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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NOW

약 한 달 전, 헬싱키 시립 미술관(Helsinki Art Museum, HAM)의 전시 디렉터 피르코 시타리가 서울에 왔다. 큐레이터로서, 미술 행정가로서 30년 이상 핀란드 미술계에서 일해온 그녀는 지금 한국의 모든 미술관이 지향해야 할 어떤 청사진 같은 존재다. 시민이 머물고 서로 만나고 교감하는 문화 공간을 ‘미술관’이라 칭할 때, 우리 중 누가 그것에 대해 속 시원히 말할 수 있을까? 그녀는 말한다. 그래서 만났다.

1 지난해에 헬싱키 시립 미술관에서 열린 쿠사마 야요이의 개인전에 맞춰 개최한 시민 참여 아트 프로젝트.
2 헬싱키 시립 미술관 전시 디렉터 피르코 시타리.

1989년부터 1999년까지 노던 포토그래픽 센터(Northern Photographic Center)에서 일했고, 이후 2004년까지 핀란드 사진미술관(The Finnish Museum of Photography)에서 수석 큐레이터로 일했습니다. 몇몇 이력을 보면 ‘사진’에 특히 집중하고 계신 듯합니다. 한국에도 ‘사진 전문’ 큐레이터로 소개되었고요. 이렇게 사진에 포커싱을 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 노던 포토그래픽 센터에 일하던 당시 국제적 사진 전시를 여럿 기획한 게 계기였다고 봅니다. 그때 사진이 단순히 미술 매체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조금 더 확장된 형태의 예술도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됐죠. 또 저는 정치학과 역사학에도 관심이 많은데, 그걸 공부하다 보니 자연스레 사진 매체가 그 모든 요소를 녹이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 제가 사진에만 집중한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단지 가장 먼저 일을 시작한 분야가 사진이었기 때문에 그것과의 연결 고리가 다소 두터울 뿐이죠. 한국에서 ‘사진 전문 큐레이터’로 소개된다니 재미있군요.

하지만 이번에 서울을 방문한 것 또한 사진 전시 때문이죠? 마침 그렇게 되었네요.(웃음) 하지만 이번엔 한국의 현대미술 트렌드를 살피려는 목적이 더 큽니다. 며칠간 이곳에 머물며 미술관과 갤러리를 둘러볼 생각이에요. 그러고 나서 방이동에 있는 한미사진미술관 관계자들과 내년에 헬싱키에서 열 전시에 대해 논의할 예정입니다. 한국과 북유럽 사진작가들을 모아 전시를 열 계획이거든요.

3 헬싱키 시립 미술관은 지역사회 주민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커뮤니티 예술에 관심이 많다. 사진은 지난가을 열린 워크숍 ‘핀란드정통 호밀빵 만들기 수업’.
4 예술 작품을 찬찬히 관람하고, 직접 그것을 만들기도 하며 예술과 깊이 있게 교감하는 경험을 끌어내는 워크숍 ‘슬로 아트 데이 라이브’.

헬싱키 시립 미술관의 전시 디렉터로서 작가나 작품을 선별하는 기준이나 관점이 궁금합니다. 국내외의 여러 이슈 중 하나의 키워드를 선정해 전시를 기획할 때 무얼 가장 중요하게 보세요? 사실 전 이슈를 따로 고르지 않습니다. 작가도 선별하지 않고요. 어떤 방향을 미리 설정하고 ‘이런 이슈가 요새 핫하니 이런 전시를 해보자’ 하는 건 제 스타일이 아니거든요. 저는 전시를 기획할 때 가장 먼저 작품을 봅니다. 그리고 그 작품이 뭘 말하고자 하는지 따져보죠.

지난해에 헬싱키 시립 미술관 전시 디렉터로 부임하기 전, 당신은 2010년부터 5년간 핀란드의 국립 현대미술관 키아스마(Kiasma)의 관장으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국립 미술관 관장이 시립 미술관의 디렉터로 오는 건 드문 일 같은데, 핀란드에선 어떤가요? 기관의 ‘파워’에 관한 질문이라면, 핀란드에선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핀란드에선 누구도 국립이 ‘상위’ 기관이고 시립이 ‘하위’ 기관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키아스마만 해도 아테네움 미술관(Ateneum Art Museum)과 시네브뤼크호프 미술관(Sinebrychoff Art Museum) 같은 국립미술관과 행정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이 세 곳을 총괄하는 이도 존재하죠. 하지만 그곳에서 일하는 그 누구도 그런 위계질서를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러기엔 핀란드라는 나라 자체가 작기도 하고요. 단, 헬싱키 시립 미술관은 키아스마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헬싱키의 공공 예술을 선도하고 있기 때문에 그 부분에서만큼은 어떤 미술관보다 권위를 인정받고 있죠.

그러니까 ‘좌천’은 아닌 거군요? 네. 이런 질문은 문화적 ‘관점’의 차이에서 오는 게 아닐까 싶은데, 키아스마에서 제 후임 관장으로 일한 마리야 탄니넨 마틸라(Maija Tanninen-Mattila)도 현재 헬싱키 시립 미술관에서 행정 업무를 보고 있습니다. 그녀의 직함도 ‘디렉터’죠.

