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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스테이지 싱가포르 창립자이자 총괄 디렉터 로렌조 루돌프는 스위스의 수도 베른(Bern)에서 태어났다. 베른은 스위스의 수도지만 문화의 황무지라고 할 만큼 무미건조한 도시다. 단지 미술이 좋아 지역 미술계에서 변변찮게 활동하던 한 젊은이가 오늘날 세계 미술 시장의 판도를 바꾼 로렌조 루돌프가 되기까지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싱가포르의 차이나타운에 위치한 아트 스테이지 싱가포르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쏟아지는 그의 이야기 보따리는 멈출 줄 몰랐고, 그 이야기 속에는 누구나 궁금해하는 현대미술 시장의 역사가 함께했다.
살다 보면 운이 좋은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그것이 운명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한 행운이었는지 확인할 순 없지만, 하필이면 그때 그 자리에 있던 이유로 생각지 못한 인생의 반전을 맛보거나 성공을 거머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아트 스테이지 싱가포르의 로렌조 루돌프(Lorenzo Rudolf)가 바로 그런 경우다. 그를 알고 지낸 시간이 꽤 길지만, 그의 지나간 이야기를 이처럼 길게 들어본 적은 처음이다. 그리고 인터뷰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질문. 왜 그는 그때 그곳에 있었을까? 보수적인 변호사 아버지 아래서 변호사가 되기 위해 법을 공부했지만 결코 변호사가 되고 싶은 적은 없었다는 로렌조 루돌프가 털어놓는 현대미술과 삶 이야기.
당신은 국제 미술계에서 너무나 유명합니다. 아트 바젤을 떠난 지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당신 이름에는 아트 바젤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죠. 현대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에 스위스라는 지역적 특성이 많이 작용했나요? 저는 바젤이 아니라 베른 출신입니다. 어려서부터 미술에 관심이 많았고, 그림을 배워 화가로 활동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저보다 훌륭한 화가가 많다는 것을 알았고, 제 자신이 동네 화가이상으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법대에 갔습니다. 법학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것 말고 달리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어요. 아버지가 변호사였으니까요. 법을 공부했지만 그래도 항상 지역 미술계에 참여하고 있었어요. 아마 그것이 저로 하여금 지금의 일을 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베른의 미술계가 당시 활발한 편이었나요? 변변한 갤러리나 미술관이 없었던 것 같은데요. 맞아요. 쿤스트할레 베른(Kunsthalle Bern)이 유일했습니다. 제가 아직 어릴 때인 1961년, 쿤스트할레가 디렉터를 찾고 있었어요.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지만, 당시 미술계 출신이 아닌 한 남자가 쿤스트할레의 디렉터를 맡게 돼요. ‘하고 싶다니 한번 기회를 줘보자’는 심산이었겠지요. 그가 디렉터가 되고 6년 후 쿤스트할레 건물은 대지 미술가 장 클로드와 크리스토(Jeanne-Claude and Christo)가 포장한 최초의 건물이 됩니다. 베른 사람들은 “아, 이게 예술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됐죠. 그리고 다음 해
베른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몰랐어요. 모든 것이 역사 책에 나오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그때 베른에 계셨군요. 제 역사에 운좋게 존재한 시간이죠. 아무튼 전 베른에 있었고 해럴드 지먼과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면서 현대미술에 점점 매료됐어요. 예술이 벽에서 떨어져 나오고 좌대에서 내려진 느낌이랄까요. 모든 것이 예술로 가능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 확신이 들었습니다.
아트 바젤 디렉터는 어떻게 맡게 됐나요? 1990년 당시 아트 바젤은 트레이드 쇼 정도의 규모였는데, 마침 새 디렉터를 찾고 있었습니다. 아트 바젤뿐 아니라 몇 안 되는 국제 아트 페어가 거의 수익성 없는 사업을 하고 있었죠. 품목은 미술품이지만 세탁기나 다를 바 없는 트레이드 쇼 수준이었습니다. 베른에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어 보였어요. 그래서 바젤에 가서 페어 디렉터를 맡았죠.
