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트로’, 시간의 유혹술
바야흐로 레트로의 시대다. 세대와 세대를 연결하며 대중문화 전반에 강한 흔적을 남긴 레트로 열풍이 고급문화에도 속속 영향을 미치고 있다. 왜 우리는 시대를 끊임없이 거슬러 과거의 유산에 매료되는 것일까? 그 화두를 다시 질문할 때다.
1931년 개봉한 찰리 채플린 영화 <시티 라이트(City Lights)>의 한 장면. 지난 4월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재개봉했다.
<모던 타임즈>, <위대한 독재자> 등 찰리 채플린의 전작 장편과 단편이 잇따라 개봉하며 화제다.
2015년, 적어도 한국의 대중문화만큼은 레‘ 트로’로 시작했다. 지난 1월 TV 오락 프로그램 <무한도전>이 기획한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토토가)’가 화제를 모으면서 출연 가수의 1990년대 히트곡이 다시 음반 차트 상위권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프로그램이 끝난 뒤에는 각종 프로그램에서 이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2010년 가을, 명동의 음악 감상실 쎄시봉 멤버들이 쇼 프로그램에 함께 등장하면서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노래가 인기를 끈 상황과 무척 닮았다(흥미롭게도 두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모두 유재석이다. 그는 1972년에 태어나 1991년에 데뷔, 오랜 무명 생활 끝에 2000년대 이후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1970년대와 1990년대 그리고 2000~2010년대라는 서로 다른 시간대를 연결하는 인물로 꽤 적합해 보인다). TV나 음악계뿐 아니라 영화계도 레트로에 힘을 실었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1400만 명이라는 엄청난 관람객 수를 기록하며 최고의 흥행을 거둔 <국제시장>은 ‘레트로의 모든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중국 문화대혁명을 배경으로 한 위화의 소설 <허삼관 매혈기>를 한국전쟁 이후 1960년대로 옮긴 <허삼관>, 제목 그대로 1970년대 남서울 개발 사업을 둘러싼 권력 다툼을 다룬 <강남 1970>, 쎄시봉 멤버의 이야기를 극화한 <쎄시봉> 등이 <국제시장>의 바통을 이어받아 관람객의 향수를 자극했다. 왜 이렇게 많은 영화가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 것일까? 대중 영화가 막대한 예산과 오랜 시간을 투자해 치밀한 마케팅 전략으로 탄생한 쇼비즈니스업계의 ‘대표 상품’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대중문화의 레트로 현상은 시류에 편승한 얄팍한 상술만은 아닐 것이다. 또한 식품, 의류, 서비스, 뷰티 등 여러 업계가 관련 콘텐츠의 파생 상품으로 연동된다는 점에서 한 장르에 국한한 문제도 아니다. 무엇보다 레트로 열풍의 전제 조건은 그만큼의 수요다. 복고풍 카페, 대기업이 운영하는 한식 뷔페, 흘러간 가요를 틀어주는 DJ가 있는 술집에는 중·노년 세대와 젊은 세대가 함께 섞여 있다.
딜런 류, Le Chateau de Dylan, 2012_빈티지 디자이너이자 아티스트인 딜런류는 샤넬, 에르메스,비르의 빈티지 잡지 광고와 제품을 활용해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켰다.
쥘 세레(Jules Ch´eret), The´atrophone , 석판화, 124.2×87.4cm, 1890_20세기의 음악 문화를 조명한 뉴욕 MoMA의 기획전
왜 레트로일까?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레트로 열풍’이라는 단어를 입력하면 관련 기사가 우르르 쏟아진다. 앞서 언급한 사례부터 <응답하라> 시리즈, <건축학 개론> 등 최근 2~5년 사이 흥행한 레트로의 히트 상품까지 하나 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1990년대 초반까지 당도하게 된다. 레트로는 해마다 ‘트렌드’의 대표주자로 등장하며, 그 시대를 분석하고 평가하며 정의하는 키워드였다. 황금시대를 꿈꾸며 과거의 우수한 대상을 동경하고 좇는다는 맥락에서 오늘의 레트로는 인류 역사의 ‘고전주의’와 닮았다. 통상 20년 사이로 레트로가 유행을 한다거나 유행은 돌고 돈다는 속설은 늘 존재했지만, 이제 그 주기와 강도가 점차 빨라지고 있다. 유행의 최전선을 달리면서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빈번하게 레트로를 영감의 원천으로 삼은 패션업계는 시즌마다 특정 시대를 즉각 떠올리게 하는 의상을 쇼에 올리고 있다. 2015년 S/S 시즌에는 1970년대가 당당히 주인공을 차지했다. 디스코 댄스장에서 봤을 법한 통 넓은 벨보텀 팬츠, 히피를 연상시키는 팔랑거리는 보헤미안 룩이 대세. 디자이너들은 이런 레트로한 옷에 ‘뉴’, ‘모던’ 등의 수사를 갖다 붙이기 바쁘다. 이 밖에 흔히 명작이라 일컫는 영화의 리마스터링과 감독판을 상영하고, 흥행 영화의 프리퀄·시퀄·리부트(스핀오프)를 한 해 터울로 제작하며, 문학가의 과거 작품을 전집으로 묶거나 디자인을 개정한 보증판을 발행하는 프로젝트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 됐다.
