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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지 않는 힘

FASHION

에르메네질도 제냐 일가의 뿌리인 트리베로와 궁극의 호사를 경험할 수 있는 비스포크 아틀리에를 찾았다. 전통과 혁신이 어우러진 이 두 곳에서 현재의 에르메네질도 제냐를 있게 한 원동력을 발견했다.

나에 의한 나만의 옷,
Bespoke Atelier

1 이냐치오 가르델라의 암체어가 놓인 대기실.
2 마스터 테일러와 고객이 소통하는 공간에는 삼면 거울이 놓였다. 이곳에서 세세한 피팅을 통해 최상의 결과를 완성한다.

눈앞에 놓인 선택지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이 보편적 쇼핑 방법이지만, 때로 취향과 체형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슈트처럼 원하는 것이 확고한 경우가 있다. 지난 3월 15일, 에르메네질도 제냐는 옷에 대한 열정과 뛰어난 안목을 지닌 남자를 위해, 철저한 맞춤 방식으로 옷을 만드는 비스포크 아틀리에를 열었다. 이 소식을 접한 에디터는 사진을 통해 본 아틀리에의 기품 있는 오라에 매료돼 추후 밀라노 방문 시 꼭 들르고 싶은 곳으로 기억에 남겨두었다. 밀라노 남성 패션 위크가 한창이던 지난 6월, 연이은 일정으로 밀라노 시내를 종횡무진 누비던 중 에르메네질도 제냐의 초대를 받아 아틀리에를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에르메네질도 제냐 글로벌 스토어의 최상층에 위치한 아틀리에로 향하는 길은 꽤 비밀스러웠다. 정문이 아닌 건물의 모퉁이를 돌면 드러나는 또 다른 문을 통해 그곳에 닿을 수 있었던 것. 아틀리에의 문이 향한 비글리 거리는 바로 옆 몬테나폴레오네의 북적임과는 달리 고즈넉함이 감돌았다. 표식 역시 문 옆에 달아놓은 금빛 패널 하나가 전부라 자칫 지나칠 수도 있을 정도. 아마도 아는 이들만 찾아오는 곳이리라. 초인종을 누르고 고풍스러운 내부로 들어서니 오래된 엘리베이터가 시선을 붙잡았다. 영화에서나 보던 수동식 개폐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을 오르는 기분이란! 약간의 수고로움이 따르는 새로운 경험에 웃음이 번졌다. 팔라초 거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최상층 아틀리에로 향하는 지극히 아날로그적이며 비밀스러운 방식. 그 모든 여정이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비스포크 경험을 응축하고 있었다.
최상층에 당도하자 아틀리에의 마스터 테일러 안젤로가 다정하게 환대해주었다. 그는 이곳에서 고객이 원하는 것을 최상의 결과로 이끌어내는 임무를 수행한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채도가 낮은 그린 컬러 벽과 체리색 원목으로 단장한 공간은 레트로적 분위기를 자아냈다. 실제로 조 폰티와 알베르토 포르탈루피, 루이지 카차 도미니오니 등 밀라노를 대표하는 건축가의 업적을 기리며, 그들의 전성기로 손꼽히는 1950년대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안젤로가 귀띔했다. 긴 통로에 놓인 피에트로 루소의 콘솔부터 이냐치오 가르델라가 디자인한 캐러멜색 암체어, 조 폰티의 카펫 등 107㎡에 걸쳐 적재적소에 배치한 빈티지 가구와 조명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치 탁월한 취향을 지닌 누군가의 저택을 방문한 듯 공간을 채운 오브제 하나하나를 둘러보는 즐거움이 넘쳤다. 금빛의 격자무늬 금속으로 장식한 문을 지나치자 마스터 테일러와 고객이 소통하는 공간이 이어졌다. 이냐치오 가르델라가 디자인한 원형 우드 테이블과 이코 파리시의 유선형 의자, 마시밀리아노 로카텔리의 금속 캐비닛이 놓인 그곳에서 비스포크 제작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듣기로 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옷을 손에 넣는 특별한 경험은 슈트와 셔츠뿐 아니라 스포츠웨어, 레더 제품, 니트와 슈즈 등 워드로브의 모든 아이템을 아우른다. 소재 역시 슈트와 재킷, 코트는 900개, 셔츠는 230개 이상의 패브릭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만큼 마스터 테일러와의 첫 만남은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후 신체 치수를 상세히 재고 이를 바탕으로 제작한 캔버스 옷으로 두 번째 만남을 갖는다. 그다음 피팅에서는 소매와 칼라가 없는 재킷이 준비되고 여기에 추가적 수정 사항을 반영할 수 있다. 이 피팅을 기점으로 3개월 후 최종 완성본을 받아볼 수 있는데 이때 역시 마지막 수정이 가능하다고. 장황한 설명 대신 눈으로 직접 확인할 것을 제안한 안젤로는 테일러 테이블이 위치한 곳으로 다가가 당시 작업 중인 한 고객의 주문서와 슈트를 펼쳐 보였다. 그 덕분에 채촌을 비롯해 가봉과 피팅 등 200여 단계를 거쳐 최소 75시간의 작업 시간이 소요되는 비스포크 슈트의 제작 과정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나만의 취향이 깃든 단 하나의 옷을 만나는 궁극의 호사. 이것이 바로 오랜 기다림의 가치를 아는 남자가 밀라노로 향하는 또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에르메네질도 제냐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곳
Trivero

