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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방의 어머니, 쿡방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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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최고의 인기 상품으로 떠오른 ‘먹방’과 ‘쿡방’의 잘 알려지지 않은 과거사.

10여 년 전 푸드포르노란 말이 문득 등장했다. 딱히 어떤 걸 두고 푸드포르노라 하자는 개념이 생기고 등장 한 단어는 아니었다. 화면에 음식이 나오는데 섹스를 연상시키면 푸드포르노라 하고, 섹시한 여자가 음식 먹는 장면을 두고도 푸드포르노라 불렀다. 요샌 섹시한 여자가 아니더라도 음식 먹는 장면이 나오면 푸드포르노고, 굳이 섹스를 연상시키지 않아도 푸드포르노란 말을 붙인다. ‘슬로푸드’의 창시자인 국제슬로푸드협회의 카를로 페트리니(Carlo Petrini) 회장은 심지어 “농업에 대해 말하지 않고 음식만 이야기하는 게 푸드포르노”라고 말했다.
결론부터 말해보자. 지금 한국의 먹방과 쿡방은 푸드포르노다. 포르노(포르노그래피)란 ‘인간의 성적 행위를 묘사한 소설과 영화, 사진, 그림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이 말을 가져와 ‘푸드포르노(푸드포르노그래피)’를 풀면 ‘인간의 먹는 행위를 묘사한 소설, 영화, 사진, 그림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어색하지만 푸드포르노의 성격을 명확히 하기 위해 일반 포르노를 섹스포르노라 하고, 이 둘의 유사성을 살펴보자. 먼저 섹스와 푸드의 쾌락은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뇌의 작용인 건 같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내뱉는 “Better than sex”는 관용어구로도 취급할 정도니까. 쾌락 행위란 원래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하는 게 본능이다. 대개 자신의 성행위를 남에게 보여주지 않으며,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음식도 그렇다. 섹스하는 사람을 빤히 볼 수 없듯이 음식 먹는 사람을 빤히 볼 순 없다.하지만 영상물에선 섹스든 음식이든 볼 수 있고, 보며 쾌감을 느낀다. 하지만 음식이 나온다고 전부 포르노는 아니다. 이를 보는 이가 쾌감을 느끼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먹방’이든 ‘쿡방’이든 반드시 음식을 먹는 사람이 등장해 음식을 통해 얻은 쾌감을 맹렬히토 해내야 한다. 쾌감을 느끼는 사람이 등장해야 한다는 점에서 섹스포르노와 푸드포르노는 같다. 결국 ‘쾌감의 모방’이란 점에서 섹스포르노도 푸드포르노나 같은 것이다. 그런데 잠깐, 우린 어쩌다 이렇게 음식에서 섹스와 같은 쾌락을 느끼게 된 걸까? 사실 인간이 음식에서 쾌락을 느끼게 된 계기를 살피려면,그 옛날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예부터 인간은 먹어야 살았다.그리고 인간은 지구의 동물 중 가장 다양한 종류의 것을 먹을 수 있었다.인간이 지구에서 가장 번창한 동물이 된 건 어떤 것이든 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무한 잡식 능력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능력이 아니다. 문명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바로 사회적 동물로서의 능력 말이다. 수백만 년 전 ‘벌거벗은 원숭이’던 인간은 손발톱과 이가 약한데다 잘 뛰지도 못하고 후각 또한 민감하지 않았다. 당연히 독자적 사냥꾼이 될 수 없었다. 나무에도 못 오르고 바닥을 기는 일도 포기했다. 초식동물과 비 교해 먹이 확보 능력도 한참 떨어졌다. 그래서 이 열등한 동물이 먹고살기 위해 선택한 전략은 주변에 있는 모든 걸 먹거리로 확장하는 거였다. 바로 ‘먹고 죽는 게 아니라면 모두 먹어버리자!’다.
그런데 이렇게 사는 데에도 문제는 있었다. ‘먹을 만한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판단을 본능적으로 해야 했다. 설령 먹을 만한 것이 못돼도 “이건 맛있는 거야”라고 스스로 각인시켜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눈앞의 먹거리를 쾌락의 물질로 느껴야 했다. 먹는 것이 곧 쾌락임을 억지로 몸에 새겨야 했다. 그리고 이는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벌거벗은 원숭이의 새끼들에게 전해졌는데, 새끼가 ‘쓰다’, ‘시다’, ‘거칠다’고 투정해도 어미는 그 음식을 입에 물고 “정말 맛있지?”라며 새끼의 입에 다시 밀어넣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새끼들은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 쾌락의 식욕을 체계화한 본능이 바로 ‘모방본능’이다.