지원 공모를 하셨나요? 네, 페어의 내부 세계가 궁금했거든요. 5~6회의 인터뷰를 통과한 뒤 1991년 1월 1일부터 아트 바젤의 2대 디렉터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마침 전 세계 미술 시장은 큰 위기를 겪고 있었는데, 오히려 제게는 큰 기회가 되었어요. 더 나빠질 수도 없었기에 어떻게든 나아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거든요.
당시에는 아트 페어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잖아요. 아트 바젤이 여느 국제 아트 페어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처음 생긴 것이 독일 쾰른 아트 페어고, 두 번째가 아트 바젤, 다음이 파리 피악, 미국의 시카고 아트 페어, 그리고 마드리드에서 열리는 아르코 정도가 있었어요. 이 모든 페어가 유사한 형태의 단순한 방식으로 운영되었고, 비즈니스로 치면 수익성이 없었죠. 제가 아트 바젤의 디렉터가 된 후에도 올해 참여한 갤러리가 다음 해에는 빠지고 또 지난해에 빠졌던 갤러리가 올해 들어오면서 들쑥날쑥했어요. 하지만 2000년 이후로는 매년 전 세계 800개 이상의 갤러리들이 대기 명단에 등록하게 됐죠. 아트 바젤이 기존의 아트 페어 개념을 완전히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아트 바젤을 성공시키기까지 불과 10년 걸린 셈이군요. 어떤 방법을 썼나요? 전통적 측면에서 트레이드 쇼는 사이즈별로 부스를 파는 단순한 비즈니스입니다. 그러나 미술품은 성격이 매우 달라요. 가령 세탁기나 기계를 소개하는 트레이드 쇼에는 관련 업계 종사자나 고객은 새로운 기술과 정보를 발 빠르게 얻기 위해 트레이드 쇼에 가서 꼭 봐야 하지요. 아트 페어는 그렇지 않아요. 아트 바젤의 고객은 갤러리지만 우리는 고객의 폭을 확대해 컬렉터까지 아트 페어로 끌어들였습니다. 그러기 위해 VIP 서비스와 프로그램을 만들어냈죠.
VIP 프로그램 외에 다른 노하우는 없었나요? 아까 말했듯이 당시는 세계적으로 경제 위기가 닥친 시기라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어요. 그런 시기에 누군가 큰 변화를 만든다면 위험성이 큰 만큼 성공 가능성도 컸겠지요? 도박하는 마음으로 아트 바젤을 최고급 미술 시장으로 키우는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아트 바젤에 참여하는 갤러리들은 마치 메달을 딴 듯이 자랑스러워해야 한다”라는 것이었죠. 그 변화의 첫 시도가 갤러리 선정 과정의 설립입니다. 어떤 갤러리도 예외 없이 엄격한 선정 과정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아무리 최고 화랑이라도 선정 과정을 피할 수 없었어요.
갤러리 선정 과정과 관련해 에피소드도 많을 것 같아요. 아트 바젤에는 대부분 유럽의 갤러리들이 참여했어요. 미국의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런데 래리 가고시안(Larry Gagosian)이 페어에 참가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우리에게는 좋은 소식이었지만 분명히 말했습니다. 참가 신청서를 제출하라고요. 가고시안은 자신의 이름과 명성을 믿고 신청 마감 즈음 전화해서 특별한 조건을 요구했죠. 하지만 우리는 “이미 자리가 다 차서 없다”고 알렸어요. 결국 가고시안은 다음 해에 참가 신청서를 내고 페어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이야기네요. 아트 페어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자금이 필요할 것 같은데, 이 부분은 어떻게 진행했나요? 그래서 우리는 아트 바젤에 스폰서 제도를 들여왔습니다. 페어 개최와 관련한 비용이 계속 상승했고, 인건비도 올랐거든요. VIP 프로그램에도 많은 비용이 들었고요. 하지만 상승한 이 모든 비용을 갤러리들에게만 부담시킬 수 없었습니다. 비용이 높아지면 젊고 신선한 갤러리들이 참여할 수 없게 되니까요. 그래서 최초로 아트 페어에 스폰서가 등장하게 됩니다. 갤러리들이 그랬죠. “미술 행사에 이런 스폰서를 들여오는 게 말이 되느냐”고요. 하지만 1년 반 정도 논의 끝에 UBS의 전신인 스위스 은행 연합(Swiss Bank Corporation)이 스폰서로 결정됐죠.