1 원사 블렌딩 레시피를 기록해둔 아카이브.
2 카사 제냐의 2층의 기록 보관소에서 발견한 1960년대 제작한 1960년대 원단 샘플 아카이브 북.

1910년 에르메네질도 제냐는 울 섬유의 지속 가능성을 내다보고, 그의 고향인 이탈리아 트리베로에 울 공장 라니피시오 에르메네질도 제냐를 설립했다. 더불어 인근 주민에게 가공하지 않은 울 섬유를 최고급 울 원단으로 제작하는 수공 기술을 숙련하도록 장려했고, 울 섬유를 손수 선별하는 일을 시작으로 섬유에서 실과 원단이 탄생하기까지 노하우를 100여 년간 꾸준히 개발하고 보존해왔다. 이런 창업자의 열정과 철학은 아들인 알도 제냐, 안젤로 제냐에게 이어지며 꽃을 피웠고, 지속적인 사업 확장을 통해 세계적 브랜드로 성장했다. 호주산 메리노 울을 비롯해 비큐나와 알파카, 캐시미어, 모헤어 등 최고급 울 섬유는 지금도 라니피시오 제냐로 모여들고 있다. 이런 연유로 에르메네질도 제냐의 원단은 별다른 수식어 없이도 최고의 품질로 통한다. ‘Cloth–Ermenegildo Zegna’라고 쓰인 라벨 혹은 원단의 셀비지에 새긴 ‘Ermenegildo Zega–Made in Italy’가 까다로운 공정을 거쳐 생산한 제냐 원단의 품질에 대한 보증이기 때문이다.
에르메네질도 제냐의 뿌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면 트리베로에 가봐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 밀라노에서 차를 타고 북부로 2시간 30분가량 달려 비엘라시에 들어섰다. 그 후에도 라니피시오 제냐까지는 구불구불한 산간 도로를 달려 해발 700m까지 올라야 했다. 산길을 따라 수풀 사이로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산중이라는 것을 제하면 충분히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정비되어 있었는데, 이는 에르메네질도 제냐가 다양한 사회복지사업과 환경보호를 통해 트리베로 지방의 발전을 꾸준히 도모한 결과다. 라니피시오 제냐에 도착하니 뙤약볕이 내리쬐던 밀라노 도심의 뜨거움과는 달리 청명하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1930년대 양식의 건물과 유리 온실이 나란히 이어진 카사 제냐는 아카이브의 보고다. 4대째 이어온 제냐 가문의 전통과 문화유산을 기리고자 제냐 재단이 설립한 공간이다. 1층에 위치한 하비투스 제냐는 원재료 선택과 제품 생산 과정은 물론 에르메네질도 제냐 가문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는 다양한 설치미술 작품으로 채웠다. 최초로 사용한 로고, 원사 블렌딩 레시피와 패턴의 직조 방법 등을 손으로 꼼꼼하게 기록한 에르메네질도 제냐의 수첩 등은 브랜드의 기틀을 다진 창업자의 열정을 오롯이 품고 있었다. 대리석과 황동 난간으로 연결된 2층에는 기록 보관소가 있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작성한 각종 문서와 사진, 기술 도면, 샘플과 다양한 아카이브가 최상의 상태로 보관되어 있었다. 특히 스와치(원단 조각)와 그 소재에 담긴 기술 정보를 정리한 아카이브 북은 그야말로 에르메네질도 제냐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매개체였다. 기존의 것에 새로운 것을 더하거나 변형하는 식으로 소재 개발이 이뤄지는 것은 물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레산드로 사르토리 역시 이곳을 방문해 아카이브 북을 들여다보며 새로운 영감을 얻는다고.
