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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표 없는 이야기

LIFESTYLE

해피엔딩 소설은 으레 ‘그리하여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말로 마침표를 찍는다. 하나의 그룹을 세계적 반열에 올려놓은 후, 미련 없이 은퇴한 남자의 인생도 그렇게 끝맺음하는 듯했다. 하지만 문화 단체 사단법인 K프렌즈의 공동 대표를 맡은 고영립 회장이 걷고 있는 소설 한 편의 말미는 이렇게 장식하고 싶다. ‘그리하여 지금도, 여전히 행복합니다.’

고영립 前 화승그룹 회장은 샐러리맨들에겐 우상과도 같은 인물이다. 그의 별명인 ‘샐러리맨의 신화’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는 공채로 입사한 말단 사원에서 결국 그룹 전체를 책임지는 회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IMF 당시 모든 기업이 그랬듯 어려움에 처한 회사의 구원 투수로 나섰고, 매출을 8,000억에서 3조3000억까지 끌어올렸으며 자동차 부품과 소재, 화학, 유통, 패션 등의 분야에 진출해 회사의 체질 자체를 개선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지난 2010년에는 상공인에게 최고의 영예로 꼽히는 수석 금탑산업훈장을 수훈하기도 했다. “목숨 걸고 회사 생활을 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고영립 회장은 2014년 40여 년간 정든 회사를 떠났다. 그러나 그는 퇴임 후에도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단지 분야만 조금 바뀌었을 뿐. 요즘에는 유기농 작물을 연구하고 재배하는 일과 더불어 문 화 단체 K프렌즈의 공동 대표 업무에 집중하고 있다.
평범한 회사원들이 꿈꾸는 은퇴 후 삶은 초야에 묻혀 소일거리를 하며 유유자적 사는 것이다. 자고 싶은 만큼 자고, 원할 때 어디든 훌쩍 떠날 수 있는 삶.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40년간 매일 새벽 6시에 일어나 새벽 1시가 넘어 잠드는 생활을 이어왔습니다. 퇴임 후 저 절로 6시에 눈이 뜨였는데 더 이상 출근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되니 홀가분하기보다는 오히려 당황스럽더군요. 퇴임 후 삶에 대한 계획을 나름 잘 세웠다고 생각하는데도 갑자기 찾아온 여유가 참 낯설고 힘들어 불교에서 위안을 찾으며 자신을 추슬렀죠.” 물론 기업인으 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과거 피부암 선고를 받고 건강에 각별한 관심을 갖게 된 그는 올바른 먹거리를 전파하는 데 집중하며 은퇴 후 삶으로 꿈꿔온 ‘농부 CEO’가 되었다. 경남 양산에 자리한 농장에는 농약과 비료를 쓰지 않는 것은 물론, 인 근의 지하에서 끌어온 암반수로 건강하게 키우는 유기농 작물이 가득하다. 열심히 키운 농작물은 모두 수영의 레스토랑 ‘엘 올리브’와 ‘커피 드 포트’에서 사용한다. 1년 후에는 이곳에 농부와 소비자가 직접 만날 수 있는 유기농 장터가 열릴 것이다. “건강의 근본적 요소 인 먹거리에 대해 환기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싶습니다.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곳이 아니라 건강한 식생활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공유하는 자리를 기대합니다.”
농부 CEO 외에 그에겐 최근 또 하나의 직함이 생겼다. 바로 문화 단체인 사단법인 K프렌즈의 공동 대표다. 지역 방송국 KNN에서 주도하는 이 단체는 부산에서는 보기 힘든 문화 후원 단체다. 부산 지역의 재계, 의료계, 문화계 등 오피니언 리더 60명이 뜻을 모아 지난 해에 결성했다. 진정한 의미의 페이트런이다. 왕실과 귀족 그리고 부유한 상인 등이 주축이 되어 역량 있는 이들이 오롯이 예술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아낌없이 물질과 시간을 투자하고 열성적 팬이 되길 마다하지 않은 페이트런 덕분에 과거 예술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위대한 예술가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지난해에 지역 방송국 최초로 오케스트라를 창단하며 눈길을 끈 ‘KNN 오케스트라’ 역시 K프렌즈가 지원하는 단체다. 공동 대표인 KNN 문혁주 사장이 제안한 것으로, 방송국에서 운영하는 오케스트라를 비롯해 전문 오케스트라가 많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신선한 시도로 평가된다. 특히 창단 연주회 <노자와 베토벤>은 건명원 최진석 원장의 강연과 지휘자 오충근의 만남으로 눈길을 끌었다. ‘들숨-날숨-마무리숨’으로 이름 지은 최진석 원장의 노자 강의와 함께 곡에 대한 냉철한 해석으로 ‘운명’을 비롯한 베토벤의 음악을 연주한 공연은 앞으로 KNN 오케스트라의 행보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높였다. 이 아름다운 친구들은 단순히 예술을 후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모두가 함께 문화생활을 공유할 수 있도록 수준 높은 공연을 유치해 도시의 문화 향유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도 집중한다. “지난해 12월에는 세계적 테너 라몬 바르가스와 우리나라 출신의 유명 소프라노 홍혜경 씨를 초청했습니다. 서울은 물론 뉴욕과 유럽에서도 보기 힘든 공연인 만큼 수준 높은 프로그램을 구성했습니다. 관객이 영화의전당 하늘연극장을 가득 메웠는데 정말 감격스러웠습니다.” 공연 애호가는 물론 학생과 직장인 등 부산에 사는 이라면 누구나 함께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것이 K프렌즈의 궁극적 목표다. 아직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K프렌즈는 다른 후원 단체와 차 별화할 수 있는 자신만의 색깔과 역할을 찾으려 노력 중이다. “화승그룹에 몸담았을 때 아트부산을 후원하며 예술에 꾸준히 관심을 갖긴 했지만, 기업 경영만큼이나 어려운 것이 문화 예술 분야임을 알았습니다. 제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되새기는 가치가 있습니다. 첫 번째, 욕심을 버려라. 두 번째, 큰일, 큰 생각과 큰 행동을 하라. 마지막은 1등을 추구하되 2등에 머물라는 것입니다. 이건 언뜻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는데, 1등은 자신의 뒤를 바짝 쫓는 자들을 따돌리기 위해 오로지 앞만 보고 가기에 오히려 주변의 것을 놓치고 맙니다. 하지만 2등은 앞에 있는 1등을 따라잡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게 되죠. 지금의 저를 만든 이 신조를 되새기며 현재 제게 주어진 두 번째 임무를 즐겁게 수행해나갈 생각입니다.” 고영립 회장이 풀어내는 수많은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기엔 이르다. 마치 40년 전 사회에 첫발을 내딛던 신입 사원 시절로 돌아간 듯, 다시 한 번 목표를 향해 나아가며 스스로 삶을 가꾸는 그의 인생은 그리하여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

에디터 | 신숙미(프리랜서)
사진 | 공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