출판사 문학동네는 소설가 황석영이 주제에 맞게 선별한 <한국 명단편 101>을 출간해 반응이 뜨겁다. 아바의 ‘맘마미아’, 김광석의 ‘그 날들’,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 등 특정 가수의 과거 음악으로 구성한 주크박스 뮤지컬도 계속 인기를 끌고 있다. 올 하반기에는 ‘1990년대 문화 대통령’ 서태지의 음악으로 만든 창작 뮤지컬 <페스트>가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음반업계에서는 유물로 여기던 LP가 화려하게 복귀했다. 미국의 음반 판매량 집계기관 ‘닐슨 사운드스캔’의 발표에 따르면 2014년 미국에선 LP 판매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레트로 현상에 대한 전문가의 반응은 극과 극이다. 새로운 것 없이 반복되는 레트로 현상을 문화 퇴행이라 비판하거나, 레트로 자체가 과거의 재해석을 함축한다며 긍정적으로 보는 견해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매년 어김없이 찾아오는 레트로 현상의 근본적 원인을 어떻게 분석하고 있을까? 첫째, 장기화한 경제 불황 때문이다. 대중은 팍팍한 현실에서 편안하고 익숙한 것에 더 매혹된다는 의미다. 여기서 레트로는 좋은 시절에 대한 향수를 상징한다. 둘째, 소비 주체의 변화다. 예를 들어 앞서 언급한 ‘토토가’ 같은 기획의 성공이 대표적이다. 1990년대에 학창 시절을 보내며 당시 대중문화를 즐긴 세대가 성인이 되어 소비 시장의 주인공 역할을 하면서 자신만의 추억을 회상하는 문화를 찾게 됐다는 것. 그 이후 등장한 세대에게 레트로한 것이 새로움의 발원이 되는 기이한 시너지가 발생하기도 했다. 마케팅 측면에서는 하나의 콘텐츠로 얻은 이중 타깃 효과다. 셋째, 군중심리의 일환이다. 유행에 뒤처지지 않고 어렵지 않게 사람들과 소통하고 어울리기 위한 구심점 역할을 과거의 문화가 떠맡게 됐다. 넷째, 디지털 기술의 발달이다. 유튜브나 아이튠즈 같은 프로그램에서 단어 검색만으로 손쉽게 시대를 점프하며 온종일 레트로 바다에서 헤엄칠 수 있다. 또한 과거를 공유하는 방법이 각종 SNS를 통해 간편해졌다. 한편으로는 너무 빠르게 변하는 디지털 기술 때문에 극도의 피로를 느낀 현대인이 옛 아날로그 방식으로 도망가게 됐다는 역설적 의미도 담고 있다. 요즘 출시하는 스마트폰에는 한때 유행한 손글씨체나 방금 찍은 사진을 옛날 사진처럼 변경해주는 다양한 필터가 기본으로 장착돼 있다.
