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와 현실을 넘나다는 이집트로의 여행
오페라〈아이다〉에서 오늘의 카이로까지, 이집트는 무대와 현실을 넘나들며 끊임없이 재현된다. 화려한 행진 뒤에 겹쳐진 제국의 시선과 욕망, 그 너머를 살펴본다.
2024년 12월 31일,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는 시즌 최고 기대작인 주세페 베르디 〈아이다〉의 새 연출을 그들이 자랑하는 제야 갈라 무대에 올렸다. 1988년부터 36년 동안 인기를 끈 소냐 프리셀의 압도적 무대를 교체하는 시도였다. 토니상 수상 연출자 마이클 메이어는 엘턴 존의 뮤지컬 〈아이다〉가 연상되는 한 쌍의 고고학자를 등장시켜 액자 구성을 만든다. 뮤지컬에서는 한 쌍의 연인이 박물관에 왔다가 깨어난 공주로부터 고대의 사랑 얘기를 듣는다. 세 사람은 사실 고대에 삼각관계였다. 과연 이 화려한 장면엔 무엇이 감춰져 있을까?
프랑스의 오귀스트 마리에트(Auguste Mariette, 1821~1881)는 현대 이집트학(Egyptology)의 아버지로 불린다. 마리에트의 사촌은 로제타석을 해석한 샹폴리옹의 친구였다. 그의 유품을 정리하다 이집트에 눈뜬 마리에트는 루브르박물관의 용역으로 발굴을 시작했다. 세라피움과 스핑크스 하부 신전, 단다라와 에드푸 신전을 발견한 그에게 1858년 이집트 정부는 문화재청장직을 맡긴다. 이집트가 고고학 발굴을 독점하고 모든 유물을 관리하는 역할을 외국인에게 맡긴 이유는 마리에트가 ‘그 나라 유물은 그 나라에’라는 원칙을 주창했기 때문이다. 근절된 것은 아니지만, 마리에트 이후 이집트 유물의 도굴과 해외 유출은 줄었다.
1869년에는 이집트와 유럽의 숙원 사업이던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었다. 총독 이스마일 파샤는 베르디에게 기념 오페라를 위촉했고, 이때 마리에트는 〈아이다〉의 뼈대가 될 줄거리를 제공했다. 1871년 크리스마스이브에 카이로에서 〈아이다〉가 초연될 때 마리에트는 의상과 무대를 제작, 감독했다. 〈아이다〉의 시간적 배경은 이집트가 에티오피아를 정복한 기원전 1000년대 신왕국이다. 이집트 장군 라다메스는 노예로 끌려온 에티오피아 공주 아이다와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아이다가 모시는 이집트 공주 암네리스도 라다메스를 흠모한다. 에티오피아와 치른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라다메스는 포상으로 암네리스 공주와 결혼하라는 명을 받는다. 그는 아이다와 도망가려다 군사기밀을 누출한 죄로 붙잡혀 생매장된다. 아이다는 라다메스의 무덤에 숨어 들어가 연인과 함께 죽는다. 카이로 국립박물관 정원에 자리한 마리에트의 무덤 곁을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친다.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팔레스타인 출신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 1935~2003)는 영국령 예루살렘에서 태어나 카이로에서 성장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학위를 받고 컬럼비아 대학교 비교문학 교수가 되었다. 1978년에 발표한 <오리엔탈리즘>은 서양 문화의 제국주의적 뿌리를 비판한 역저다. 찰스 디킨스, 조지프 콘래드, 러디어드 키플링, 앙드레 지드 그리고 주세페 베르디의 대표작이 의도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제국주의의 시각을 담았으며, 그것을 더욱 굳히는 데 일조했다는 내용이다. 그는 오페라 〈아이다〉가 이집트의 에티오피아 침략을 통해 한 번, 그리고 19세기 유럽의 이국적 소재 탐닉을 통해 또 한 번 제국주의를 조장했다고 주장한다. 대부분 관객이 하이라이트로 꼽는 ‘개선 행진곡’에서 노예들의 춤과 전리품 전시는 숱한 희생의 대가이며, 사이드는 이를 오리엔탈리즘이라 불렀다. 사이드의 주장은 당시로서는 매우 충격적이라 많은 서양 대학이 과 이름에 들어가는 ‘동양(oriental)’이란 단어를 바꿀 정도였다.
