdi)의 이름을 딴 ‘아일란(Aylan)’이다.
정보통신 기업 출신인 유하 시필레(Juha Sipila) 핀란드 총리도 시리아 난민을 돕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핀란드 중부 킴페레에 있는 그의 집을 내년 1월 1일부터 난민을 위해 개방할 계획이다. 그 집은 그가 총리직 수행을 위해 헬싱키로 이사한 이후 쭉 비어 있는 상태. 구체적으로 얼마나 많은 인원을 어떻게 수용할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한 국가 총리의 이 같은 발언은 귀감이 되고 있다. 그는 최근 핀란드 방송 MTV와의 인터뷰에서 “모든 걸 사회에 맡길 수도 있지만 한계가 있으니, 더 많은 이가 난민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라며 난민을 위한 일반 시민의 자발적 지원을 호소했다.
터키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그리스식 요구르트(일명 그릭 요거트) ‘초바니’로 억만장자 반열에 오른 함디 울루카야(Hamdi Ulukaya)도 난민 구호를 위해 ‘텐트(Tent)’라는 자선 재단을 세웠다. 그는 더불어 재단을 통해 자산 13억 달러(약 1조5000억 원) 대부분을 쿠르드족과 시리아 난민 등 난민 구호 사업에 쓰겠다고 밝혔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가 난민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는 이유는 그 또한 터키에 거주하는 소수민족 쿠르드족 출신이기 때문이다. 최근 한 인터뷰에서 울루카야는 “3초에 한 명꼴로 난민이 발생할 정도로 문제가 심각한데, 이들의 목숨을 구하고 인간다운 대우를 해줘야 한다는 생각에 구호 사업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울루카야는 단순히 금전적 지원에 그치지 않고, 난민들에게 근본적 살길을 열어주고자 그들을 직접 고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덕분에 현재 뉴욕 북부에 있는 그의 요거트 공장엔 600여 명의 난민이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한편 이러한 온정 릴레이는 왕족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주인공은 사우디 왕족, 알왈리드 빈 탈랄(Alwaleed bin Talal) 왕자다. 근데 알고 보면 그는 이미 10여 년 전부터 꾸준히 세계 난민 구호 활동을 해온 ‘기부계의 만수르’다. 2002년 팔레스타인 난민을 위해 2700만 달러(약 312억1200만 원)를 기부했고, 최근에도 시리아 난민을 위해 수백만 달러를 기부했다. 이런 식으로 그가 지금껏 기부한 금액은 어림잡아 35억 달러(약 4조460억 원). 그가 낸 기부금은 그간 사우디아라비아와 시리아를 비롯한 중동 국가들의 문화 간 이해 증진과 전염병 근절, 전력 공급, 여성 권리 향상 등에 쓰였다. 왕족 출신인 그가 사회활동에 적극적인 이유는 다른 왕족처럼 어린 시절 유복한 생활을 누리지 못해 난민의 고통을 잘 알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지난 1월 세상을 떠난 사우디아라비아 압둘라 빈 압둘 아지즈(Abdullah bin Abdul Aziz) 국왕의 조카지만, 왕위 계승 문제 등 사우디 왕가에선 큰 영향력이 없었다.
이 같은 사회 지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은 사실 인류 역사에서 오랫동안 이어온 전통이기도 하다. 미국의 트루먼 전 대통령은 시력 문제로 사관학교 입학이 어려워지자 시력 검사판을 암기한 뒤 군에 입대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영국의 왕실 인사들은 모두 군에 복무하거나 위험한 전투의 참전에 앞장서왔다. 이들이 병역에 이토록 엄격한 이유는 지도층으로서 국민에게 귀감이 되기 위함이다. 서양의 지도층 인사들은 스스로 사회에서 혜택을 받은 이라고 생각한다. 달리 말하면 사회에 진 빚이 많은 이들인 거다. 그 때문에 사회에서 얻은 부와 명예를 환원하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레 뿌리 깊이 박혀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실현되고 있을까? 대답은 ‘글쎄올시다’다. 한국은 지금도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해이가 연일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동반 성장 문제 또한 계속되는 이슈다. 지엘인베스트먼트의 대표이자 <플랜 B를 실천하라>의 저자 신용한은 “세상을 향해 베풀고 행한 만큼 대접받는 것이 순리이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인데, 한국에선 유독 현재 자신의 재정 상태에 따라 대접을 받으려 하고, 사람들도 가진 자에게 대접하려 한다”고 우리의 오늘을 꼬집었다.
수치상으론 지금 우리나라가 단군 이래 가장 잘사는 시대라고 하지만, 현실적 체감으론 가장 정이 없고 건조한 사회다. 물론 세계의 여러 사회가 이와 비슷한 현실에 처해 있는 건 맞다. 이런 현실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 개인을 모아놓고 보면 결국 사회문제로 귀결된다. 한국이 지금보다 품위 있는 국가로 떵떵거리며 존속하려면 하루라도 빨리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전통을 확립해야 한다. 명예(noblesse)만큼 의무(oblige)를 다하는 철학은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시대정신이다.

최근 난민 지원을 위한 기부 사이트를 연 구글의 배너 광고

에디터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