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부트!
어디서 본 것 같은 영화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익숙한 듯 새로운 리부트 영화다.

사실적 묘사로 호평받은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영화 속 장면.
최근 볼만한 영화를 찾다 보면 ‘리부트(reboot)’란 말을 자주 접하게 된다. 주로 슈퍼히어로 시리즈나 예전 흥행작의 후속편처럼 보이는 영화에서 말이다. 컴퓨터의 재부팅을 연상시키는 이 단어가 낯설게 느껴지는 건 최근까지도 ‘리메이크(remake)’란 말로 뭉뚱그려 사용했기 때문일 거다. 하지만 이 둘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 리메이크가 원작을 감독과 배우만 교체해 다시 만드는 정도라면, 리부트는 기존 영화의 컨셉이나 캐릭터만 유지한 채 전반적 이야기를 완전히 새롭게 꾸미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존 시리즈가 스토리상 완결됐거나, 이전 작품과 새로 만들려는 작품의 시기적 간극이 너무 크거나, 혹은 이전 영화가 실패해 더는 시리즈를 이어갈 수 없는 이유 등 리부트의 제작 근거도 다양하다.
리부트의 가장 성공적인 예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배트맨’ 3부작 시리즈를 꼽을 수 있다. 배트맨은 1939년 DC코믹스의 만화에 처음 등장한 이래 지금까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슈퍼히어로 캐릭터다. 1943년부터 TV 시리즈와 영화로 꾸준히 제작되었지만, 기성세대에게 가장 익숙한 건 팀 버턴 감독의 <배트맨>(1989년)과 <배트맨 리턴즈>(1992년)가 아닐까싶다. 어두운 분위기의 배트맨을 감독 특유의 기괴하면서 몽환적인 감성으로 재해석한 이 영화는 아직도 일부 팬에게 최고의 배트맨 영화로 꼽힌다. 하지만 아이부터 어른까지 온 가족을 위한 영화가 되길 바란 제작사 워너브러더스가 제작진을 교체하며 재앙은 시작됐다. 새 감독 조엘 슈마허가 만든 첫 작품 <배트맨 포에버>(1995년)는 그럭저럭 흥행에 성공했지만, 후속작 <배트맨과 로빈>(1997년)은 이듬해 최악의 영화를 시상하는 제18회 골든 라즈베리 어워드 9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될 만큼 졸작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한 ‘배트맨’ 시리즈를 부활시킨 주인공은 바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다. 그는 팀 버턴의 몽환적 분위기와 조엘 슈마허의 어설픈 유머를 모두 버리고, 현실 어딘가에 있을 법한 배트맨의 세계를 창조했다. 만화 같은 과장된 분장과 소품을 최대한 줄인 사실적 묘사, 배트맨 역의 크리스천 베일과 악당 조커역의 히스 레저 등 배우들의 명연기, 히어로물답지 않은 선과 악에 대한 근원적 성찰로 대중은 물론 평단에서도 호평을 받았으며, 특히 시리즈의 두 번째, 세 번째 작품인 <다크 나이트>(2008년)와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년)는 모두 전 세계 흥행 10억 달러를 넘어서는 대성공을 거뒀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끝으로 크리스토퍼 놀런의 ‘배트맨’ 시리즈는 막을 내렸지만, 대신 배트맨은 슈퍼맨과 원더우먼 등 DC코믹스의 영웅들을 한자리에 모이는 DC 확장 유니버스(DC Extended Universe) 영화에서 다시 한번 리부트된다. 영화배우 벤 애플렉이 맡은 배트맨은 작년 개봉한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에 처음 등장했으며, 2019년에는 단독 영화가 개봉할 예정.