온 가와라, DEC. 29, 1977 “Thursday.” 캔버스에 아크릴 채색, 신문, 20.3×25.4cm, ‘Today’ 연작 1966–2013 Courtesy David Zwirner, New York/London
작년 9월 블룸 앤 포의 LA갤러리에서 열린 단색화 전시 <다방면에서: 추상에서의 단색화> 전경3 하종현, Conjunction 09, 삼베에 유채, 51x60cm, 2009_ 국제갤러리의 아트 바젤 홍콩 출품작
진정한 레트로 마니아를 위하여
레트로 유행은 글로벌한 문화 현상이다. 인터넷을 중심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측면에서 서로 더 욱 긴밀하게 연결됐다. 영미권에서 활동하는 음악 평론가 사이먼 레이널즈는 저서 <레트로 마니아: 과거에 중독된 대중문화>에서 “21세기는 거대한 재탕의 시대였다”고 통렬하게 분석했다. 이 책은 문화 전반에 만연한 레트로의 양상과 전개 과정을 꼼꼼하게 파헤친다. 대중 음악을 필터로 삼았지만 미술, 패션, 드라마, 영화, TV쇼, 뉴미디어 등 모든 문화를 관통한다. “알고 보니 21세기 첫 10년은 미래로 넘어가는 문턱이 아니라 ‘재(re-)’시대였다. 끝없는 재탕과 재발매, 재가공, 재현의 시대이자 끝없는 재조명의 시대.” 그의 말대로라면 가까운 과거에 이토록 집착한 인류사는 없었다. 그는 간절하게 묻는다. 단 한 번도 듣거나 보지 못한 완전히 새로운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일은 이제 더 이상 불가능한 것일까?
물론 ‘재조명의 시대’가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오랫동안 트렌드와 높은 담을 쌓고 지낸 고급문화의 영역에서 레트로는 긍정의 화두다. 특히 ‘단색화 열풍’이 그렇다.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윤진섭 교수의 기획으로 열린 <한국의 단색화>전을 계기로 단색화 재조명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해외에서는 미시간 대학 미술사학과 교수 조앤 기가 <한국의 동시대 미술: 단색화와 방법의 긴급성(Contemporary Korean Art: Tansaekhwa and the Urgency of Method)>이라는 저서를 발표하며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2014년 9월 비엔날레시즌을 맞아 국제갤러리에서 윤진섭 교수가 기획한 <단색화의 예술>전이, 같은 시기 블룸 앤 포(Blum & Poe)의 LA 갤러리에서 조앤 기교수의 기획으로 권영우·정상화·박서보·하종현·이우환·윤형근 등을 초청한 대형 단색화 전시 <다방면에서: 추상에서의 단색화(From all Sides: Tansaekhwa on Abstraction)>가 동시다발로 열리면서 그 열기가 정점에 달했다. 이어 작년 11월에는 파리 페로탱(Perrotin) 갤러리에서 박서보의 개인전이 열렸고, 오는 5월에는 뉴욕에서 그의 전시를 개최한다. PKM갤러리는 4월에 열린 재개관전의 주인공으로 윤형근을 택했다. 5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도 단색화 특별전이 열린다. 단색화 이외에 한국의 아방가르드 미술에 대한 구애의 손길도 잦아지고 있다. 김구림 작가는 테이트에서 열린 기획전 이후 작품 판매를 논의 중이며, 이승택 작가는 작년에 프리즈 아트 페어에서 작품을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5월 16일까지 갤러리EM에서 열리는 빈티지 디자이너이자 아티스트 딜런 류의 개인전에서는 명품 브랜드 샤넬, 에르메스나 프랑스산 아페리티프로 알려진 비르(Byrrh)의 빈티지 잡지 광고와 제품을 활용한 새로운 빈티지 콜라주를 대거 선보인다.
김난도 교수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소비트렌드분석센터에서 발행한 <트렌드 코리아 2015>에선 레트로 현상을 ‘시간을 재해석하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최근의 레트로 현상은 옛것을 그대로 재현한 과거의 방식과는 차이가 있다. 기존의 것을 취하는 대신 현대적 시각으로 새롭게 해석하는 과정을 더한, 진화한 복고라는 것.기업의 입장에서 보유한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레트로 열풍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분석집은 레트로 마케팅이나 기업의 오랜 역사와 자부심을 강조하는 ‘헤리티지(heritage) 마케팅’이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 전망하고 있다. 유명 글로벌 브랜드에서 옛날에 최‘ 첨단’의 이름을 내걸고 출시한 모델을 그대로 복각해 출시하는 전략이 대표적이다. 오늘의 클래식이 어제의 혁신이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다만 이제는 어떤 레트로인가 따져물어야 할 때다. ‘레트로가 열풍이다’라는 문장 자체가 이미 ‘레트로’해졌기 때문이다. 2015! 우리가 숨 쉬며 살아가는 이 숫자는 자동차가 하늘을 날고, 우주의 어느 행성에서 지구 분점을 운행하고, 알약 하나로 식사를 해결하는 상상의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가. 문득 레트로 열풍이 아찔한 고공비행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에디터 김재석 (jskim@noblesse.com)
사진 제공 갤러리EM, 국제갤러리, MoMA, 구겐하임 미술관, 엣나잇 필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