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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영화 한 편, 포스터를 만드는 사람들

LIFESTYLE

디자인 스튜디오 ‘프로파간다’의 디자이너 최지웅과 ‘빛나는’의 박시영은 영화 뒤에서 관객을 유혹하는 사람이다. 이들이 만든 포스터 한 장이 관객을 극장으로 데려오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왼쪽부터_ 디자인 스튜디오 ‘빛나는’의 박시영, ‘프로파간다’의 최지웅

근사한 외국 영화 포스터를 큰 액자에 담아 방 안을 장식하는 것이 유행한 때가 있다. 뤼크 베송 감독의 <그랑 블루>와 <레옹>, 멕 라이언 주연의 <프렌치 키스>는 영화만큼이나 포스터도 인기를 누렸다. 사진작가 강영호가 촬영한 이정재·심은하 주연의 <인터뷰>는 당시에는 보기 드문 톤의 사진으로 포스터 품귀 현상을 빚기도 했다. 포스터를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여겼다 하면 과장일 수 있겠지만 영화와 같은 위치에서 사랑받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영화의 얼굴이라 일컫는 포스터는 120분짜리 영화가 지닌 감성과 스토리를 단 한 컷의 사진과 짧은 카피에 농축해 전달한다. 길을 가다 우연히 봤든, 극장의 화려한 쇼케이스 안에 놓여 있든 보는 순간 ‘아, 이 영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는 중요한 임무를 띤다. 관객이 영화를 직접 보기 전, 가장 먼저 정보를 접하는 창구의 역할도 한다. 디자인 스튜디오 ‘프로파간다’의 최지웅과 ‘빛나는’의 박시영 디자이너는 극단적으로 다른 스타일의 영화 포스터를 만든다. 이들의 이름은 업계는 물론 영화 마니아에게도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멀티플렉스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대작 영화는 물론 독특한 예술영화 포스터까지 수많은 영화가 그들의 손을 거쳤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그들의 디자인을 일상에서 가까이 봐왔다. 앞으로는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최지웅, 박시영의 이름이 눈에 들어올지도 모르겠다.

‘빛나는’에서 작업한 영화 포스터 <관상>과 <돈의 맛>

두 분은 여러 일을 하지만 영화 포스터 디자이너로 가장 널리 알려졌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시나요?
최지웅(이하 최) 촬영 전 스태프와 배우가 보는 시나리오 북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필요한 모든 비주얼 작업을 합니다. 극장에 걸리는 현수막, 편의점에 걸리는 프로모션 페이지, 엽서, 팸플릿, 버스나 지하철의 광고까지 전부 저희 손에서 나와요.

영화 포스터 디자인을 처음 시작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초등학생 때부터 영화 포스터를 모았어요. 고등학교 다닐 때 2~3년 동안 매일 포스터를 뜯으러 간 극장이 있는데 하루는 영사실 기사님한테 딱 걸렸죠. 사무실로 데려가길래 엄청 혼날 줄 알았는데, 거기에 극장이 문을 연 이래 상영한 모든 작품의 포스터가 쌓여 있었어요. 마음대로 가져가라 하고는 택시비도 주셨죠. 밤새도록 포스터를 챙겨오면서 영화 포스터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결심했어요. 전 미대에도 포스터 디자이너 하려고 간 거예요.
박시영(이하 박) 저는 정반대예요. 제가 96학번인데 그 당시 지금 시네마테크의 전신인 문화학교서울에 다니면서 우연히 영화계 사람들을 만나고 퀴어 영화제 포스터를 만들면서 시작했어요. 영화에 관심도 없었고 디자인 같은 건 생각도 못했죠. 용돈벌이로 시작했는데 운이 좋은 것 같아요. 당시에 홍대 인디 문화, X세대가 뜨면서 주목을 받았죠. 최 박시영 실장이 대단한 게 그 당시엔 포토샵도 못할 땐데 포스터를 한글97로 만들었다는 거예요. 그때는 서로 모르는 사이였는데 박 실장이 만든 부천영화제 포스터를 보면서 참 좋다고 생각했어요. 그걸 지금도 소장하고 있지요.

