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올과 이불이 만난 세계
이불 작가가 2013년 향수 ‘미스 디올’에 이어 시그너처 백인 ‘레이디 디올 백’에 새로운 재해석을 더했다. 그녀가 가죽 캔버스에 그리는 찬란하고도 생동감 넘치는 세계.

모든 것을 태워 없앨 것 같은 뜨거운 불꽃. 1990년대에 그녀가 선보인 ‘수난유감’, ‘화엄’ 등의 도발적인 퍼포먼스와 설치 작품 때문일까. 이불 작가는 내게 열정을 넘어 짜릿한 강렬함을 연상시키는 아티스트로 각인됐다. 1987년에 데뷔한 이래 그녀는 소외된 여성, 기술의 미래, 유토피아 등의 주제를 다루며 수많은 이야기를 풀어냈고, 못다 한 말은 브랜드 협업 전시로 이어졌다. 2013년 ‘미스 디올’을 주제로 파리에서 열린 <에스프리 디올, 미스 디올>전에서 처음 선보인 ‘셀라’에 이어 이불 작가가 디올에서 두 번째 협업의 매체로 선택한 것은 ‘레이디 디올 백’이다. 그녀가 디올 백에서 찾은 접점은 무엇인지 직접 들어봤다.
2013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에스프리 디올, 미스 디올> 전시에 이어 디올과 두 번째 협업 전시인데 소감이 어떤가요? 미스 디올에 이어 레이디 디올 백을 주제로 디올과 인연을 이어갈 수 있어서 기뻐요. 2013년엔 향수 미스 디올을 주제로 오로지 제 작품만 보여주는 전시였다면, 이번엔 레이디 디올 백이라는 오브제와 제 작업을 연결할 수 있어 흥미로웠어요.
이번 작품은 이탈리아 철학자 톰마소 캄파넬라의 저서 <태양의 도시>에서 영감을 받은 ‘Civitas Solis’ 시리즈에서 모티브를 가져왔어요. 그 작품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거울을 활용한 ‘반영’은 제가 관심을 두고 있는 작업 주제 중 하나입니다. 매체를 뛰어넘어 표현의 범위를 확장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찰나에 디올 레이디 아트 프로젝트를 만난 거죠.
2013년 전시에서 선보인 ‘셀라’도 내부에 거울 조각을 활용했잖아요. 레이디 디올 백과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누에고치 형태의 ‘셀라’가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닫힌 공간이라 오직 그만을 위해 존재하는 우주라면, 레이디 디올 백엔 거울이 투영하는 거대한 세계가 펼쳐지죠.
명확한 형태와 기능이 존재하는 핸드백에 새로운 컬러를 덧입히는 과정이 쉽진 않았을 것 같은데, 둘의 접점은 어떻게 찾으셨는지 궁금해요.생각해보니 레이디 디올 백과 제가 공통적으로 중시하는 것이 바로 행위자(퍼포머)더라고요. 핸드백은 미술 작품처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들고 다니는 웨어러(wearer)가 존재하잖아요. 제가 주목한 건 단순히 제 디자인을 반영한 가방을 드는 것이 아니라, 웨어러 자신과 거울이 비추는 타인, 주위 환경이라는 3요소가 만난 세계예요. 웨어러가 누구이며 어딜 가고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거울속에서 매번 다른 퍼포먼스가 탄생하는 거죠. 레이디 디올 백의 기능과 이미지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제 작품 세계와 조우할 수 있는 즐거운 경험이었어요.
그게 바로 협업의 매력이겠네요. 그렇죠. 협업을 하다 보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기 쉽잖아요.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와 브랜드가 추구하는 이미지를 양립하는 건 어려운 일이거든요. 그런 면에서 이번 디올 레이디 아트 프로젝트는 아주 깔끔하고 만족스러운 협업이었어요.
60번이 넘는 시도를 거쳐 원하는 디자인의 가방을 탄생시켰는데, 작업 과정이 궁금해요. 디올 공방의 장인들이 제가 원하는 대로 60번의 시도를 거쳐 가방을 만들었어요. 가방 표면이 플렉시글라스 미러로 뒤덮여 있는데 자세히 보면 거울 조각마다 기울기가 달라요. 그것들이 한데 모여 마치 산산조각 난 하나의 큰 거울 같은 느낌을 선사하죠. 오브제의 강한 성격 탓일까요? 무채색을 사용했음에도 수많은 가방 사이에서 존재감이 엄청나요. 거울이라는 오브제는 강한 재료지만 실제로 자신의 모습을 강렬하게 드러내진 않아요. 항상 자신이 아닌 외부를 투영하죠. 그 역할에 충실하면 화려한 컬러를 사용하지 않아도 충분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어요.
‘나의 거대 서사’, ‘태양의 도시’ 시리즈도 그렇고 작가의 작품을 떠올리면 하나의 작품이 아니라 세계를 창조한 느낌을 받습니다. 거대한 작품이 아닌 작은 사이즈의 핸드백을 재해석하는 작업이 새롭고도 어려웠을 것 같아요.작업 의도를 드러내는 데 작품의 사이즈는 중요하지 않아요. 가방 크기는 작을지 몰라도 오히려 세계를 품는 활동 반경은 넓어졌어요.
거울을 통한 반영 외에 관심을 두고 있는 주제가 있나요? 작업 초기부터 몸을 이용한 퍼포먼스를 선보일 정도로 끊임없이 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어요.
1990년대에 선보인 보디 퍼포먼스를 또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번 작품에도 퍼포먼스가 있잖아요. 가방을 든 사람 모두 자신만의 스토리를 써 내려가는 퍼포머 아닐까요?
초기에 “예술로 세계를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엿보였다”는 말씀을 하셨고, 그 후엔 “예술로 세계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셨잖아요. 지금은 어떤가요? 예술가의 역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지금도 참 고민과 의문이 많아요. 명확히 대답하기 어렵네요. 삶에 대한 질문을 하면 매일 대답이 달라지잖아요.
내년 계획에 대해 알려주세요. 2018년 5월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 9월 베를린 마르틴 그로피우스 바우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앞두고 있어요. 그 후에는 아시아에서 전시를 이어갈 예정이고요.
아티스트로서 많은 것을 이뤘지만 여전히 성취하고 싶은 목표가 있나요? 마감 시간 안에 작품을 끝내는 거예요.
생각보다 단순하네요. 목표는 가까울수록 좋다고 하잖아요. 하나씩 끝내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거죠. 목표를 너무 원대하고 추상적으로 설정하면 절대 다다르지 못하니까요.
에디터 최윤정(amych@noblesse.com)
사진 정태호 인터뷰 협조 디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