2002년 아트 바젤은 마이애미에 행사를 하나 더 만들었죠. 아트 바젤이 마이애미로 가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요? 아트 바젤은 점차 문화 행사를 넘어 사교적인 행사로 바뀌고 있었어요. 그와 동시에 우리는 10년 전과 달리 국제사회가 급변하고 글로벌화되면서 점차 미술 시장이 뉴욕으로 옮겨가고 있는 것을 감지했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미국에 페어를 하나 더 열어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트 바젤이 가만히 있으면 미국의 페어들이 독보적으로 성장하고 아트 바젤은 자연히 도태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논리적으로 보면 뉴욕으로 가야 했어요. 그런데 실제 뉴욕은 1년 365일 페어가 열리는 아트 시티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트 바젤까지 굳이 그곳에 갈 이유가 없었어요.
2002년에 열린 제1회 마이애미 바젤 페어를 저도 기억합니다. 준비 과정이 궁금해요. 스위스에서 열리는 아트 바젤에 대응할 규모나 수준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트 바젤의 복사판이거나 비슷해서도 안 됐죠. 아트 바젤과 시기적으로 가장 멀리 두려고 하다보니 12월이라는 계산이 나왔어요.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미술 행사에 와서 디너 파티 같은 사교 모임을 즐기고 싶어 했죠. 그때 누군가 마이애미 비치를 말해줬어요. 우선 조사를 위해 마이애미로 갔습니다. 당시 마이애미는 정말 이상한 도시였어요. 여기저기 노인들이 돌아다니고 무너지거나 버려진 건물이 많았지만 보행자 문화가 가장 발달한 도시 중 하나였죠. 그곳의 문화를 서서히 싹 틔우기 시작한 중심에 동성애자들이 있었고, 도시 전체가 조금씩 활기를 띠자 부동산 회사들 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남아메리카 대륙을 대상으로 하는 MTV 방송국이 지점을 냈고, 투자가들이 들어와 쓰러져가는 오랜 건물을 ‘Delano’ 같은 시크한 호텔로 바꾸어놓았죠. 호텔 비즈니스의 거부 루벨 부부도 마이애미로 이주했고요. 본격적으로 마이애미로 돈이 들어오기 시작한 거예요.
그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났나요? 그때 또 마침 그곳에 계신 거네요? 네, 이 모든 일이 한꺼번에 벌어졌어요. 주변에선 다들 반대했습니다.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문화 지도에서 완전 지워진 마이애미에 가겠다고 했으니까요. 당시 24%의 미국 부자들이 겨울 동안 한 달 또는 두달 정도 휴가를 간다는 통계가 있었습니다. 마이애미는 12월에도 여름을 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동부의 부자들이 주로 휴가를 보내는 곳이었죠. 그리고 재미난 점은 동부 사람들을 서부로 불러 모으는 것은 어렵지만 서부 사람들을 동부로 모으는 것은 비교적 쉬웠어요. 만약 LA에서 아트 페어를 한다면 뉴욕의 반 이상은 오지 않는다는 의미죠. 마지막으로 새로운 부를 축적한 남아메리카 대륙이 가까이 있었어요. 그때가 2000년인데 갑자기 프랑크푸르트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저는 새로운 모험을 위해 아트 바젤을 떠나기로 결정했죠.
그러면 아트 바젤 마이애미 개최를 못 보고 그만두신 건가요? 프랑크푸르트는 어떻게 가게 됐나요? 프랑크푸르트 북 페어는 여느 아트 페어보다 국제적이죠. 정말 다양한 국가의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입니다. 책의 종류도 다양하고요. 10년간 바젤에 있었는데 ‘그래, 어쩌면 또 다른 경험이겠다’ 싶어서 프랑크푸르트로 가게 되었어요. 아직 마이애미 오픈 준비에 여념이 없었지만 한 번은 어떤 모험을 하고 싶었죠. 그래서 2000년에 바젤을 떠났습니다. 프랑크푸르트로 가기위해 당시 제 어시스턴트 디렉터였던 사무엘 켈러를 그 자리에 앉혔는 데, 마이애미의 대성공으로 일약 스타가 됐죠.
