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로 또 같이
조각가 최수앙은 인체를 토대로 조각 작업을 한다. 안무가 김나이는 몸을 움직여 또 다른 자신을 만든다.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들이 어느 날 쉬이 웃고 넘길 수 없는 공연 하나를 선보였다.
조각가 최수앙과 안무가 김나이. 둘의 양옆으로 놓인 작품은 최수앙의 ‘Perception’(왼쪽)과 ‘The Heroine’(오른쪽)이다. 이 두 작품은 그의 ‘The One’과도 영감을 공유한다. 중앙의 오브제는 미완성작으로 곧 선보일 예정이다.
지난 1월의 마지막 밤, 문화역서울 284의 RTO 공연장. 어둡고 차가운 조명 아래 안무가 김나이를 포함한 6명의 무용수가 딱딱하게 서 있었다. 그들은 모두 표정을 가린 화이트보드 재질의 마스크를 쓰고 결박복을 모티브로 만든 하얀 무용복을 입고 있었다. 어딘가 금방이라도 서로 밀쳐낼 듯한 분위기. 잠시 뒤 올라뷔르 아르드날스의 잔잔하지만 의욕적인 음악이 시작되자 무용수들은 공연장을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어둠 속에 숨어있던 먼지가 영문도 모른 채 그들을 쫓았다.
무용수들은 하나가 되길 강요당하지만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남녀 사이를 춤으로 보여줬다. 각자 들고 있던 매직펜으로 첫 만남 후 서로의 기대치와 원하는 표정을 상대방이 쓴 가면에 그려나갔다. 상대의 얼굴에 눈썹과 입술 등 표정을 그려주는 건, 그에게 자신이 기대하는 모습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다 서로 다른 기준을 적용하며 갈등도 생겼다. 관계를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은 각자의 고집. 상대를 있는 그대로 봐주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기대를 걸어 금세 토라지게(곤) 했다. 한 커플은 격하게 싸우지만 몸이 밧줄로 묶여 있어 어찌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밧줄로 묶인(구속) 상태 그 자체에 실망하진 않았다. 점점 그걸 차고 나오며 활발하게 움직였다. 40여 분간 이어진 이날 공연은 작품 속 한 커플의 진한 입맞춤으로 끝났다. 하나, 그 입맞춤은 해피엔딩은 아닌 듯 보였다.
‘The One’이란 이름의 이 공연은, 안무가 김나이가 조각가 최수앙의 결코 일체가 될 수 없는 남녀 관계를 형상화한 동명의 조각에서 영감을 얻어 무용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김나이는 최수앙의 조각에서 모티브를 얻었으나, 그걸 해석해 안무로 풀어내는 과정에서 한껏 다른 모습을 취했다. 그녀는 이날 발레에 기반을 둔 부드러우면서도 절도 있는 춤을 췄다. 그보다 하얄 수 없는 무용복과 마스크로 몸을 감쌌지만, 바닥을 뒹굴고 쓸며 그것이 절로 더러워지게 하는 대범한 연출을 선보였다. 그건 애초에 순수하던 남녀의 마음이 퇴색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우리가 삶에서 의미있는 관계를 만들기 위해 벌이는 어떤 투쟁이기도 하다. 뒤틀린 남녀의 현재 모습만 담아내는 최수앙 작가의 그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공연이 끝난 며칠 뒤, 이 공연에 동기를 부여한 조각가 최수앙과 안무가 김나이를 최수앙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The One’의 공연 모습 ©조하영
두 사람은 어떻게 처음 만났나?김나이: 지인의 소개로 최수앙 작가의 조각을 접하게 됐다. 사람보다 작품을 먼저 봤다. 알다시피 최수앙 작가는 주로 신체를 자세히 표현해온 분이다. 등을 꿰매어 하나처럼 보이지만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는 남녀 조각 ‘The One’을 보고 느낀 것이 많다. 최수앙: 김나이 안무가가 나보다 내 작품을 먼저 봤듯, 나도 김나이 안무가가 지난해에 올린 공연 <장화 홍련>을 먼저 봤다. 당시 몰래 가서 공연만 보고 인사는 따로 하지 않았으니, 나 역시 사람보다 작품을 먼저 본 셈이다.(웃음)
공연 레퍼토리는 당연히 김나이 안무가가 짰겠다.김나이: 안무도, 음악도 내가 짜고 정했다. 근데 이 공연이 초연은 아니다. 지난해 9월 서울 시내 한 갤러리에서 한 차례 관객 앞에서 선보였다. 당시엔 4명이 춤을 췄고, 공연 시간도 15분으로 짧았다.
