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모녀가 걷는 하나의 길
낯부끄럽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엄마는 딸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고, 딸은 엄마의 마음을 담은 요리를 나누는 것으로 에둘러 사랑을 표현한다. 무뚝뚝하지만 뜨거운 두 모녀의 사랑을 담은 인터뷰.

네이비와 그레이 컬러 슈트 Mischonjoo.
든든한 경쟁자인 딸을 둔 엄마, 이혜정 요리 연구가
모녀 사이는 참 오묘하다. 때론 격의 없는 친구 사이였다가 어느 순간 원수처럼 싸우기도 하고, 그러다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웃음 지을 수 있는 사이. 때론 미안함과 고마움에 불현듯 눈물을 쏟는 것이 모녀 사이가 아닐까. 요리 연구가 이혜정과 그녀의 딸 고준영은 좀 더 특별하다.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같은 길을 묵묵히 걷는 딸, 그리고 그런 딸이 대견하면서도 염려스러운 엄마가 바로 두 사람의 관계다. 인터뷰 촬영을 하는 내내 모녀는 어색하다고 말하면서도 서로 맞잡은 손에서 애정이 느껴졌고,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의 옷매무새를 만져주는 자상함에 지켜보는 내내 미소가 지어졌다.
‘빅마마’ 이혜정 요리 연구가는 1993년 대구MBC <테마가 있는 아침>으로 데뷔한 후 2004년 올리브채널 <빅마마의 오픈키친>에서 특유의 입담과 요리 실력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후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 SBS 파워FM <김창열의 올드스쿨> 등의 방송에서 “다글다글 볶으시고요”, “시금치를 쫑쫑쫑쫑 썰어서요” 같은 그녀만의 실감 나는 표현법은 요리 문외한도 관심을 가질 만큼 듣는 즐거움을 선사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빠져드는 중독성 있는 말솜씨다. “제 본업인 요리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방송에서 말할 때는 전달력이 좋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우선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듣고 그에 맞게 짧지만 효과적인 대답을 하려고 노력해요. 전업주부시절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이야기를 나눈 것도 좋은 훈련이 됐고요.”
요리를 시작한 계기를 묻자 이혜정 요리 연구가는 “거창한 이유가 아니라 가족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려고 했을 뿐”이라는 겸손한 대답을 건넸지만, 어릴 때부터 그녀의 관심사는 오로지 요리였다. 대학생 때 요리를 본격적으로 배우고 싶어 조선 호텔 주방에 찾아가 매일 700개의 달걀을 까고, 부모님 몰래 스위스 로잔 호텔학교에 원서를 낼 정도로 열정이 남달랐다. 결혼 후에도 그 마음은 식지 않았다. 예일대학교 교환교수로 떠나는 남편을 따라가 코네티컷에서 6시간 거리의 뉴욕 C.I.A에서 소스 코스를 수료하고, 마흔 살 무렵 대구에서 요리 클래스를 열 때도 황혜성 선생에게 궁중 음식을 사사했을 정도. 요리 선생으로서 많은 이에게 인정을 받은 마흔세 살 무렵,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탈리아 I.C.I.F로 떠나는 도전을 감행했다. “전 배움에 정해진 시기는 없다고 생각해요. 물론 어머니와 할머니에게 맛을 배웠고, 음식을 통해 소중한 추억을 얻었지만 요리의 기본 개념을 제대로 배울 필요가 있다고 느꼈죠. I.C.I.F에서 조리 순서나 익히고 저장하는 방법 등 구체적인 요리 기술을 배울 수 있었어요.” 또 일본의 후지노 마키코, 구리하라 하루미 선생에게 주말마다 요리를 배우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지금은 어떤 요리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해 다시 세상에 내놓을 수 있는 됐다. “요리는 제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이자 제 일상이에요.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일이고요. 음식에 감사, 사랑 등 저만의 인생 철학을 담을 수 있어 즐거워요. 45년 전 요리를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할 때만 해도 요리가 지금처럼 화려한 문화 콘텐츠로 자리 잡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 시절 최고의 음식은 불고기와 햄버그스테이크였고, 셰프를 주방장으로 부르던 시절이었죠. 화려한 명성을 꿈꾸고 시작한 게 아니라 요리하는 과정 자체를 즐겼을 뿐이에요. 다만 누군가에게 통제받는 것이 아닌 나 스스로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 되어 살아 갈 수 있는 것은 요리 연구가의 매력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카키 컬러 톱과 팬츠, 골드 네크리스 Cos.