프랑크푸르트에서의 생활은 어땠나요? 프랑크푸르트 북 페어에서 3년을 있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건 결국 제 마음은 미술에 있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그곳을 떠나 다시 마이애미로 가서 3년을 살았습니다. 미국에서 제게 명예 영주권을 주더군요.(웃음)
그리고 다음이 아시아였나요? 아시아에서 활동한 지 이미 꽤 오래된 것으로 압니다. 마이애미에 있는데 바젤에서 오랫동안 갤러리를 운영해온 친구가 연락했어요. 그 친구의 제안으로 중국에서 큰 전시를 기획하게 됐는데, 그게 2007년 상하이 컨템퍼러리입니다. 아마 아시아에서는 최초의 국제 아트 페어였을 거예요. 중국 현대미술 시장이 폭발하는 시점이기도 했고요. 그때 우리는 페어 회사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볼로냐에 있는 이탈리아 페어 회사와 협약을 맺게 됐죠.
저도 이탈리아 사람들이 중국에서 아트 페어를 조직한다 해서 궁금했습니다. 그렇죠? 그런데 그게 바로 문제였습니다.(웃음) 우리와 페어 회사가 너무 다른 입장과 시각을 갖고 있음을 알고 2년 만에 헤어졌어요. 예를 들어, 우리는 상하이 컨템퍼러리를 홍콩에 하나 더 열고자 했어요. 상하이에서는 현대미술에, 홍콩에서는 근대미술에 초점을 맞추는 컨셉도 이미 만들었고요. 그래서 페어 회사에 홍콩 컨벤션 센터를 예약하고 사용비를 조정하라고 했는데, 페어 회사의 늑장 대응으로 홍콩 컨벤션 센터 전체가 이미 다른 곳에 대여됐더라고요. 당시 그들은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홍콩은 경매 회사의 힘 때문에 페어가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핑계만 댔습니다. 이후 아주 작은 영국 페어 회사가 홍콩 컨벤션 센터를 예약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것이 바로 아트 홍콩의 시작이죠. 그리고 상하이 컨템퍼러리에 참여한 갤러리들이 모두 홍콩으로 옮겨갔어요. 홍콩이 대박을 터트린 셈이죠.
그럼 그 후 싱가포르에 아트 스테이지가 등장한 거군요. 어디로 갈지 고민하던 때였지요. 아시아 미술 시장에 대한 정보와 지식을 얻은 터라 다른 곳으로 가고 싶지 않았어요. 아시아에는 물론 지역 전문가들이 수없이 많아요. 중국 전문가, 한국 전문가, 일본 전문가 등. 하지만 이 모두를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이것이 제 장점이기도 했습니다. 2년 넘게 아시아에서 지내면서 각국의 미술계와 교류하는 가운데 기본적인 식견을 갖추게 되었거든요. 그리고 제가 2000년 바젤을 떠난 그날부터 매년 제게 일을 제안한 곳이 싱가포르였어요. 제가 기획하는 페어에는 항상 싱가포르 정부를 대표하는 그룹이 찾아오곤 했죠.
싱가포르 정부가 아트 스테이지를 후원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준비 작업이 상당히 오래 걸린 셈이네요. 싱가포르 정부 대표들은 아트 바젤이 경제적으로 지역에 도움을 준다는 것을 목격했어요. 하지만 싱가포르가 서두르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봤죠. 2008년 즈음 싱가포르를 둘러보고 새로운 아트 페어를 기획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때까지는 항상 다른 회사를 위해 일했지만 싱가포르에서는 자유롭게 일하고 싶어 직접 회사를 설립했어요. 그리고 2009년에 싱가포르로 이사했고, 거의 빈손으로 시작했어요. 현 싱가포르 경제개발청장인 베스완진(Behswangin) 박사가 당시 저와 사업에 관련한 모든 논의를 담당했는데, 현대미술에 대한 그의 열정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뉴욕을 방문해 모든 갤러리를 돌아볼 뿐 아니라 각지의 아트 페어를 돌아다녔죠. 그때가 싱가포르 현대미술 허브인 길먼 배럭(Gillman Barracks)이라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온 시점이에요.