사실 지구라 불리는 이 거친 자연에서 벌거벗은 원숭이에게 주어진 무기는 강인한 체력도 아니고,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도 아닌 ‘상대방과 무한히 공감하는 능력’인 모방본능이었다. 모방본능은 인간이 사회적 동물로 진화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본능이기도 하다.
언어가 없던 그 옛날 우리 조상은 긴밀한 의사소통을 하기 위해 상대방의 표정이나 목소리, 행동 등을 모방했다. 이들은 상대의 눈빛 하나, 입술의 움직임 하나에도 의사를 제대로 파악해야 했고, 그와 비슷한 눈빛과 입술 모양을 해 보였다. 서로의 눈빛을 모방하고, 입술의 움직임을 모방하면서 공통의 소통 수단을 확보했다. 실제로도 인간의 몸을 영장류와 비교 해보면, 우리 조상이 모방을 통한 의사소통에 얼마나 집중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은 서로 간의 교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얼굴에 난 털을 없앴고, 얼굴 근육을 섬세하게 발달시켰으며, 좀 더 나은 대화를 위해 성대를 목구멍 아래로 내리고 둥근 모양으로 진화시켜 목소리의 무한 변주를 확보했다. 더 나아가 이런 모방본능은 상대의 미각을 모방하기에 이르렀다(이 과정에서 모방이 성공적이었다면 감정까지 모방했다).
말이 어려워서 그렇지 내용은 단순하다. 인간은 지구에 널려 있는 수많은 먹거리를 어떻게든 먹어야 했고, 그런 활동을 위해 쾌락을 극대화하는 모방 전략을 사용한 것. 하지만 그 어떤 것이든 먹는 데 필요한 인간의 (쾌락의) 식욕은 먹거리가 충분히 확보된 지금에 와서는 그 자체로 인간의 본능인 것처럼 작동하기 시작했다.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는 일을 마치 오래전부터 내재된 본능인 양 취급하고, 결국엔 미식이 예술의 한 영역인 양 여기는 세상으로 변했다. 이건 사실 바르다, 그르다의 문제를 넘어선 문제이기도 하다.
먹방과 쿡방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쾌감을 주는지 설명하려고 시작한 글이 사실 조금 장황해진 것도 같다. 하지만 이 장황함은 간단하게 줄일 수 있다. ‘인간은 이것저것 아무거나 먹기 위해 자연의 먹거리에 쾌락을 박아 넣었고, 이젠 그 쾌락의 ‘그림자’만 보고도 쾌락을 느끼게 됐다’는 것.
푸드포르노의 역사는 길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벽화가 있는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엔 소만 그려져 있는 게 아니다. 그 옆에 사람의 손자국이 꾹꾹 눌려 있다. 소를 자신에게 내려달라는 숭배의 마음이 그 손자국에 묻어 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실은 그게 아닌 것 같다. 거기 그린 소는 이미 그들이 먹은 소다. 손자국은 ‘내가 먹었다’ 하는 사인이다. 나아가 ‘이 소 는 먹을 만하니까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잡을 것’이라는 뜻을 후세에 남긴 것으로 해석해야 옳다. 이 또한 일종의 먹방이고 쿡방이다. 물론 푸드포르노야 다른 나라에도 있다. 포르노라는 이름을 붙여서 그렇지 부도덕하고 비 윤리적인 일은 아니다. 감정 소통을 통해 인간의 삶을 여유롭게 한다며 긍정의 시선을 보낼 수도 있다. 그러나 쾌락은 실제의 것이어야 하고, 그래야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사랑도 그렇고 음식도 그렇다.
한국에서 지금 먹방과 쿡방이란 이름의 푸드포르노가 크게 유행하는 건 현실의 먹거리에서 그리 쾌락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먹는 음식이 맛있고, 집에서 맛있는 요리를 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굳이 먹방이나 쿡방을 보며 남의 쾌락을 ‘심각하게’ 모방하진 않을 것이다. 알타미라 동굴에서 비롯한 푸드포르노의 역사가 길이길이 이어지는 것이지만, 앞으로 실제 우리 앞에 주어지는 음식에 따라 그 포르노의 질이 달라지긴 할 것이다.

에디터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
황교익(푸드칼럼니스트) 사진 Getty Imag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