그녀는 방송 외에도 각종 요리 경연 대회 심사위원과 강연 등 연예인 못지않은 바쁜 일정을 소화한다. 아무리 피곤해도 오전 6시면 일어나 딸 고준영 요리 연구가와 함께 운영하는 식품 회사 키친스토리, 밥친구의 메뉴 개발에 시간을 쏟는다. 때로는 힘든 순간도 있을 텐데, 어떻게 헤쳐나가고 있을까? “불평보다는 사람들과 제 요리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요. 때로는 요리로 사람들에게 쓰라린 비평을 듣기도 하지만, 제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근사한 일이기도 하잖아요. 사람들의 어떤 말도 ‘틀림’이 아닌 ‘다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지금, 제 인생은 가장 행복해요.”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기에 이혜정 요리 연구가는 새로운 도전도 두려움이 아닌 호기심을 가지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그녀는 지난 1월 NS홈쇼핑에서 이혜정의 <빅쇼>를 런칭해 황태구이, 갈비탕 등 엄마가 해주는 집밥처럼 맛있고 건강한 요리를 선보이고 있다. “벌써 22회를 맞이했는데, 약 8년 동안 함께 호흡을 맞춘 현대홈쇼핑을 떠나 새롭게 시작하는 일이 쉽진 않았어요. 하지만 조마조마하면서도 앞으로 나아갔고, 사람들과 부대끼며 매일 노력하다 보니 5회 연속 매진을 기록할 정도로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었죠. 일뿐 아니라 항상 나다움을 잃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과연 이혜정다운 것은 무엇일까? “나다운 것은 정직하고, 힘들어하지 않고, 누군가를 헐뜯지 않는 거예요. 이 세 가지가 바로 나다운 것이고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만드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녀를 뿌듯하게 하는 일 중 하나는 그녀의 딸 고준영 요리 연구가가 같은 길을 선택한 것이다. “생물학을 전공하던 딸아이가 4학년 졸업을 앞두고 요리를 하겠다고 했을 때 당황스러웠어요. 요리는 때로 뜨거운 물에 데이고 칼에 베이는 위험한 일인데, 소중한 딸의 몸에 상처가 생길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걱정스러웠죠. 하지만 동시에 딸이 평생 요리를 하며 살아온 제 인생을 인정해주는 것 같아 웃으면서도 눈물이 나는 복잡미묘한 기분이 들었어요.” 시간이 흐를수록 엄마에게 딸은 친구와 같은 든든한 존재인데,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그녀에게 고준영 요리 연구가는 어떻게 느껴질까? “여전히 우린 서로에게 가장 친한 친구예요. 요리 연구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예전엔 저를 굳건히 뒷받침하는 어시스트였는데, 지금은 든든한 경쟁자고 점점 무서운 경쟁자로 변해가고 있어요. 그 친구의 젊음과 지식이 저를 끊임없이 되돌아보고 현재에 안주하지 않도록 만들어요.”
어제보다 내일이 더 멋지고 행복할 거라고 말하는 이혜정 요리 연구가. 가족과 함께이기에 걱정보다는 기대가 앞선다고. “제 인생은 오늘 가장 멋지고 아름다워요. 하지만 오늘 제 노력을 더한다면 내일은 오늘보다 행복하고 훌륭한 인생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앞으로 시간이 얼마나 흐르든 기운찬 요리를 하는 사람이자, 씩씩한 준구와 준영이 엄마로 늙어가고 싶어요”라고 답했다. 단순히 그녀의 희망이 아니라 이혜정 요리 연구가는 왠지 20년이 흘러도 특유의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올 것만 같다.

