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단길’을 따라서
시끄럽고 복잡한 대로변에 지친 도시 사람들이 골목길을 찾고 있다. 이에 힘입어 작은 골목들이 ‘리단길’이란 명칭 아래 새로운 문화 트렌드로 부상했다.

1 전통의 정취와 현대적 감성이 어우러져 좋은 골목이라 평가받는 종로 익선동.
2 경주의 주요 관광지로 떠오른 황리단길.
2000년대 후반, 서울의 트로이카는 이태원, 홍대 그리고 가로수길이었다. 즐비한 카페마다 자리가 없을 만큼 세 지역의 상권은 활기를 띠었고, 지역색에 걸맞은 개성 있는 숍과 레스토랑이 이어져 걷는 것 자체가 유희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의 전성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상권이 커지자 모두가 우려했던 젠트리피케이션이 발생했다. 몇 배로 껑충 뛴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던 소상공인은 지역을 떠났고, 그 자리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프랜차이즈 건물로 채워졌다(2012년, 30년간 홍대를 지켜온 리치몬드 과자점이 치솟는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떠난 사건이 대표적 사례다). 똑같은 전철을 밟은 세 지역은 결국 지역색을 잃고 말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리단길’은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했다. 리단길의 시초인 한남 ‘경리단길’은 2009년 이태원과 가까운 데다 비교적 임대료가 저렴한 주택가로 가게가 모여들며 형성된 거리다. 홍대 인근의 ‘망리단길’과 ‘연리단길’도 비슷한 탄생 스토리를 공유한다. 사실 경리단길은 좋은 상권이라 말하긴 어렵다. 언덕은 가파르고 길도 꼬불꼬불해 10분만 걸어도 금세 숨이 찬다. 주택가에 들어선 가게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찾아가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경리단길이 인기를 끈 이유는 ‘차별성’에 있다. 임대료를 절약한 소상공인은 가게의 정체성을 보여줄 수 있는 인테리어와 메뉴 개발에 더 많은 투자를 했다. 게다가 대다수 소상공인이 젊은 층으로 인테리어 감각이 세련됐다. 친숙한 골목길과 세련된 가게의 조합은 특히 20~30대에게 신선하게 다가왔고, 경리단길은 큰 성공을 거두며 전국에 ‘리단길’ 신드롬을 일으켰다.

골목 문화는 독립 서점이나 카페 등 완성도 높은 작은 가게에서 창출된다.
최근 대한상공회의소는 전국에 약 20개의 리단길이 있다고 발표했다. 인천 부평 ‘평리단길’, 부산 해운대 ‘해리단길’, 광주 동명동 ‘동리단길’, 전북 전주 ‘객리단길’, 경북 경주 ‘황리단길’ 등 이 골목들은 ‘꼭 가봐야 할 관광 스폿’이라는 문구와 인터넷 포털 사이트는 물론 각종 SNS에 소개됐고, 덕분에 리단길에 가는 일 자체가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에디터도 유행에 휩쓸려 여러 리단길을 방문했다. 한데 그 골목을 걸을 때마다 ‘경리단길과 다를 바 없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장소 특정적 성격이 없었다. 적어도 황리단길은 유적지가 빼곡한 경주만의 특색이 있을 줄 알았건만, 그렇지 않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2010년의 ‘경리단길’과 지금의 ‘~리단길’은 그 모습이 다르지 않다. 그리고 현재, 경리단길을 필두로 리단길은 하나둘 쇠락하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한남동을 가도 경리단길보다는 해방촌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리단길의 쇠락 현상에는 복합적 이유가 작용한다. 물론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소상공인이 많이 떠난 탓이 크지만, 새로움은 찾지 않고 소위 인스타 감성(인스타그램에서 유행하는 모던하고 힙한 느낌)만 좇는 특색 없는 가게와 주 방문객인 20~30대의 인스턴트식 문화 소비도 간과할 수 없다. 유행은 지나치게 빨리 바뀐다. ‘신선함’과 ‘특별함’을 위해 리단길을 찾던 젊은 세대는 신선함이 식상함이 되면 가차 없이 다른 리단길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런 연유에서 (서울에 한정 지어 말하면) 경리단길, 연리단길, 망리단길 그리고 지금 가장 핫하다는 송파 송리단길로 이어지는 리단길 유행 가도가 형성됐다. 그 유행이 지난 리단길에는 가게가 사라지고 ‘임대’, ‘매매’ 팻말이 들어서며 황폐한 골목으로 전락한다.
골목 문화로 칭송받는 국가는 단연 유럽이다. 특별한 볼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유럽을 한 번이라도 가본 사람들은 “골목길만 걸어도 행복하다”며 칭찬하곤 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에디터는 그곳에 수백 년의 역사가 깃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파리 마레 지구, 프라하 황금소로, 포르투갈 오비두스 등 유럽의 골목들은 역사가 깊다. 적어도 한국의 리단길처럼 5년 안에 흥하고 망한 케이스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리단길을 유럽의 골목처럼 하나의 골목 문화로 고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3, 4 같은 곳처럼 보이는 명동과 홍대. 젠트리피케이션은 골목의 정체성을 없애는 주요인이다.
5 긴 역사를 가진 파리의 마레 지구. 유럽과 같은 골목 문화를 한국에 정착시키기 위해선 다방면의 노력이 필요하다.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모종린 교수는 저서 <골목길 자본론>에서 “흥미롭게도 골목길의 독특한 매력과 문화를 창출하는 상업 시설은 맛집, 독립 서점, 공방, 보세 가게 등 고숙련 자영업자가 운영하는 독립 가게다. 프랜차이즈 가맹점이나 대기업 브랜드 점포, 편의점 등 기업형 가게는 독립 가게들이 골목길을 개척한 뒤 그곳이 주목받기 시작하면 진입하기에 골목길 문화와 정체성 형성에 기여하지 못한다. (중략) 또한 골목의 진짜 매력은 고유의 정체성과 진정성에 있다”라고 말한다. 이 문구에는 리단길이 나아가야 할 모든 방향이 담겨 있다. 소상공인은 SNS 트렌드에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따라 하기식이 아닌 탄탄한 완성도로 특색 있는 가게를 꾸려야 하고, 정부는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해 리단길이 없어지지 않도록 도와야 할 것. 마지막으로 리단길을 찾는 사람들은 식상하다는 이유로 곧바로 다른 리단길을 찾을 게 아니라, 골목을 중심으로 형성하는 문화가 오래 지속되도록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한다. 모두가 합심할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지금처럼 리단길 문화를 인스턴트식으로 소비하다 보면 우리 주변에는 알맹이는 없고 구색만 갖춘 골목만 남을지 모른다. 더 이상 흥망성쇠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좀 더 느긋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노블레스>는 지난 호 포커스 기사에서 ‘몰링(malling)’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한국 도시 문화의 현실을 짚었다. 리단길로 대변되는 한국의 골목을 ‘잘’ 키운다면, ‘몰링’의 유일한 대항마로 성장해 새로운 도시 문화를 형성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언제까지나 유럽의 골목 문화를 부러워할 수 없다. 우리만의 골목, ‘리단길’을 가질 수 있는 시기는 지금일지도 모른다.
에디터 이효정(hyojeong@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