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LETTER

노블레스 매거진의 뉴스레터를 신청해보세요.
트렌드 뉴스와 이벤트 소식을 가장 빠르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닫기

만화 말고 그래픽 노블

LIFESTYLE

서재에 당당하게 꽂아놓을 만한, 예술성과 작품성을 겸비한 그래픽 노블 세 권을 소개한다.

‘그래픽 노블(graphic novel)’이란 말이 다소 낯설지도 모르겠다. 미국의 전설적 만화가 윌 아이스너(Will Eisner)가 만든 개념으로, 소설만큼 깊은 텍스트와 예술적 그림을 결합한 만화책을 일컫는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만화를 가볍게 읽고 넘기는 책으로 치부하지만, 이러한 편견이 무색할 만큼 예술성과 작품성을 겸비한 그래픽 노블이 연이어 출판되고 있다. 그중 에디터의 눈을 사로잡은 건 이탈리아 만화가 지피(Gipi)의 <아들의 땅>. 종말 이후 문명이 사라진 세계에서 살아가는 아버지와 두 아들의 이야기다. 아버지는 두 아들을 미개하고 잔혹한 세상에 맞서는 존재로 키우기 위해 글을 가르치지 않고, ‘사랑’ 같은 감정과 관련된 단어의 사용도 막는다. 아버지는 매일 밤 일기를 쓰고, 두 아들은 그 내용을 궁금해한다. 아버지가 죽은 후, 두 아들은 일기장에 담긴 비밀을 풀기 위해 그것을 읽어줄 사람을 찾아 나선다. 이 여정에서 두 아들은 여러 인간 군상을 만나며 감정을 배워나간다. 해칭 기법으로 그린 흑백 그림은 조금 산만하지만 한 장면 한 장면 집중해서 보게 하는 힘이 있다. 특히 책의 초반부에서 문자로 보기 어려운 글씨로 쓰인 아버지의 일기가 10페이지가량 이어지는데, 이는 독자들이 자연스레 아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하는 장치다. 잔잔한 감동이 있는 성장 스토리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좀 더 ‘만화’다운 작품을 원한다면 <페이션스>도 괜찮다. 미국 2세대 언더그라운드 만화의 대표 작가 대니얼 클로즈(Daniel Clowes)의 최신작이다. 이 책의 주인공 잭 발로는 변변한 직장을 구하지 못한 채 음란 전단이나 돌리며 자기혐오에 빠진 남자. 그가 아내 페이션스의 임신 소식에 훌륭한 남편이 되기로 결심한 날, 아내는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경찰은 치정극으로 결론지어 그를 구속하고 억울하게 옥살이까지 시킨다. 몇 개월 후 누명을 벗지만, 범인을 찾기 위해 십수년을 허비한 그에게 우연히 타임리프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과연 그는 과거로 돌아가 아내를 구할 수 있을까? 숨 가쁜 전개와 시공간을 넘나드는 다층적 구성은 잘 만든 한 편의 할리우드 SF 영화를 연상시킨다. <고스트 월드>, <아이스헤이번>으로 증명한 작가 특유의 발칙한 유머와 신랄한 풍자는 여전하고, 동시에 아내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한 남자의 따뜻한 진심은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스토리와 그림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걸작으로, 한번 책을 펼치면 끝까지 손을 놓지 못할 정도.
마지막으로 <그것은 참호전이었다 1914-1918>은 프랑스의 국민 만화가 자크 타르디(Jacques Tardi)의 대표작이다. 이 책은 1917년 10월 포탄이 쏟아지는 참호에서 시작된다. 여기서 “독일인이든 프랑스인이든, 서로를 죽여야 할 이유는 없다. 처음에는 똑같이 흥분해서 전쟁에 뛰어들었더라도 말이다. 지금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책을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병사들의 다양한 사연이 이어진다. 음식물 찌꺼기가 묻은 실을 바늘에 꿰어 스스로 팔을 찌르고 절단 수술을 위해 병원으로 후송되는 병사, 적들의 집중 사격에 동료를 잃고 시체의 배에 양손을 넣은 채 밤을 지새운 프랑스 군인 등… 저자는 이 모든 이야기를 담담하게 묘사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전쟁의 공포는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좌우로 긴 만화 패널과 거기에 그린 회색조의 그림은 전쟁의 비극적인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이 책에는 영웅도, 중심인물도 없다. 전쟁으로 고통받는 평범한 인간들이 있을 뿐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전쟁이 무엇인지, 과연 누구를 위한 일인지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에디터 황제웅(hjw1070@noblesse.com)
사진 김흥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