운이 좋았다 해도 ‘빛나는’과 ‘프로파간다’를 꾸준히 찾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물론 결과물이 좋을 때도 있겠지만 저는 일할 때 처음 기획한 대로 단호하게 진행하는 면이 있어요. ‘빛나는’은 한눈에 꽂히는 강한 걸 잘하고, ‘프로파간다’는 디자인적으로 탄탄해서 깔끔하게 떨어지는 맛이 있는 것 같아요.
꾸준히 찾는 클라이언트는 무엇보다 코드가 잘 맞아서 아닐까요? 우리는 대작 영화보다 예술영화를 주로 하는데 처음부터 감성이 잘 맞는 작품을 골라서 하기도 해요.

‘빛나는’에서 만든 포스터는 영화배우의 얼굴이 잘 드러나고 폰트도 크고 시원시원한 매력이 있어요. 반면 ‘프로파간다’는 감성을 자극하는 예술영화 포스터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죠.
제 경우 가장 큰 이유는 디자인을 못해서 그래요. 디자인적으로 잘 구성하는 것에 약하니까 박력으로 가자, 그런 거죠.(웃음)
제 취향은 사람을 작게 배치해 여백이 많은 포스터를 좋아해요. 예술영화는 제 스타일대로 가능한데 대작 영화는 마이너 취향이라고 클라이언트가 싫어해요.

영화 포스터 디자인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일까요?
영화가 잘되든 못되든 많은 사람이 알 수 있는 디자인을 한다는 것이 첫 번째인 것 같아요.
누구나 다 알 수 있고 파급 효과도 크죠. 그만큼 욕도 많이 먹고, 디자인을 발로 했느냐는 악플도 달리지만 이제는 그런 반응조차 재미있어요.

악플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외국 영화 포스터 작업이 특히 힘들 것 같아요. 오리지널 버전과 비교되기도 쉽고요.
외화는 오리지널 자료가 오면 로고만 한국화하는 경우도 있어요. 자료가 많지 않은데 새롭게 만드는 재미가 있다면 더 표현하고 싶은데 못할 때의 아쉬움도 있습니다. 일본 영화는 리터치도 못해요. 예전에 일본 배우 얼굴의 점을 지웠는데, 다시 살려놓으라는 요구가 들어온 적도 있어요.(웃음)
한국 영화는 제로에서 시작하니까 방향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범위가 넓죠. 하지만 베이스가 없으니 디자인 의도와 상황이 맞지 않으면 결과가 산으로 갈 수도 있어요.

스타일이 다른 만큼 포스터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도 서로 다를 것 같아요.
포스터를 보면 한눈에 영화의 스토리를 알 수 있는 걸 좋아해요. 예를 들면 킬러와 타깃이 있고 추격하는 상황을 함축적으로 녹여서 보여주는 거죠.
저는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내가 관객이면 이 영화를 왜 봐야 할까 먼저 생각해요. 포스터를 잘 만들어서 관객을 끌어당겨야 하지만 시작은 이거죠.

‘프로파간다’에서 만든 <워낭소리>와 <집으로 가는 길>

각자 지금까지 작업한 작품 중 특히 기억에 남는 포스터가 있나요?
<마더>, <돈의 맛>, <관상>을 꼽을 수 있는데 <마더>는 결과물보다는 촬영 현장에서 주연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서 ‘평생에 이런 작업을 다시 해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돈의 맛>과 <관상>은 오랜 시간 작업한 만큼 디테일 면에서 만족스러워요.
<관상>은 2013년 올해의 포스터였잖아요. 저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직접 말은 안 했지만 서로 자극을 받아요. 저는 독립해서 처음 작업한 김기덕 감독의 <비몽>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에요. 그 덕분에 회사도 많이 알려졌죠. 2008년 관객이 뽑은 최고의 포스터상을 받은 <워낭소리>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서로 ‘저건 내가 했으면 잘했겠다’ 싶은, 질투 나는 작품이 있나요?
전 <건축학개론>요!
<은교>요. <롤리타> 같은 작품이기도 하고 영화의 관능적인 분위기가 좋았어요. 주연 배우인 김고은 씨의 강렬한 느낌 때문에 진짜 해보고 싶었어요.

업계에서 팸플릿, 포스터 같은 소품이 필요하면 최지웅을 찾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오랫동안 영화 포스터를 수집해온 컬렉터이기도 하죠. 포스터 디자인의 변천사를 꿰고 계시겠어요.
2000년대 초반에는 광고처럼 꾸민 사진이 많았어요. 포스터 촬영을 위해 세트를 만들고 스태프를 따로 꾸린 것이 김기덕 감독의 <나쁜 남자>가 처음이었어요. 요즘은 자연스러운 걸 원해서 스틸 사진으로 만들 때도 있어요. 한국처럼 이렇게 포스터를 위해 따로 촬영하는 나라는 없어요.