<007 카지노 로얄>에 출연한 본드 역의 대니얼 크레이그와 본드 걸인 베스퍼 역의 에바 그린.
잘 모르고 지나쳤지만, 10년 전 개봉한 마틴 캠벨 감독의 <007 카지노 로얄>(2007년) 역시 리부트 작품이다. 영화 ‘007’ 시리즈는 본래 스코틀랜드 출신 소설가 이언 플레밍의 스파이 소설을 기반으로 했다. <007 카지노 로얄>은 작가가 1952년에 처음 발표한 소설을 토대로 제작한 것. 감독은 점점 인기를 잃어가던 ‘007’ 시리즈를 부활시키기 위해 리부트를 단행했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그간 ‘007’ 시리즈에서 여러 차례 주연배우가 교체돼도 주인공 제임스 본드가 동일 인물이란 사실을 당연히 여겼다. 하지만 <007 카지노 로얄>에서 본드는 막 코드명 ‘007’을 받은 풋내기이며, 원작 소설에 가까운 냉혹한 스파이인 동시에 불안정한 성격의 입체적 캐릭터로 다시 태어났다. 또 영화마다 독립적 에피소드를 다룬 이전 ‘007’ 시리즈와 달리, <007 카지노 로얄>의 이야기는 후속편인 <007 퀀텀 오브 솔러스>(2008년)로 이어진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사실 <007 카지노 로얄>은 제작 과정부터 우여곡절이 많았다. 주인공을 맡은 대니얼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 역에 어울리지 않는다며 일부 팬이 반대 운동을 벌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현재 이 작품은 역대 ‘007’ 시리즈 중 최고로 평가되고 있다. 새로운 매력으로 ‘007’ 시리즈의 부활을 이끈 대니얼 크레이그는 그 여세를 몰아 <007 스펙터>(2016년)까지 총 4편의 007영화에 출연했다. 여담으로 그는 ‘007’ 시리즈의 하차와 복귀 사이에서 고심하는 중인데, 향후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리부트 여부가 결정될 듯하다.
하지만 리부트가 항상 달콤한 성공을 보장하는 건 아니다. 2015년에 나온 <판타스틱 4(Fant4stic)>가 대표적 실패 사례. 마블코믹스의 만화 <판타스틱 4>를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판타스틱 4(Fantastic 4)>(2005년)와 그 후속작인 <판타스틱 4 – 실버 서퍼의 위협>(2007년)의 리부트 작품이다. 앞선 두 영화는 손익분기점을 넘기긴 했으나 평단과 시장의 미지근한 반응을 얻는 데 그쳤고, 제작사 20세기폭스는 예정된 3편의 제작을 취소하고 리부트를 단행한다. 시작은 좋았다. 10대들이 초능력을 얻게 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그린 <크로니클>(2012년)로 스타덤에 오른 감독 조시 크랭크를 영입하고, 2014년 흥행작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의 작가 사이먼 킨버그에게 각본을 맡긴 것만 봐도 제작사의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원작을 기만하는 설정 변경과 미스 캐스팅, 불친절한 스토리텔링까지 어우러진 희대의 괴작이 탄생한 것. 심지어 개봉 직후 엄청난 악평이 쏟아지자 감독은 자신의 SNS에 “나는 원래 이 영화의 환상적인 버전을 갖고 있었다. 그 버전이라면 훨씬 좋은 평을 받았을 거다. 당신들은 절대 볼 수 없겠지만”이라고 올려 제작사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결국 이 영화는 제36회 골든 라즈베리 어워드 5개 부문 노미네이트, 3개 부문 수상이란 불명예를 안았고, 예정된 후속편 역시 소리소문 없이 취소됐다. 이렇게 리부트 영화는 말도 많고 탈도 많다. 그럼에도 요새 할리우드에 다시금 리부트 열풍이 부는 건 분명하다. <원더우먼>과 <스파이더맨>, <미이라> 등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리부트 영화들이 올여름 개봉을 앞두고 있고, <툼 레이더>와 <조로>를 비롯한 유명 시리즈도 리부트가 확정됐거나 제작 중이다.

1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배트맨 영화 <다크 나이트>의 포스터.
2 2015년 최악의 영화로 선정된 <판타스틱 4>의 포스터.
그렇다면 우리는 왜 리부트 영화에 열광하는 걸까? 대중문화 평론가 김봉석은 그 이유를 ‘친근함’에서 찾는다. “20~30년 전부터 대중문화의 세례를 받고 자란 젊은 세대가 문화의 주 소비층으로 성장한 겁니다. 그들이 예전에 자신이 보고 듣던 것에 친근감을 느끼고 다시 즐기는 거죠. 일종의 복고 현상인데, 이는 영화뿐 아니라 음악과 만화, 게임 등 문화 산업 전반에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각에선 리부트 영화나 리메이크 영화가 결국 콘텐츠의 한계에 다다랐을 때 내놓는 방편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누군가 이미 했던 생각을 새로운 아이디어로 꾸미는 것도 그 나름대로 의미 있어 보인다. 예전 영화의 주인공이 누구로 바뀌었는지, 다른 감독이 스토리에 어떤 변화를 줬는지, 또 기술적 문제로 이전에는 제대로 나타낼 수 없었던 것이 어떻게 최신 기술로 재현됐는지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하니 말이다. ‘본편만 한 속편은 없다’, 혹은 ‘원작만 한 리메이크작은 없다’ 같은 오랜 격언도 이젠 옛말이다. 최신 기술과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재탄생한, 익숙한 듯 새로운 리부트 영화를 감상해보자.
에디터 황제웅(hjw1070@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