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에베의 시선을 사로잡은 도예가 이인진
로에베와 도예가 이인진이 빚어낸 동시대적 공예의 아름다움.

이인진 작가.
사람의 손끝에서 탄생하는 공예는 가장 친밀한 창작의 영역이다. 정형화된 화이트 큐브에 걸린 어려운 작품이 아니라 일상에서 마주하는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예술과 공예의 경계가 허물어진 오늘날에도 공예의 본질은 여전히 큰 힘을 발휘한다. 전 세계 공예가들이 가장 주목하는 글로벌 행사 로에베 재단 공예상은 바로 이러한 본질을 기리는 프로젝트다. 1846년 스페인의 작은 가죽 공방에서 출발한 로에베에 공예는 정체성을 규정하는 뿌리이자 존재의 근원이다. 단순히 세계적 작가의 작품을 선보이는 것이 아닌, 공예의 현재와 미래를 증명하는 무대인 셈이다. 이러한 신념은 지난 9월 서울에서 열린 특별 전시로 이어졌다. 서울 전역이 예술로 물든 기간 로에베는 프리즈 서울 2025 공식 프로그램으로 현대 도예가 이인진 작가의 전시 〈Collecting & Piling: 집적〉을 개최했다. 까사 로에베 서울에서 9월 4일부터 14일까지 이어진 전시에서는 작가가 직접 큐레이션한 작품 20여 점을 선보이며, 2023 로에베 재단 공예상 최종 후보로 선정된 그의 예술적 비전을 조명했다. 이인진 작가는 어린 시절 미국에서 물레 성형을 배우며 주전자와 그릇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후 한국에 돌아와 동아시아 전통 도예 기술을 깊이 연구하며, 40년 이상 장작 가마 소성법을 탐구했다. 그의 손을 거친 오브제는 흙과 불이 만들어내는 예기치 않은 흔적과 정교한 기술이 어우러진다. 항아리, 접시, 그릇 등은 단순한 기능을 넘어 장작불이 남긴 자연스러운 변화를 담아내며, 삶과 창작이 맞닿은 지점을 보여준다. 전시에서는 도자 작품을 탑처럼 쌓거나 철제와 유리 공간에 재배치한 설치가 돋보였다. 서로 다른 재료와 형태가 만나 긴장과 조화를 이루는 방식은 관람객에게 공예의 생명력과 현대적 감각을 동시에 전달했다. 로에베의 정신과 이인진 작가의 오랜 탐구는 손끝에서 시작된 노동과 창작,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발견한 아름다움이 단순한 관람이 아니라 삶 속 경험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는 장인정신의 깊이와 동시대적 재해석의 가능성을 함께 느낄 수 있는 뜻깊은 자리였다.

Interview with Inchin Lee(Ceramic Artist)
흙과 불,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과정 속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며 스스로의 세계를 확장하는 이인진 작가와 만나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
작품의 원천이 되는 일상적 장면은 평범해 보이지만 본인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듯하다. 늘 자연을 가까이하고 싶었다. 흙장난을 어떻게 하면 더 재밌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보니 결국 흙 자체의 다양성을 관찰하게 되었다. 장작 가마 속 열과 불의 상호작용을 살피고, 기존 유약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감각을 찾는 것이 목표다.
작가 노트에서 “흙을 만지며 살 수 있는 인생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매일 흙과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느끼는 매력은 무엇인가? 매일 아침 눈뜨자마자 작업장으로 향한다. 작업실에 가는 이유는 단 하나다. 흙과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느끼는 감각과 냄새가 내게 편안함을 주기 때문이다. 흙을 만지며 작업할 때 느끼는 감정은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느낌과 비슷하다. 이것이 바로 나의 일상이자 매일 반복되는 즐거움이다.
이번 전시 작품은 탑처럼 쌓이거나 집합적으로 배열되었다. 이러한 ‘쌓기’ 행위는 도예의 본질과 어떤 지점에서 맞닿아 있나? 오랜 시간 축적과 반복을 작업의 중심으로 삼아왔다. 쌓는 행위는 단순한 형태 실험을 넘어 흙과 불이 만들어내는 우연한 변화, 그리고 반복적 노동 속에서 발견되는 조화와 맞닿아 있다. 형태를 반복해 쌓는 과정에서 흙의 물성, 장작 가마 속 열과 화학적 반응, 공간 속 무게와 균형감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겉보기엔 거대한 오브제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순하고 소박한 일상 속 예술의 의미를 강조하는 도예의 본질을 확인할 수 있다.
장작 가마라는 극한의 환경과 긴 노동의 축적은 늘 예측 불가한 결과를 만들어낸다.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그 과정에서 얻는 기쁨은 무엇인가? 올해로 흙을 만진 지 49년째다. 가마 작업 경험도 오래되었다. 가마 속 요변은 예상과 달라질 때가 많지만, 꼭 계획대로 나오지 않아도 괜찮다. 자연과 함께하는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우연과 다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단순한 도자기 제작을 넘어 자연과의 협업, 반복적 실험의 연속이다. 그렇기에 모든 과정은 예측할 수 없는 기쁨이자 흥분되는 순간이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가장 도전적인 순간은? 기존 갤러리 전시는 정해진 공간에서 작품을 그대로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공간의 제약 속에서 작품을 실제로 배치하고, 조정하며, 과정 자체를 즐기는 점이 색다른 경험이었다. 로에베팀과 협업하며 까사 로에베의 여러 층에 걸쳐 작품이 놓이는 구조를 고려해 욕심내지 않고 매장 내 제품과 작품 간 상호작용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도록 구성하는 것도 큰 도전이었다.
로에베의 철학과 본인의 작품 세계가 만나는 교차점은 어디라고 생각하나? 로에베는 장인정신과 창조성을 바탕으로 공예의 본질을 존중하며, 현재와 미래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브랜드다. 나 역시 단순히 전통을 잇기보다는 우리 선조가 남긴 아름다운 유산을 동시대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작업은 전통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손끝에서 시작된 창작을 삶 속 경험으로 확장한다는 지점에서 교차한다. 전 세계가 한국 도예의 가치를 인정하는 지금, 내가 쌓아온 시간과 노력을 후배들에게 전할 수 있어 뜻깊게 생각한다.
에디터 한지혜(hjh@noblesse.com)
사진 로에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