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시대의 도시와 예술
피렌체의 신도시에서 돔 양식의 새로운 건축물과 고대 그리스풍 조각 작품을 보고 자란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이들은 선배 작가들이 연구한 원근법을 배우고 발전시켰고, 예술가의 공방을 통해 어린 나이에 재능을 찾았다. 역사상 처음으로 직업 예술가로서 그리고 존경받는 사회적 리더로서 삶을 펼친 세 천재의 삶과 이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당시 이탈리아 주요 도시의 사정을 알아본다.
르네상스 시대 세 거장의 예술과 건축, 작품들이 혼재돼 있는 로마시와 바티칸 시티(중앙). 르네상스 미술과 바티칸 시티의 교황들은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다.

바티칸 시티의 시스틴 성당 천장에 그려진 세계 최대의 벽화 ‘천지창조’. 미켈란젤로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4년 만에 이 작품을 완성했다.

레오나르도는 1482년 밀라노 대공의 후원을 받아 피렌체에서 밀라노로 이주한다. 그리고 그는 이곳에서 희대의 명작 ‘최후의 만찬’을 완성한다.

르네상스 세 거장은 피렌체의 신도시에서 14세기 선배 작가들이 연구한 원근법과 그리스풍 조각 작품을 보고 자랐다. 피렌체가 없다면 르네상스도 없다.

피렌체가 르네상스 건축과 조각의 정수라면, 로마는 르네상스 회화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곳. 르네상스 시대의 세 거장을 비롯해 브라만테, 베르니니 등의 작품이 전부 로마에 있다.
피렌체, 르네상스를 꽃피우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에서 성장하며 아르노 강을 중심으로 곳곳에 펼쳐진 건축과 조각을 통해 초기 르네상스의 새로운 과학기술과 예술의 무한한 가능성을 체감했다. 라파엘로도 1504년부터 1518년까지 20대의 혈기왕성한 시기를 피렌체에서 보내며, 문화 예술적 분위기는 물론 당대의 거장 레오나르도의 예술 세계까지 배우며 성장할 수 있었다. 피렌체를 르네상스의 구심점이자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세 거장을 키워낸 도시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는 이유다. 또한 피렌체는 근대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도 큰 영감을 받은 곳이라고 회고했으며, 1982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 등 과거의 영광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예술을 잉태하는 근원지로 자리 잡았다. 현재 피렌체 시청사로 사용하고 있는 팔라초 베키오는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가 세기의 대결을 벌일 뻔한 장소이기도 하다. 1503년 마키아벨리가 대회의실을 장식할 벽화로 레오나르도에게 ‘앙기아리 전투’를, 미켈란젤로에게는 맞은편 벽에 ‘카시나 전투’를 그려달라고 주문한 것. 하지만 둘 다 끝내 완성하지 못했고, 서로 작업 시기까지 달라 둘이 한자리에서 함께한 적은 없다. 게다가 레오나르도의 벽화는 전부 소멸해 오늘날 그 자리엔 훗날 베키오 궁을 수리한 바사리의 그림만 남아 있다. 레오나르도의 작품은 스케치로만 확인될 뿐. 어쩌면 이 둘이 한자리에서 만나지 않은 건 다행일지도 모른다. 나이 차가 스무 살이나 나서 서로 경쟁할 관계가 아니었음에도 괴팍한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르도를 인정하거나 존경하지 않았고, 관대하고 게다가 예술뿐 아니라 연구와 정치 활동으로도 바쁜 레오나르도는 어린 미켈란젤로의 평가 따윈 신경 쓸 겨를도 없는, 서로 매우 소원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피렌체는 세 거장 중 미켈란젤로의 흔적을 가장 많이 찾아볼 수 있는 곳이다. 미켈란젤로는 어린 시절 ‘위대한 로렌초’라 불린 로렌초 데 메디치가 세운 학교에 다녔고, 그의 집에 기거하며 월급을 받았다. 하지만 1492년 로렌초가 사망해 더는 메디치 가문의 비호를 받을 수 없게 된 미켈란젤로는 18세에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간다. 로렌초의 장남 피에로(1472~1503년)는 정권을 물려받았지만, 프랑스의 침공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결국 피렌체에서 추방당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메디치 가문을 비판하며 그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종교 지도자 사보나롤라는 한때 피렌체 시민의 우상으로 떠오르기도 했지만, 지나치게 윤리적인 삶을 강요하다 도리어 1498년 시뇨리아 광장에서 화형을 당하고 만다. 이 모든 사건이 막을 내린 후, 피렌체로 돌아온 젊은 미켈란젤로가 만든 첫 작품이 바로 ‘다비드상’. 메디치 가문의 후원으로 성장한 미켈란젤로가 외세의 침입, 그리고 메디치 가문의 독재로부터 벗어나 공화정을 수립한 피렌체 시민의 승리를 기념하는 작품을 만들었다는 건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도나텔로가 만든 작품을 비롯해 대부분의 기존 다비드상이 승리를 거둔 후 골리앗의 머리 위에 발을 올려놓은 모습을 그린 데 반해,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막 돌을 던지려고 하는 찰나 의지에 찬 청년의 모습을 표현해 호평을 받았다. 또한 아래에서 올려다볼 것을 고려해 일부러 머리와 손을 크게 제작함으로써 보는 이들을 위한 시각적 원근감까지 염두에 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본래 대성당 동쪽에 세울 계획이었으나 시청사 팔라초 베키오 앞에 자리했다가 곧 시뇨리아 광장으로 옮겼다. 메디치 가문을 비판한 사보나롤라 수사가 화형을 당한 바로 그 자리. 1873년 작품을 아카데미아 미술관으로 옮기며, 광장의 빈자리엔 1910년에 만든 복제본을 세워 관광객을 맞게 했다. 한편 로렌초의 차남으로 미켈란젤로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조반니(Giovanni de Lorenzo de’ Medici, 1475~1521년)가 로마 바티칸의 교황 레오 10세(Leo X, 재위 1513~1521년)로 즉위하며, 미켈란젤로는 다시금 메디치 가문의 선조를 모신 산 로렌초 성당을 장식할 조각을 주문받게 된다. 완성한 작품엔 어린 시절 미켈란젤로를 후원한 위대한 로렌초의 모습은 물론, 동생 줄리아노의 조각도 포함돼 있다. 우리에게 그 모습이 익숙하다면 미대 입시에 자주 등장한 석고상 ‘줄리앙’의 원본이 바로 이 미켈란젤로의 조각품이기 때문이다. 줄리아노는 형 로렌초와 함께 대성당에서 기도를 올리다 메디치 가문을 시기한 다른 가문의 피격으로 온몸에 칼을 맞고 사망한 안타까운 사연의 주인공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로렌초는 단순한 상인이 아니라 정치권력을 손에 쥔 사회 지도층으로 부상해야 한다는 야심을 품게 된다. 그리고 오랜 세월 공들인 끝에 한때 로마 교황청의 명을 받아야 한 메디치 가문을 교황을 배출한 집안으로 성장시켰다. 형제가 피살당하는 시련을 겪고 마침내 교황을 배출하며 정권을 잡게 된 메디치가의 후손들이 조상의 묘를 정비하며 가문을 화려하게 부활시키는, 한 가문과 도시의 흥망성쇠에 미켈란젤로라는 훌륭한 예술가가 함께한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3대 조각 작품 중 하나인 ‘피에타’. 피에타란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으로, 성모 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나 조각상을 말한다.