역시나 선견지명이 있으셨네요. 때를 기다린 듯 싱가포르의 중요한 시점에 합류한 거니까요. 아트 스테이지를 만들기 위해 우린 처음부터 새로이 준비하고 시작해야 했어요. 장소를 물색하는데 마리나베이 샌즈는 아직 완성하기 전이었죠. 어떤 모양이 나올지 아무도 몰랐어요. 샌즈 쪽에서는 이미지를 위해 이러한 미술 행사를 선호했어요. 그다음에 싱가포르는 물론 동남아시아 지역 미술에 대한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죠. 전문가들은 넘쳐나지만 누구 하나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었어요. 여기까지가 제가 베른에서 싱가포르까지 오게 된 여정입니다.
어떻게 그 모든 비전과 선견지명을 갖게 되었나요? 항상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곳에 있을 수 있었던 비책이라도 있나요? 눈을 떠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미술계를 선진화된 구조, 미래를 예견하는 앞선 산업으로 이해하지만 사실은 가장 보수적이고 시대에 뒤처진 산업이 미술 시장입니다. 비즈니스라면 누구나 비전과 전략을 준비해야 해요. 사업의 방향을 결정하는 경험과 식견이 요구되거든요. 미술 시장 역시 글로벌리즘으로 인해 결국 서구의 미술 시장이 아시아를 침식하게 될 게 뻔한데, 그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앞으로 미술 시장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까요? 글로벌리즘은 미술시장 판도를 바꾸어놓았고, 결국 아트 페어가 성장하는 바탕이 되었어요. 대부분의 큰 플레이어들은 이제 더 이상 여행을 하지 않아요. 이곳저곳 갤러리를 돌아보는 게 아니죠. 그래서 한꺼번에 모아놓은 아트 페어나 비엔날레가 더 인기 있는 거예요. 그래서 대부분의 갤러리들이 아트 페어를 통해 생존을 합니다. 수입의 80%가 페어를 통해 만들어지니까요. 그것은 결국 끊임없이 아트 페어를 다니며 여행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거대한 전시 공간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들죠.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해요. 뉴욕의 페이스 갤러리처럼 전시 공간을 옮겨 다니는 거예요. 자기 공간이 없어도 시장은 있으니까요. 전시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유연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직도 갤러리는 너무나 전통적이에요.
바꾸기 쉬웠다면 바뀌었겠죠? 그래서 도전해야 해요. 잘 계산해보면 나오죠. 홍콩 같은 경우예요. 홍콩은 갤러리 공간이 매우 작아요. 그런데 마켓이 활발합니다. 전통적인 시스템이 아니에요. 예전에는 미술사가나 갤러리들이 미술을 설명하는 중심이었지만 지금은 아티스트가 중심이에요. 신문에 파워풀한 아티스트의 이름이 거론되었다고 생각해보세요. 결국 플레이어들은 이러한 현상을 따라가야죠. 적응해야 합니다.
미래에도 아트 페어가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으로 보나요? 마켓은 성장할 거예요. 자본이 커지면서 미술품 수요는 더 많아질 테니까요. 오늘날에는 비평가나 갤러리보다 컬렉터와 작가들이 시장을 움직입니다. 새로운 부를 축적한 새로운 플레이어들이 계속 들어오고, 과거와 달리 미술품은 필수 투자 종목이 되었지요. 문화를 산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는데, 이제 문화를 돈으로 살 수 있게 된 거죠. 아트 페어나 경매 회사, 갤러리, 비엔날레 모두 예외 없이 이 새로운 움직임을 지켜보고 적절한 전략을 세워야 합니다.
싱가포르에 정착한 지 6~7년이 되어가네요. 어떠세요? 여러 도시에서 살아보셨으니 싱가포르만의 특성이 있겠죠? 네, 재미난 곳이에요. 아직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지만 매우 흥미로워요. 이곳 사람들과 일할 때 우리 모두는 하나의 목적지를 결정하고 시작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싱가포르 사람들은 절대 그 길로 가지 않아요. 여기저기로 움직이고 길을 잃은 듯 비효율적이거나 이해되지 않는 일이 자주 벌어집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정해놓은 길로 가지 않아도 결국에는 정해놓은 목적지를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비효율적으로 보여도 결국은 계획한 대로 목표를 이루고 말죠. 이런 것들이 싱가포르에서 느낀매우 독특한 점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싱가포르에 많은 기회가 있다고 말해요. 아직 젊은 국가이기에 유럽에 비해 발전할 요소들이 분명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기본 생활비와 운영 비용이 너무 높아 수익률이 낮아요. 그래서 소규모 창업을 하고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는 이미 희박해졌다고 봅니다. 오히려 이미 부를 얻은 사람들이 성장할 가능성이 더 많아요.