헬싱키 시립 미술관의 운영 철학은 미술관이 소장한 아트 컬렉션이 모두 헬싱키 시민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사실 대부분의 해외 국공립 미술관이 내거는 구호지만, 헬싱키 시립 미술관의 태도는 조금 남다른 것 같아요. 헬싱키 시내의 지하철이나 공원에서 자주 전시를 열어 시민이 늘 예술과 함께하도록 하니까요. 어떻게 외부 전시를 그렇게 유연하게 열 수 있는 건가요? 헬싱키 시립 미술관의 모든 소장품이 헬싱키시, 즉 시민의 것이라는 개념 자체가 그 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린 시민이 그들의 작품에 더 가깝게 다가가길 바라고, 예술이 정말 쉽고 편안한 것이라고 인식하길 원하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가 바로 ‘공공 전시’입니다. 사실 어려운 얘긴 아니죠.

미술관의 소장품 중 현재 몇 점 정도를 외부에서 전시하고 있나요? 약 1만 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고, 그중 거의 절반이 공원과 거리, 학교, 도서관 같은 공공장소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물리적 접근성이 예술을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문화적 접근성까지 높인다는 것, 쉬운 듯하지만 지키긴 어려운 일 같습니다. 사실 그 문제는 동시대의 모든 미술관이 고민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어요. 현대미술의 난해함과 권위적 태도, 그리고 다양한 대중문화의 확산으로 미술관에 대한 일반인의 접근성이 떨어지는 건 핀란드 예술계도 피해갈 수 없는 현실이죠.

5 2015년 대규모 레노베이션을 마친 헬싱키 시립 미술관. 기존에 있던 카페와 아트 숍을 통합, 예술 상품에 대한 관람객의 관심을 이끌어 냈다.
6 헬싱키 올림픽을 위해 지은 건물에 자리 잡은 헬싱키 시립 미술관.

재작년에 헬싱키 시립 미술관은 대규모 레노베이션을 마치고 재개관했습니다. ‘HAM’이라는 이름으로 미술관을 새롭게 브랜딩했고, 같은 건물에 있던 전시 공간 ‘테니스 궁전(Art in Tennis Palace)’ 외에 시내에 있던 전시 공간을 모두 정리했죠. 레노베이션 공사는 어떻게 이뤄진 건가요? 미술관의 레노베이션엔 각기 다른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했습니다. 그중 헬싱키 시민의 의견이 중심이 되었죠. 먼저 시민을 대상으로 자신이 원하는 미술관에 관한 의견을 모았고, 이후 마케터와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디자이너, 건축가 등이 투입돼 디테일한 기획을 하고 공사에 들어갔습니다. 그 결과 간판과 방향을 알려주는 사인과 시각적 커뮤니케이션이 향상됐고, 각 전시실마다 다른 온도와 습도 조절기를 설치하기도 했습니다.

또 하나 제가 흥미로운 부분은 미술관 건물에 대한 겁니다. 현재 미술관과 테니스 궁전이 들어선 건물이 실은 오래전 헬싱키 올림픽을 위해 지은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거든요. 맞습니다. 현재의 미술관 건물은 1940년에 개최 예정이던 헬싱키 올림픽을 위한 것이었죠. 하지만 알다시피 헬싱키 올림픽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취소되고 말았습니다. 지금의 헬싱키 시립 미술관이 많은 시민에게 사랑받는 이유도 사실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애초에 올림픽 유치를 위해 지은 건물이라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데다, 현재는 아래층에 멀티플렉스 극장까지 들어서 일반인의 미술관 접근이 더 용이해졌죠. 저는 우리 미술관이 미술관으로서 권위보다는 영화관 같은 편안한 접근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핀란드는 ‘교육 강국’이란 이미지가 강합니다. 조금 전 이야기 나눈 미술관의 접근성에 관한 이점 말고, 청소년의 미술 교육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미술관의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좋은 예도 있는지요? 미술관에서 운영하는 워크숍 프로그램이 얘깃거리가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미술관 내에 교육큐레이션팀이 있는데, 그들이 일선 학교 교사들을 위해 만드는 미술 교육 자료가 꽤 인기가 좋습니다. 저희가 자료를 만들면 교사들이 그걸 내려받고 습득해 실제 학생들의 미술 교육에 활용하죠. 유치원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모든 학생에게요. 헬싱키의 학생에게 일찍이 예술과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을 교육하는 셈이죠.

이제 전시 얘길 좀 해보죠. 국립 미술관인 키아스마의 관장으로 재직한 2014년, 사진작가 알프레도 하르(Alfredo Jaar)의 전시를 직접 기획하기도 했습니다. 알프레도 하르의 인지도야 워낙 높으니 따로 말할 게 없지만, 사회적 약자에 대한 개념미술 작업으로 유명한 그의 작품을 직접 국립 미술관 전시장으로 가져왔다는 건 조금 다른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당시 어떻게 그 전시를 열 생각을 했나요? 말씀하신 것처럼 알프레도 하르는 훌륭한 작가지만 접근하기 쉬운 작업을 하는 이는 아닙니다. 그만의 확고한 비평적 사고방식이 있죠. 하지만 당시 저는 그가 사회적 약자를 다룰 때 그들을 무조건적으로 ‘피해자화’하지 않는 포인트를 중요하게 봤습니다. 그런 면에서 많은 이가 하르의 작품에 관심을 보일 거라고 생각했죠.