르네상스가 꽃을 피운 역사의 도시이자 예술의 도시 피렌체. 이탈리아어로 피렌체는 ‘봄처럼 화사한’, ‘꽃의 도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시스틴 성당의 내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보티첼리 등 위대한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이 그린 프레스코 벽화가 구석구석에 그려져 있다.
로마, 세기의 경쟁
피렌체가 르네상스 건축과 조각의 정수를 볼 수 있는 곳이라면 로마는 르네상스 회화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그림이 나란히 자리한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 있기 때문이다. 1505년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자신의 사후 무덤을 장식할 40여 점의 조각품을 5년 만에 완성해줄 것을 주문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계속해서 중단된다. 미켈란젤로의 야심이 대단해 시간이 오래 걸린 탓도 있지만, 교황이 대금을 제때 지급하지 않은 데다 건축가 브라만테(Donato Bramante, 1444~1514년)와 라파엘로를 중심으로 한 또 다른 프로젝트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연로한 건축가 브라만테는 선배들을 존경할 줄 모르는 미켈란젤로를 미워했고, 그에게 망신을 주기 위해 시스틴 성당의 천장화를 그리는 작업에 추천한다. 미켈란젤로가 조각가이기 때문에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것. 한편 미켈란젤로가 일에 착수하자마자, 그림을 잘 그리기로 유명한 라파엘로를 불러들여 바로 옆의 벽화를 맡긴다. 라파엘로의 성공과 미켈란젤로의 몰락을 통해 코를 납작하게 눌러줄 계획이었던 것. 하지만 집념의 사나이 미켈란젤로는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1508년부터 1512년까지 단 4년 만에 작품을 완성한다. 높은 천장에 올라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지지대를 만들어달라는 미켈란젤로의 부탁에 브라만테는 엉터리 지지대를 만들어주는데, 미켈란젤로는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 비계를 만들어 길이만 40m, 가로 폭이 13m에 달하는 거대한 천장에 매달려 12명을 그려달라는 애초의 부탁이 무색하게 300명이 넘는 사람이 등장하는 대작을 완성했다. 브라만테는 몰래 라파엘로에게 미켈란젤로의 작업 과정을 보여주었고, 라파엘로는 도리어 이를 계기로 미켈란젤로의 해부학적 인체 표현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미켈란젤로는 훗날 이때를 회고하며 자신을 파멸시키기 위해 브라만테와 라파엘로가 일을 꾸몄고, 라파엘로가 미술에서 이룬 건 모두 자신에게 배운 것이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이렇듯 괴팍하고 불친절한 미켈란젤로와 온화하고 전략적이어서 상업적으로도 크게 성공한 라파엘로는 서로 성향이 맞지 않았다. 미켈란젤로를 미워한 브라만테도 아마 자신의 작품을 미켈란젤로가 이어나갈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1506년 브라만테가 대성당으로 기획한 성 베드로의 건축 작업은 그의 사후 라파엘로에게 넘어갔으나 그마저 급사한 후 여러 예술가의 손을 거치며 수정을 거듭했다. 하지만 1546년 건축가로 임명된 71세의 미켈란젤로는 그간의 설계 변경을 꼼꼼히 검토한 후 브라만테의 초기 아이디어를 되살려 중앙 집중형 구조로 마무리한다. 결국 미켈란젤로의 생전에 대성당은 완공되지 못했지만, 후대의 건축가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에 의해 르네상스 최고의 창조로 손꼽히는 건축물로 탄생했다. 미켈란젤로는 세 거장 중 가장 오래 산 만큼 레오나르도와 라파엘로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대작을 다수 남겼는데, 그중 대표작이 시스틴 성당에 그린 ‘최후의 심판’이다. 미켈란젤로는 ‘다비드상’을 제작할 때 그랬던 것처럼 기존의 전형적인 예수상을 탈피해 수염 없이 건장한 체격의 젊은 누드상을 그린다. 예수 아래 인간의 가죽을 들고 서 있는 바르톨로메오 성인은 미켈란젤로 자신의 얼굴과 흡사하다. 하지만 1564년 미켈란젤로가 사망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열린 의회에서 작품의 선정성을 둘러싼 공방이 벌어졌다. 결국 그의 수석 제자가 나서서 성기를 덮는 그림을 그리고, 훗날 복원 작업을 거쳐 작품은 원래의 이미지로 남게 됐다.