부인과 아들이 모두 회사 직원으로 함께 일하고 있는데, 다른 아트 페어에 비하면 흔치 않은 일이지요. 가족과 함께 일하는 것은 어떤가요? 패밀리 비즈니스 처음 보셨어요?(웃음) 갤러리는 거의 대부분 패밀리 비즈니스죠. 아트 페어는 다르지만 저는 가족과 일하는 것이 좋아요. 물론 가족 구성원과 직원이라는 입장 사이에서 중심을 잘 잡아야 해요. 지금 하는 결정이 가족을 위한 것인지, 비즈니스를 위한 것인지 객관적으로 판단해야 하고요. 가족과 같은 일을 하고 많은 시간을 보내는 건 즐거운 일입니다. 다만 집에서도 우리는 일 얘기를 해요. 결국 24시간 일하는 느낌이죠.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일을 떠나 머리를 식히나요? 제 고향 유럽으로 자주 여행을 갑니다. 제가 성장한 곳이라 그곳에 가면 마음이 편안해져요. 한동안 일도 안 하고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며 시간을 함께하면 일의 스트레스나 부담은 사라지게 됩니다.
앞으로 싱가포르에 얼마나 머물 예정인가요? 모르겠어요. 은퇴 후에 는 아마 유럽으로 돌아가지 않을까요? 제 고향이니까요. 하지만 그전에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어요.
2015 아트 스테이지 싱가포르를 위해 ARNDT 갤러리에서 선보일 스페인 작가 델 케스린 바튼의 ‘All Ways’, Del Kathryn Barton, All Ways, 163x200cm,
Synthetic polymer paint, bouache, watercolour and ink on polyester canvas, 2010
조안나 바스콘셀로스의 작품 ‘Tetris 17th Century’,
Joana Vasconcelos, Tetris 17th Century, 378cmx336cmx308cm, Viuva lamego hand painted tiles, handmade woolen crochet, fabrics, ornaments, polyester, MDF, iron, 2012,
Image courtesy of Pearl Lam Galleries
인도 작가 파레쉬 메이티의 작품 ‘Mystic Abode: An Installation of Bells’는 공공미술섹션에 소개될 예정이다.
Paresh Maity, Mystic Abode:An Installation of Bells, Brass bell, steal bar and metallic paint, 368cm (H)x445cm(L)x262cm(W), 2014,
Image courtesy of Linda Gallery
뉴욕 첼시에 있는 인도계 갤러리 선다람 타고르는 김준 작가의 ‘Romanee Conti’를 들고 나올 예정이다.
Kim Joon, Romanee Conti, 2011,
Image Courtesy of Sundaram Tagore Gallery
동남아시아 플랫폼에 소개될 호앙 두옹 캠의 ‘Volodya 1886-2011’,
Hoang Duong Cam, Volodya 1886-2011, 120cx103cm, Digital C-print, 2012,
Image courtesy of the Artist and Galerie Quynh,
Presented by Galerie Quynh
Image courtesy of the Artist
야손 바날의 ‘Artworld XXX Trailer’,
Yason Banal, Artworld XXX Trailer(still), HD Video, 3 mins, 2014
2015 아트 스테이지 싱가포르에 선보일 페르난도 보테로의‘Standing Woman’,
Fernando Botero, Standing Woman, 350cm(H), Bronze, 2006,
Image courtesy of International Art
“오늘날에는 비평가나 갤러리보다 컬렉터와 작가들이 시장을 움직입니다.
새로운 부를 축적한 새로운 플레이어들이 계속 들어오고, 과거와 달리 미술품은 필수 투자 종목이 되었지요.
아트 페어나 경매 회사, 갤러리, 비엔날레 모두 예외 없이 이 새로운 움직임을 지켜보고 적절한 전략을 세워야 합니다.”
에디터 김이신 (christmas@noblesse.com)
글 김정연(Space Cottonseed Singapore 대표) 사진 Aldrick T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