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는 임대료 위에 나는 상상력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임대료로 부엌이 있는 집마저 사치인 홍콩의 현실. 이런 상황에서 가난한 아티스트들이 작업실을 찾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이런 난국에도 그들은 생존 전략을 모색한다. 후원자를 찾거나, 저항하거나, 혹은 전혀 다른 대안을 창조해내거나.

사라져가는 농토를 지키고 그곳에서 직접 식량을 재배하는 것에 목표를 둔 ‘상우드군 푸드 앤 파밍 필름 페스티벌’의 현장. 이들은 비슷한 환경에 처한 타이완과 태국, 일본, 미국의 젊은 작가들과 독립 영화 제작자들을 초청해 직접 농토를 일구는 현장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 상영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농부 작가들의 출현
예술인들이 도시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을 일으키고, 이후 그 장소를 떠나 새로운 곳을 개척하는 움직임은 전 세계 도시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리고 지금 홍콩은 분명 그 중심에 있다. 잘나가는 상업 갤러리도 높은 임대료로 공간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 이어지며 예술가들의 작업 공간은 공장 지대로, 심지어 농촌으로까지 멀어져가고 있으니 말이다. 도심지 땅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바다를 메우고, 산 중턱에까지 초고층 빌딩을 짓는 숨 막히는 이곳 홍콩에서 현재 화제가 되고 있는 키워드는 그럼에도 우리의 허를 찌른다. 바로 ‘농사’이기 때문이다.
지금 젊은 홍콩 작가들의 관심은 온통 농사에 집중돼 있다. 여기엔 앞으로 집은 물론 당장의 먹거리를 구하기도 힘들 수 있다는 작가들의 불안이 숨어 있다. 지난 시간 동안 사실 젊은 홍콩 작가들의 활동은 정부, 도시 개발자들과 맞물려 지난하게 이어져왔다(젠트리피케이션 현상으로 작가들이 점점 외지로 쫓기는 일련의 과정). 그 때문에 옥상이나 도시의 버려진 터를 쓸고 닦아 건강한 식자재를 공급받겠다는 계획이 그리 터무니없는 생각은 아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예술가들에게 흙에서 식자재를 얻는 생산 활동은 낯선 모습이 아니니까. 현재 이런 기류의 중심엔 아티스트 듀오 ‘C&G(Clara & Gum)’가 있다.

사라져가는 농토를 지키고 그곳에서 직접 식량을 재배하는 것에 목표를 둔 ‘상우드군 푸드 앤 파밍 필름 페스티벌’의 현장. 이들은 비슷한 환경에 처한 타이완과 태국, 일본, 미국의 젊은 작가들과 독립 영화 제작자들을 초청해 직접 농토를 일구는 현장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 상영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C&G는 2015년부터 홍콩 전역에서 ‘피치랜드 프로젝트(In Search of the Peachland)’와 ‘상우드군 푸드 앤 파밍 필름 페스티벌(Sangwoodgoon Food and Farming Film Festival)’ 등을 통해 도시 개발자들의 발길이 아직 닿지 않은,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 홍콩의 농경지를 점유해 ‘이상향’으로서 ‘농사 운동’을 진행해왔다. 농산물을 직접 만들어 먹는 이들의 주체적 행동은 사실 1997년 중국에 홍콩이 반환되며 사라진, 옛 홍콩의 자율성을 되찾기 위한 움직임의 일환이기도 하다. 이들에게 원래 홍콩의 소유인 홍콩 땅에서 스스로 식자재를 생산해 먹는 행위는 힘센 부동산업자들과 중국 정부의 관료주의에 저항하는 힘을 키우는 행위이자, 저항 그 자체인 셈이다. 그런 그들이 오는 7월, 중국에 홍콩이 반환된 지 20주년이 되는 달에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C&G를 비롯해 지금 홍콩의 젊은 작가들은 7월을 ‘예술적 저항’의 달로 만들 예정이다. 가장 기본적 시위인 행진과 토론, 전시 행사를 진행하는 한편, 자연스레 시위의 일환으로 농작물 또한 보살필 계획이다. 만약 올여름 홍콩의 건물 옥상마다 채소가 자라고, 길거리 공터에서 바나나가 자라고 있다면, 그 농작물은 창작과 시위의 산물, 즉 젊은 홍콩 작가들의 예술 작품임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일례로 농경지로 쓸 만한 땅을 점유해 농사를 짓는 ‘피치랜드 프로젝트’를 기획한 C&G의 클라라 청(Clara Cheung)은 동아시아 작가들과의 토론 프로젝트 ‘r:ead #5’를 홍콩 반환 20주년 행사 시점에 맞춰 6월 15일부터 25일까지 홍콩 시내에서 진행한다. 현재 홍콩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과 한국, 타이완, 홍콩 작가들을 만나 ‘신화와 역사, 정체성’을 주제로 토론을 벌이는 것. 이 토론과 별개로 그녀는 리서치 기반의 전시 프로젝트인 <토크오버/핸드오버 2.0>전도 개최한다. 이는 홍콩의 문화적 문제와 주제에 대한 리뷰를 담은 제안서를 정부에 제출하도록 요청받은 홍콩 작가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전시. 이외에도 지금 홍콩에선 홍콩 반환 20주년과 관련된 300여 개의 크고 작은 행사가 준비 중이며, 앞으로 그 열기는 점점 더 뜨겁게 달아오를 전망이다.