트리베로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가장 중요한 직물 생산 지역으로 손꼽힌다. 탁월한 원단 생산 능력과 함께 제조 공정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물 등의 천연 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압도적 규모의 라니피시오 제냐에서는 섬유에서 옷이 되기까지 원단을 완성하는 전 공정이 이뤄진다. 가공하지 않은 울 섬유의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한 세탁과 코밍을 거쳐 부드럽고 순수한 울을 얻는다. 이후 타래에 돌돌 말아 방적사를 만들면 염색을 통해 섬유 각각의 개성을 입힌다. 여러 섬유 가닥이 모여 실로 변하는 방적 단계에서는 겨울철 모직물 직조에 이상적인 방모사나 두께가 일정하고 얇은 방적사로 나뉘어 생산한다. 이렇게 얻은 실은 정경 공정으로 이어진다. 원단의 수직 축을 이루는 경사의 길이와 밀도를 균일하게 하는 작업으로 사람의 손끝을 거치는 만큼 실에 대한 이해와 일정한 장력을 유지할 수 있는 감각이 요구된다. 직조 단계에선 얇은 실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직물의 모습을 서서히 드러낸다. 이렇게 완성한 원단은 품질관리 파트로 이동하고, 전량 사람의 손과 컴퓨터로 결함을 확인한다. 공장을 견학하며 가장 인상 깊었던 것도 바로 이 단계였다. 티끌만 한 결함도 검수를 통해 찾아내고, 다시 한번 전문 수선사의 손을 거쳐 그 결함을 완벽하게 보정하는 것. 이는 불량을 최소화하고 손실을 줄이기 위한 과정이자 신뢰와 직결되는 작업이기에 라니피시오 제냐 설립 당시부터 전문 수선 기술을 갖춘 오랜 경력자들만 일할 수 있었다. 퀄리티를 보증하는 라벨을 얻기 직전 직물은 선천적 특성과 장점을 끌어올리는 과정을 거친다. 울 섬유의 솜털을 제거하거나 풍성한 감촉을 위해 방모 직물의 솜털을 세우는 등 20~30단계의 공정에 이른다. 이때 자연 건조한 산토끼꽃 열매의 뾰족한 부분으로 원단을 부드럽게 세워 매끄러운 감촉과 광택을 낸다. 더불어 물을 이용해 섬유 본연의 부드러움과 밝기, 신축성을 되살린다. 그 때문에 원단 생산 최종 공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물이다. 라니피시오 제냐에서 사용하는 물은 해발 900m에서 솟아나며, 이탈리아 전역의 물 중 가장 가볍기 때문에 울의 자연적 특성을 변화시키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과연 백문이 불여일견. 탁월한 기술력을 지닌 인력과 기반 시설, 방대한 원단에 따른 맞춤 공정을 둘러보고 나니 브랜드의 오랜 명성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최고의 원단 생산에 일조하는 그들의 모습을 통해 세계에서 에르메네질도 제냐가 품질의 보증수표로 통하며 그 자리를 지켜갈 수 있는 원인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3 울 패브릭을 위한 전 공정이 이뤄지고 있는 라니피시오 제냐의 전경.
4 1930년대 양식 건물과 피에트로 포르치나이가 설계한 유리 온실이 연결된 카사 제냐.
5 피니싱 단계에서 사용하는 야생 산토끼꽃 열매. 완성한 원단을 빗어내 표면의 불술물을 제거하고, 매끄럽고 부드러운 감촉을 만든다.

 

에디터 정유민 (ymjeong@noblesse.com)
사진 제공 에르메네질도 제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