한 편의 영화를 완성하려면 많은 요소가 필요합니다. 영화 산업의 규모가 점점 커지고 대규모 자본이 들어오는 추세인데, 그 안에서 영화 포스터가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될까요?
모든 마케팅의 베이스캠프, 출발점이죠. 영화라는 매체가 있는 한 짝을 이뤄 가는 겁니다. 요즘은 점점 마케팅 파트로 넘어가 기능성을 강조하고 있긴 해요.
포스터가 관객을 극장에 오게 만들 수는 있어도 흥행 성공은 분명 영화가 재미있어야 해요. 저는 포스터가 정직했으면 좋겠어요. 단순히 다음 달에 영화 개봉하니까 뚝딱 만들어 내놓는 작업은 싫어요. 영화 포스터는 영화와 함께 영원히 남거든요. 작품이 개봉하고 흥행하면 끝이라는 마인드가 범람하고 포스터가 전문가의 영역이라는 느낌이 줄어들었어요.

잘 만든 영화 포스터란 어떤 작품을 말하는 걸까요?
그건 저도 알고 싶네요.(웃음) 최근에 느낀 것이 있는데, 예를 들어 ‘프로파간다’에서 작업한 <마이 플레이스> 포스터를 보면 영화가 품고 있는 이야기를 단번에 알 수 있어요. 그래서 저도 그 영화를 봤어요. 포스터에는 적당한 ‘뻥’이 있어야 해요. 말도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어떤 부분을 극대화해 표현해야죠.
그게 관객의 발걸음으로 이어지면 성공이죠. 보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맛이 있는 포스터가 좋은 포스터인 것 같아요. 시나리오를 처음 읽을 때 영화의 컨셉이 확실하고 말할 키워드가 많은 영화는 포스터도 재미있어요.

좋은 영화 포스터는 좋은 시나리오에서 출발한다는 말이군요.
100% 그렇죠. 키워드 없이 그림이 예쁠 수는 있지만 포스터의 기능이 살려면 좋은 시나리오가 있어야 해요.
규모가 작은 예술영화도 나름대로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아요.
이런 영화가 있다는 것만 알려줘도 성공인 것 같아요. 예술영화는 홍보 예산도, 상영관도 적어요. 포스터가 영화를 눈에 띄게 만들어줘야 해요.

이 감독의 영화는 꼭 작업해보고 싶다, 욕심나는 감독이 있나요?
봉준호, 박찬욱 감독님요. 홍상수 감독님은 한 번 해봤는데 계속 하고 싶어요. 모두가 탐내죠. 열려 있고 키워드가 확실하니까요.
저는 <낮술>과 <조난자들>의 노영석 감독님, 홍상수 감독님 작품은 정말 해보고 싶어요. 홍상수 감독님 영화는 남자의 못난 구석과 허세, 술을 다 담고 있죠. 진짜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두 분이 작업 중인 2014년 개봉 예정 영화 중 추천할 만한 작품이 있나요?
임권택 감독님의 <화장>. 안성기 씨가 주연인데 그가 오랫동안 암 걸린 와이프의 수발을 들면서 회사에 새로 들어온 여자 직원에게 느끼는 감정을 모던한 이야기로 풀어내요. 제목 ‘화장’은 장례 의식과 메이크업,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요.
4월 개봉 예정인 <아버지의 이메일>이라는 우리나라 다큐멘터리요. 컴맹인 아버지가 죽기 전 딸에게 47통의 이메일을 남겼어요. 아버지가 살아온 인생에 대해 쭉 썼는데 거기에 가족의 역사와 한국의 현대사가 다 들어 있어요. 최근 본 다큐멘터리 중에서 가장 좋았어요.

마지막으로 포스터 디자이너로 어떤 꿈을 품고 사는지 들려주세요.
평생 기억에 남을, 좋은 영화 포스터를 만드는 게 꿈이에요. 영화평론가가 글로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처럼, 디자인으로 영화의 가이드 역할을 하고 싶죠.
저는 현실적 고민을 하고 있어요. ‘빛나는’은 8년 정도 된 사무실인데 더 이상 신선한 작업을 보여주지 못할 때, 클라이언트가 찾지 않기 전에 스스로 잘 내려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에디터 고현경
사진 이영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