레오나르도의 여행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이름은 그가 사생아로 태어나는 바람에 아버지의 성을 쓰지 못하고, ‘빈치 마을의 레오나르도’라는 뜻으로 붙인 것이다. 빈치는 피렌체에서 서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 있는 토스카나의 작은 마을로, 오늘날 레오나르도의 명성을 따라 점차 관광객이 늘어나고 있다. 레오나르도는 피렌체, 로마는 물론 밀라노에서도 크게 활약했다.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이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Santa Maria delle Grazie) 성당에 남아 있는 이유다. 하지만 레오나르도의 흔적을 가장 많이 찾을 수 있는 곳은 바로 프랑스다. 1515년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가 밀라노를 점령했을 때, 레오나르도는 프랑수아 1세와 교황 레오 10세의 면담 자리에 함께하며 국왕에게 움직이면서 대포알을 내뿜는 사자를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한다. 곧이어 그는 프랑수아 1세의 초청으로 프랑스 루아르 강변으로 거처를 옮겨 클로 뤼세(Clos Luce)라는 작은 성에 기거하게 되는데, 이곳은 오늘날 레오나르도 다빈치 박물관으로 거듭나 많은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레오나르도는 이곳에서 프랑스 국왕의 비호를 받으며 많은 건축물과 전쟁 무기를 남기고, 1519년 67세를 일기로 숨을 거둔다. 그 때문에 그의 많은 작품이 프랑스에 남아 있는 것이다. ‘모나리자’가 루브르 박물관에 걸린 이유도 레오나르도가 프랑스로 가져온 미완성 작품을 프랑수아 1세가 구입해 프랑스 왕실의 컬렉션으로 남았기 때문. 이외에도 루브르 박물관은 ‘세례자 요한’, ‘암굴의 성모’를 비롯한 레오나르도의 회화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한 미술관이다. 이 사실을 모르고 있던 이탈리아의 애국주의자 빈센초 페루지아(Vincenzo Peruggia)는 이탈리아 작가가 이탈리아 여성을 그린 작품이 프랑스 미술관에 전시돼 있는 것에 불만을 품고, 1911년 이 작품을 훔치는 데 성공한다. 루브르 박물관은 도둑을 잡기 위해 일주일간 박물관을 전면 폐쇄하고, ‘루브르를 불태우는 자’라는 내용의 시를 쓴 아방가르드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와 피카소를 비롯한 예술가들을 대거 조사하기도 한다. 경찰서를 드나드는 사이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아폴리네르가 실의에 빠져 쓴 시가 바로 “센 강은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흘러내린다”라는 ‘미라보 다리 아래’. 한편 영웅이 되어 ‘모나리자’를 이탈리아 미술관에 걸기는커녕 도둑으로 몰린 페루지아는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 유명한 모작자에게 ‘모나리자’의 위작을 여러 점 그리게 해 미국 미술 시장에 유포하는 등 치밀한 전략을 세우고, 원작을 은밀히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 관장에게 판매하려고 한다. 하지만 관장의 기지로 결국 그는 체포됐고, ‘모나리자’는 1913년 우피치 미술관에 전시되었다가 다시 루브르 박물관으로 돌아갔다. 그 덕분에 그전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모나리자’가 루브르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그리고 레오나르도의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에디터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
글 김영애(이안아트컨설팅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