7 젊은 작가들과 시민이 헬싱키에서 직접 채집한 식물과 꽃으로 다양한 작품을 만드는 워크숍 ‘Vieno Motors: How to Prepare 2.0’.
8 핀란드가 낳은 세계적 작곡가 장 시벨리우스를 기념하는 공공 미술 작품과 그것을 관람하는 헬싱키의 학생들.
9 헬싱키 시립 미술관은 시민이 머물고 서로 교감하는 문화 공간을 위한 프로젝트에 집중하고 있다. 사진은 일반 시민과 작가들이 함께하는 워크숍 ‘Vieno Motors: How to Prepare 2.0’.

공공 예술과 사회 그리고 정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전시 기획자라면 그런 부분에 분명 예민하게 반응해야 할 테고요. 당신은 예술이 사회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이전에 알프레도가 한 말을 인용해볼게요. “예술은 변화에 영향을 줄 수 있고, 그 변화가 세상을 바꾼다.” 전 예술의 가치가 사회에서 담론을 제기하고, 다시 그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예술이 정치 변화를 위한 직접적 도구로 사용되어선 안 되겠죠.

대체 사회에서 ‘예술’의 포지션은 어떻게 될까요? 사물을 보는 관점을 바꾸고, 사람들이 어떤 현상에 경각심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직업의 특성상 평소 많은 작품을 보실 텐데, 요 근래 특히 관심이 가는 분야는 있나요? 최근엔 공공 예술에 관심이 많습니다. 도시에 설치하는 공공 예술 작품도 그렇고, 작가가 지역사회 주민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커뮤니티 예술’에도 관심이 많죠. 작품이 완성되면 전 그것에 어떤 사회적·정치적 메시지가 담겨 있는지 먼저 살핍니다. 간혹 정치적 메시지만 담은 작품도 있지만, 그 또한 하나하나 분석하는 것이 흥미롭죠.

지금 주목하고 있는 핀란드 작가는 누구인가요? 많은 작가가 있지만, 지금 당장 떠오르는 건 사진작가 엘리나 브로테루스(Elina Brotherus)와 영화감독이자 미디어 아트 작가인 미카 타닐라(Mika Taanila)입니다. 그중 엘리나 브로테루스는 지난가을 파리 퐁피두 센터에서 단독 개인전을 열었어요. 미카 타닐라의 경우는 세상을 보는 시각이 굉장히 독특하죠. 하지만 정통적으로 핀란드는 페인팅에 강합니다. 최근엔 미디어 아트에서도 강세를 보이고 있죠.

당신처럼 오랫동안 미술계에서 활동한 이들은 대개 미술계에 강한 영향력을 미칩니다. 한데 요즘 한국에선 이런 영향력이 큐레이터십의 위기로 변질되기도 하죠. 양질의 전시 기획보다 미술관장 같은 감투를 둘러싸고 갈등이 생기기도 하거든요. 핀란드의 사정은 어떤가요? 그건 한국 미술계뿐 아니라 세계 어디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큐레이터로서의 영향력이 있고, 관장으로서의 영향력이 있고, 그 영향력이 커지면 돈도 모이고, 누가 특정 자리에 오르면 누구는 좋고 누구는 안 좋고, 그런 법이니까요. 단, 핀란드에선 그런 암투가 비교적 적은 편이죠. 그런 의미에서 핀란드 사회의 투명성, 그 가치가 ‘아직은’ 지켜지고 있다고 봅니다.

이번이 네 번째 한국 출장입니다. 그간 한국의 몇몇 미술 기관과 일했는데, 무엇을 느꼈는지 궁금합니다. 한국의 어떤 기관과 일하든 처음엔 크고 작은 문화적 차이가 불거지지만, 그렇기 때문에 배울 것도 많고 즐겁습니다. 한국 기관과 일하며 깨달은 건, 누군가를 ‘안다’는 게 어떤 일을 할 때 굉장한 도움이 된다는 겁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오랫동안 미술계에서 일한 선배 큐레이터로서, 또 국립미술관 관장으로 일하기도 한 미술 행정가로서 시대와 미술을 고민하는 전시 생산자가 되려면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 한마디만 해주세요. ‘정치’와 ‘행정’은 다 잊고 ‘예술’에 집중하세요.

 

피르코 시타리
노던 포토그래픽 센터와 케라바 미술관(Kerava Art Museum), 핀란드 사진미술관 등을 거쳐 2010년부터 5년간 핀란드 국립 현대미술관 키아스마의 관장으로 일했다. 현재 헬싱키 시립 미술관 전시 디렉터와 핀란드 최고의 아트 어워드인 아르스 펜니카(Ars Fennica)의 디렉터를 겸하고 있다.

 

에디터 이영균(youngkyoon@noblesse.com)
사진 제공 헬싱키 시립 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