스트라이프 블라우스와 블랙 팬츠 Rubina.
엄마의 요리 철학을 잇는 딸, 고준영 요리 연구가
TV 프로그램에서 본 고준영 요리 연구가의 이미지는 조용하고 수줍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건 섣부른 판단이었다. 실제로 만난 그녀는 주관이 뚜렷하고 열정 넘치는 요리 연구가이자 사업가였다. 대학 시절 생물학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집에 있길 좋아했다는 말이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생물학이 적성에 맞지 않아서 방황하는 저에게 엄마가 제빵 학원에 다녀보라고 권유하셨어요. 원래 어릴 때부터 엄마가 요리하는 모습을 많이 봐왔고 한번 해보자 싶었죠. 그러다 엄마 수강생들에게 제가 만든 쿠키를 대접했는데 정말 반응이 좋았어요. 감사하게도 그중 한 분이 주문을 해주셔서 혼자 동이 트도록 쿠키를 굽고 포장을 하는데 그 순간이 너무 행복했어요. 그게 2002년이었는데, 생물학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요리를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했죠.”
준비를 마친 그녀는 2004년 9월 미국 존스 앤 웨일스 대학교에 입학해 요리에 대한 체계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엄마의 영향으로 요리에 문외한은 아니었지만 학교에서 손 씻는 법부터 시작해 음식 조리법에 대해 체계적으로 설명해주니 재미있더라고요. 예를 들어, 맛있으니까 스테이크를 센 불로 굽는 게 아니라 센 불로 구워야 고기의 육즙이 빠져나가지 않아 맛있다는 것을 차근차근 깨닫게 됐죠.” 2008년 학교를 졸업한 후 한국에 돌아와서도 2009년 경희대학교 조리외식경영학과 석사에 이어 2012년 박사과정에 진학해 요리에 대한 배움을 이어갔다. 요리에 대한 열정이 남다른 것도 유전인 걸까? “논문을 통해 알게 된 지식이 제품을 개발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해요. 그걸 토대로 감식초를 고추장 재료로 사용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는 것도 흥미롭고요. 졸업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발전을 위해 공부는 평생 동안 해야 할 것 같아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다양한 재료로 즐거운 실험을 하는 연구자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요리는 일종의 힐링 수단이에요. 요리를 할 땐 잡념이 사라지고 마음이 평화로워서 좋아요. 무엇보다 새로운 재료로 끊임없이 실험하는 과정이 제겐 여전히 놀이처럼 느껴져요.”
고준영 요리 연구가는 현재 키친스토리와 애견 사료 브랜드 왈와리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으며, 이혜정 요리연구가가 대표로 있는 밥친구의 실무도 담당하고 있다. “2013년 문을 연 키친스토리와 작년 9월에 런칭한 밥친구 모두 엄마의 정직한 요리 철학을 담은 브랜드예요. 둘의 차이점을 찾자면 밥친구는 엄마가 어릴 때 저희에게 해주시던 국, 찌개, 반찬 등의 레시피를 그대로 재현하는 컨셉이에요. 엄마야말로 요리를 사랑하고 모든 요리 과정에 진심을 담아내는 분이거든요. 그런데 키친스토리의 상품으로는 그 뜻을 온전히 전달할 수 없다고 느꼈어요. 그래서 밥친구로 엄마의 손맛이 담긴 음식을 함께 선보이자고 결심했죠. 지금은 대대적인 홍보보다 확실한 시스템을 갖추는 데 중점을 두고 있어요.”
회사의 체계를 갖추는 일뿐 아니라 음식에 대한 선입견을 없애는 것도 그녀가 해야 할 몫이다. “손님들은 집에서 자주 먹는 진미채, 어묵볶음 등의 메뉴는 익숙하게 받아들이지만, 익숙한 재료라도 다른 요리를 만들면 낯설어하시더라고요. 예를 들어, 가지무침은 익숙하게 받아들이지만 가지피클엔 고개를 갸우뚱하시는 식이죠. 그래서 매장을 찾는 손님에게 시식도 권하고 맛에 대한 설명도 곁들이면서 익숙하게 느낄 수 있도록 돕고 있어요.”