최수앙 작가가 무용수를 위해 무용복과 소품을 제작했다고 들었다.최수앙: 그랬다. 공연에 참여할 수 없으니 대신 무용복과 소품 같은 걸 만들어줬다. 근데 사실 그걸 만드는 것도 쉽진 않았다. 마스크는 각 무용수의 얼굴을 실제 석고로 본떠 만든 거다. 또 무용복은 남녀가 서로에게 구속되는 걸 표현하기 위해 정신병동 환자의 결박복에서 힌트를 얻었다.
공연장이 독특했다. 무대와 객석이 구분돼 있지 않아 무용수와 함께 공연한 느낌도 들었다.김나이: 안무를 짤 때 공간에 맞춰 구성하는 걸 중요시한다. 지난해에 <장화 홍련> 공연을 할 때도,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는 5개의 퍼포먼스를 관객이 선별적으로 따라가며 관람하는 형식이었다. 이번 문화역서울 284의 RTO 공연장도 마찬가지다. 전형적 무대-객석의 형태는 아니다. 무대가 아닌 공간에서 굳이 관객과 공연자를 구분 지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공연을 준비하며 서로 어떤 의견을 주고받았나?김나이: 사실 공연의 상당 부분을 먼저 만들어놓고, 이후 궁금한 걸 최수앙 작가에게 묻는 방식으로 의견을 나눴다. 그때 내가 “조각 ‘The One’은 당연히 새드엔딩이죠?”라고 물은 것 같다. 작품 속 남자와 여자의 표정이 어두워 그렇게 물었는데, 최수앙 작가가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당연히 해피엔딩이죠”라고 답해서 당황스러웠다.(웃음) 최수앙: 아니, 그건 이렇게 설명하는 게 맞다. 조각 ‘The One’은 남녀가 서로 다른 데로 갈 수 없게 등이 꿰매어져 있다. 결국 둘이 붙어 있는 상태니 어떤 관계로 얘길 한다면, 다르게 볼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꿰매어져 있는 건 하나의 ‘상황’일 뿐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해피엔딩’이라고 한 거다.(웃음)
최수앙 작가의 조각이 ‘무표정’이라 그런 건 아니었을 까?최수앙: 내 작품은 행동이나 표정, 캐릭터로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뭔가를 일부러 만들어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그게 우리 일상의 모습이기도 하고. 군더더기를 전부 뺐다고 보면 쉬울 거다. 그러니 ‘무표정’은 맞을지언정, 슬프다고 보긴 어렵다.
조각가는 정지된 상태의 조각상을 만들고, 무용가는 몸을 움직이며 작업한다. 타 장르의 예술가와 작업하며 얻은 건 무엇인가?김나이: 협업 과정에서 장르의 특성상 다르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면이 있긴 했다. 이를테면 딱딱한 석고만 만져온 최수앙 작가가 무용복 같은 걸 만드는 건 쉽지 않았을 거다. 나와는 다른 장르의 예술가로서 움직이는 몸에 어떤 옷이 적절할 지에 대해 새로운 고민을 했을 것 같다.
최수앙 작가의 경우 이번처럼 자신의 조각이 무용으로 발전한 걸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 무용 외에 미디어나 건축, 패션 등 타 장르에서 협업 제안이 와도 받아들일 건가?최수앙: 다른 예술 장르와의 협업 가능성은 늘 열어두고 있다. 사실 이번에는 지난해 김나이 안무가의 공연을 보고 너무 좋아서 내가 먼저 협업을 제안할 뻔했다.
공연 마지막 장면의 키스 신이 인상적이다. 보통 그렇게 둘이 하나가 돼 키스하면 해피엔딩이어야 하는데, 어딘가 그렇지 못한 답답한 부분이 있었다.최수앙: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욕망 때문에 개인의 본질을 놓칠 수 있다. ‘The One’에선 물리적으로 남녀의 등을 꿰맸는데 서로 정면을 볼 수 없는 아이러니가 생겼다. 군대와 학교, 직장 등에서 매번 하나가 될 것을 강조하지만 진정한 하나가 될 순 없지 않나. 이처럼 키스한 둘은 서로 좋을 수도, 싫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에디터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