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과 멋 그리고 문화
한 청년이 어린 시절의 기억 속 ‘그 맛’을 다시 발견한 뒤 한과를 만드는 길로 접어들었다. 그렇게 37년간 한길을 걸어온 김규흔 명장은 이제 세계를 바라보며 또 다른 꿈을 꾸고 있다.

경기도 포천, 고즈넉한 자연 풍경이 펼쳐진 산정호수 근처에 세계 유일의 한과 문화 박물관 ‘한가원’이 자리한다. 한과 전반에 관한 정보를 접할 수 있는 박물관과 한과 만드는 것을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교육관으로 이루어진 건물이다. 2008년 개관한 이곳은 한 사람의 의지와 꿈에서 출발했다. 주인공은 한가원의 관장이자 2013년 대한민국 한과명장 1호로 지정된 김규흔 명장. 그가 박물관을 설립하는 데는 2005년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26호 유과·약과 분야의 명인으로 지정된 것이 큰 계기가 됐다. “명인이 된 후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고민했죠. 요즘 젊은이들은 전통 과자보다 서양 과자에 익숙한 세대잖아요. 한과에 담긴 우리 조상의 얼과 문화를 보여주고, 직접 만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먹어볼 수 있게 하면 앞으로도 맥을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실제로 한가원에서는 가족 단위 관람객이 방문해 아이들이 체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한과를 접하고 맛보는 풍경을 종종 볼 수 있다. 세 살 입맛이 여든까지 가는 법이니 피자를 먹고 자란 아이들이 나중에 한과를 찾을 리 없다. 그래서 그는 어린 시절에 음식을 접한 경험과 그렇게 아로새겨진 맛에 대한 기억이 중요하고, 아이들의 손에 한과를 쥐여주는 게 꼭 필요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가 한과를 만들기 시작한 것 역시 한과에 대한 추억을 불러일으킨 특별한 인연 덕분이다. “어릴 때 제사상에 올린 유과를 몰래 집어 먹은 적이 있고, 학교에 다녀오면 할머니가 유과와 약과를 건네주곤 했죠. 그때 정말 맛있게 먹은 기억이 남아 있어요. 그런데 나중에 선을 보러 나간 자리에서 만난 지금의 아내가 약과 몇 개를 싸왔더군요. 형부가 한과 공장을 운영한다고요. 그때 먹은 약과의 맛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불러일으켰어요. 자연히 자주 만나게 됐고, 정이 쌓여 결혼도 했죠.” 아내와 인연을 맺으며 동시에 한과와도 연을 맺은 셈이다. 그는 처가의 한과 공장에서 2년간 일했고, 1981년 스물일곱의 나이에 신궁병과를 설립하며 본격적으로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다.
한국 전통 식품의 세계화를 위한 품평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만찬’
처음에는 상황이 어려웠다. 그가 터를 자리 잡은 서울 월계동 시장에는 이미 여러 한과 가게가 있어 거래처를 확보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 자신만의 경쟁력을 갖추지 않으면 어렵겠다고 판단해 남들이 만드는 것과는 다른, 새로운 한과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연꽃 모양, 마름모꼴 약과를 처음으로 내놓고 계피 맛, 생강 맛 등 그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맛을 선보이면서 점차 한과 시장을 장악하고 이끌게 됐다. 김규흔 명장이 개발한 것 중에는 홍삼과 녹차를 함유한 한과 제조법을 포함해 특허 등록한 제조법이 여러 가지다. 지금은 익숙하게 볼 수 있는 유색 유과도 백년초, 치자, 녹차 가루를 이용해 그가 처음 시장에 내놓은 것이다. 그는 150여 종의 한과를 개발했고, 틈틈이 외국 전통 과자에 대해 연구하며 낱개 포장을 하는 등 남다른 시도를 계속해왔다. “한과가 서양 과자와 다른 점은 모든 재료가 자연에서 온다는 점이에요. 찹쌀, 맵쌀, 참깨, 들깨 등 농산물이 기본이고 색을 낼 때도 천연 재료를 사용하니 인공색소나 조미료는 전혀 들어가지 않습니다. 또 찹쌀을 발효시키는 과정을 거치니 발효 식품이기도 하죠.” 한과를 외국인에게 알릴 기회도 많았다. 그는 지금까지 한과를 만들며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2000년 서울에서 개최한 ASEM 정상회의에 한과를 납품한 일을 꼽는다. 전국 최고의 한과를 가리는 ‘전국한과인대회’에서 대상을 받아 공급업체로 선정된 것. 그 밖에도 G20 정상회의를 비롯해 수차례 국제 행사에 납품하고 해외에 나가 한과를 소개할 기회도 많았지만, 당시 26개국 정상에게 직접 만든 한과를 선보인 것이 더없이 큰 보람이라고 한다.
그는 지난해에 출간한 책 <한국의 전통 과자>에서 “한과의 유네스코 등재를 꿈꾼다”고 밝혔다. 언뜻 들으면 의문을 품게 하는 꿈이지만 그는 차근차근 그 가능성을 논한다. “김치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됐죠. 한과도 마찬가지로 인정받을 만한 우리 문화예요. 김치가 일상적 식생활 속에 자리한다면 한과는 돌, 결혼, 회갑, 제사, 명절 때 상에 올리니 역시 우리 전통문화와 뗄 수 없는 음식이죠. 한과 문화가 김장 문화 못지않은 가치가 있는데 그만큼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에요. 이제는 한과를 세계화하고 유네스코 등재를 위해 노력하는 게 제가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는 그리운 맛, 또 누군가에게는 신선한 맛일 수 있는 한과를 그는 세계의 모든 이에게 사랑받는 맛으로 만들려 한다. 물론 그러기 위해 우리 테이블에 익숙하게 한과를 올리는 일이 우선임은 두말할 것 없다. 이야기를 이어가던 그가 문득 약과 한 조각을 권했다. 진득하게 찰진 질감을 예상했건만 뜻밖에도 페이스트리처럼 겹겹이 층이 쌓여 바삭한 느낌이다. 아메리카노와도 잘 어울릴 거라는 말에 의외로 쉽게 맛의 조화가 연상된다.
어쩌면 이 시대에 문화란 본래의 것을 고집스레 고수하는 게 아니라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변화하는 대로 좋은 것이 아닐까. 다만 그 속에 담긴 혼을 잊지 않고 기본을 지키며 발전시켜나가는 일이 바탕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바로 지금 김규흔 명장이 해나가고 있는 일이다.
에디터 안미영 (myahn@noblesse.com)
사진 안지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