독립 서점 ‘ACO 북스’부터 작가의 작업실, 카페, 예술인 커뮤니티 등이 모두 들어선 푸탁 빌딩. 지난 아트 바젤 홍콩 기간에 이들은 영화 상영과 워크숍 등을 진행하는 오픈 스튜디오를 운영해 주변을 축제의 현장으로 만들었다.
오래된 도심 빌딩의 새로운 움직임
홍콩에서 부동산 가격의 고저로 지역을 나눌 때 늘 상위권으로 분류되는 완차이(Wan Chai) 지구. 이곳의 중심엔 흥미로운 아트 스폿이 하나 있다. 1960년대에 지어 낡고 허름한 탓에 눈에 잘 띄지 않지만 한번 들어가면 누구든 반하는 곳, 바로 푸탁 빌딩(Foo Tak Building)이다.
이 빌딩의 1층에 들어서면 개성적으로 꾸민 층별 안내와 네임 카드가 방문자를 맞는다. 그다음 건물의 대지 면적만큼이나 좁디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인 14층에 내리면 다시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된다. 빌딩 최정상엔 독립 서점 ACO 북스(Art and Culture Outreach Books)가 자리 잡았다. 어느 가정집을 방문한 듯 조용하고 소박한 이 서점은 ‘오거닉한 삶의 방식’을 표방한다. 영문 서적 위주로 예술·문학·철학 서적과 독립 잡지를 소개하는데, 주류 서점에 없는 책만 선보인다는 철칙 덕분에 특이한 책을 발굴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또 이곳에선 이따금 인디 밴드의 공연도 열려 한바탕 시끄러운 밤을 연출하기도 한다고. 8층의 카페 마키(Makee)에선 각종 빈티지 물건과 맛있는 케이크를 취급하며(이곳의 페이스트리는 빌딩 옥상 정원에서 재배한 식자재로 만든다), 5층의 비영리 독립 영화 기관 잉이치(Ying e Chi)에선 세계 각국의 독립 영화 DVD를 판매한다. 이게 끝이 아니다. 각 층에 아기자기한 숍과 출판사, 예술인 커뮤니티, 작가들의 작업실과 공방 등 ‘예술’의 범주로 포괄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공간이 산재해 있기 때문. 참고로 지난 홍콩 바젤 기간엔 빌딩 전체가 마치 대규모 축제라도 벌이듯 일제히 오픈 스튜디오를 운영해 화제를 낳기도 했다. 과연 외관부터 내부까지 모든 것이 심상치 않은 곳이다.

1, 2 독립 서점 ‘ACO 북스’부터 작가의 작업실, 카페, 예술인 커뮤니티 등이 모두 들어선 푸탁 빌딩. 지난 아트 바젤 홍콩 기간에 이들은 영화 상영과 워크숍 등을 진행하는 오픈 스튜디오를 운영해 주변을 축제의 현장으로 만들었다.
여담으로 푸탁 빌딩은 홍콩의 돈 없는 예술인들이 작업실을 구하지 못해 고충을 겪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건물주가 작가들에게 시세의 5분의 1로 10여 년간 렌트해준 의미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렇게 누구든 입주해 저렴한 비용으로 공간을 이용하다 떠나는 유연한 렌털 시스템의 탄생은 비용 부담 없이 예술 활동을 벌일 공간을 찾는 작가들 덕에 가능했을 법하다. 한데 이 빌딩의 성공이 요 몇 년 사이 중국 정부의 예술 정책을 변화시켰을 정도라니, 그 영향력을 이젠 모두가 인정하는 모양이다. 살인적인 임대료로 굴지의 금융 기업마저 버티기 힘들다는 홍콩에서 이렇게 예술인들이 둥지를 틀고 자유롭게 활동하는 모습은 어딘가 가슴을 뜨겁게 한다. 올여름, 삭막하고 복잡한 도시에서 젊은 예술인들의 독창적인 감각과 에너지를 찾고 싶다면 푸탁 빌딩에 꼭 한번 들러보자.
에디터 이영균(youngkyoon@noblesse.com)
글 이나연(독립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