요리가 즐거운 놀이라고 표현했지만 때론 이혜정 요리 연구가의 딸로 살아가는 것이 부담스럽진 않을까? “어릴 때는 인간 고준영이 아니라 ‘이혜정 요리 연구가의 딸’로 바라보는 시선이 힘들었어요. 그런데 나이 들고 경험이 쌓이면서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이나 시선에 휘둘리기보다는 자유롭게 제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제가 엄마 딸인 건 누구나 아는 변함없는 사실이잖아요. 엄마보다 잘해야겠다고 욕심부리기보다 제 위치에서 저만의 방식으로 실수 없이 해나가는 게 제 목표예요.”
그렇다면 고준영의 방식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요리를 포함해 현재를 즐기는 거예요. 직원에게도 강조하는 말인데, 스스로 재미있어야 성취욕과 자부심도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사업을 하다 보면 예기치 못한 사고도 일어나지만 오히려 전 그것을 해결하는 데에서 희열을 느껴요.” 빠르게 변화하는 트렌드를 파악하기 위해 관찰을 즐기는 것도 그녀의 방식 중 하나. “엄마는 그런 제 행동을 ‘멍’이라고 표현하시는데, 레스토랑이나 마트에 가서도 전 사람들을 관찰해요. 세 살 아이와 함께 온 주부, 캠핑을 가는 젊은 친구들은 어느 식품 코너를 찾는지 살펴보죠. 마트에서 인기 있는 식자재로 어떤 새로운 요리를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요.”
강아지를 사랑하는 그녀의 또 다른 관심사는 왈와리를 조금씩 발전시켜나가는 것이다. “집에서 개 열네 마리를 키우는데, 그 애들에게 안전하고 맛있는 사료를 먹이고 싶어서 시작했어요. 단기간에 많은 수익을 올리기보다 왈와리에서 합리적인 가격대의 강아지 사료를 선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천천히 알리고 싶어요. 내년 초엔 유기농 사료를 출시할 계획이에요.”
키친스토리부터 왈와리까지 사업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녀의 모습은 거침없고 누구보다 뜨거운 열정이 묻어났다. 이쯤에서 고준영 요리 연구가에게 엄마 이혜정 요리 연구가는 어떤 존재인지 묻고 싶었다. “저는 엄마에게 경쟁자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엄마는 연륜을 바탕으로 또 한 뼘 성장할 것이기 때문이죠. 오히려 엄마 덕분에 방송을 경험하면서 엄마를 이해하게 되고 존경심을 갖게 됐어요. ‘엄마가 많이 힘들었을 텐데 잘 참아오셨구나’, ‘스스로 굳건히 버티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거든요. 경쟁자라는 단어는 과분하고, 제게 인생의 든든한 길잡이가 되어주는 멘토예요.”
키친스토리와 밥친구 같은 사업을 시작한 것도 엄마의 요리 철학을 소중히 지켜나가고 싶어서라고. “엄마는 누구보다 요리를 사랑하고, 요리는 엄마의 인생이에요. 그런 엄마의 마음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어요. 분명 힘든 여정이 되겠지만 음식에 진심을 담는다면 사람들도 분명 엄마의 따뜻한 손맛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노력하고 있고, 진심으로 잘하고 싶어요.”
둘은 인터뷰 내내 서로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으로 딸의 길을 응원하고, 엄마의 요리 철학을 이어가고 싶다는 고백은 사랑한다는 말보다 훨씬 뜨거웠다.
에디터 최윤정(amych@noblesse.com)
사진 JK 장소 협조 알부스갤러리 스타일링 김은선 헤어 성효진(수퍼센스에이) 메이크업 박장연(에이바이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