사이드의 의도는 그가 예로 든 작가와 예술을 제국주의로 매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알게 모르게 진행된 오리엔탈리즘을 ‘발굴’해 새로운 창작으로 극복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생각을 실천에 옮겨 이스라엘 출신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과 손잡고 서로 으르렁대는 아랍과 이스라엘의 젊은 음악가를 모아 ‘서동시집 오케스트라(West-Eastern Divan Orchestra)’를 창단했다. 정치로 해내지 못한 일을 예술로 이루자는 데 의기투합한 것이다. 사이드가 죽은 뒤에도 바렌보임과 서동시집 오케스트라는 고군분투 중이다.
번스타인과 두 테베
한참 거슬러 올라가, 미국이 자랑하는 작곡가이자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은 1973년 모교 하버드 대학교의 ‘노턴 석좌 강의’에 강사로 초대받았다. 앞서 T. S. 엘리엇, 로버트 프로스트,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같은 최고 석학과 예술가가 자신의 업적과 사상에 대해 여섯 차례 공개 강의한 명예로운 자리였다. ‘대답 없는 질문’이라는 제목의 강연 마지막 시간은 다소 뜬금없이 〈아이다〉에 나오는 ‘노예들의 춤곡’으로 시작한다. 번스타인이 “값싸고, 수준 낮고, 감상적인 멜로드라마이며 번지르르한 오점투성이 작품”이라고 깎아내리기를 서슴지 않은 〈아이다〉로. 그는 1시간 30분에 걸친 방대한 문예사론으로 청중을 질리게 만든 뒤 “마침내 우리는 스트라빈스키의 〈오이디푸스왕〉들을 준비가 되었다”라고 말한다. 앞선 모든 강의가 결국 한 작품을 위한 전제였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오이디푸스왕〉을 이끄는 핵심적 모티브가 어디에서 왔는지 추적한다.
그가 일주일 동안 생각나지 않아 고민하다 마침내 떠올렸다는 정답, 곧 스트라빈스키가 자신의 〈오이디푸스왕〉 모티브를 가져온 곳은 베르디의 〈아이다〉 중 가장 깊숙한 부분이었다. 그것은 ‘권력’을 지닌 암네리스에게 아이다가 ‘연민’을 호소하는 부분이다. 분명 ‘청아한 아이다’, ‘이기고 돌아오라’, ‘개선 행진곡’처럼 청중이 열광하는 곡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번스타인은 스트라빈스키가 당대에 너덜너덜해진 〈아이다〉에서 빌린 ‘권력과 연민’의 모티브를, 테베 백성의 역병 퇴치 탄원이나 갈등의 한가운데에서 고뇌하는 요카스테 왕비, 진실에 다가갈수록 죄어오는 운명을 예감하는 오이디푸스의 노래에 적용한 탁월한 재주에 탄복한다. 그에게 작곡가가 의도했는지, 우연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는 언어와 음악의 의미가 공존하는 차원 높은 예술의 발현이었다.
나는 스트라빈스키가 철저히 의도했다고 생각한다. 음악적 고고학의 일인자인 그는 거의 도굴꾼처럼 시침 떼고 고전을 빌려 쓰곤 했다. 번스타인이 계시처럼 두 작품의 연관성을 발견하고 기뻐한 것처럼 나도 문득 두 이야기가 공유하는 접점을 발견하고 무릎을 쳤다. 오이디푸스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었다는 얘기를 듣는 사람은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이집트의 거상을 떠올릴 것이다. 인터넷이나 구글 지도가 없던 시절엔 나도 오이디푸스의 테베라는 지명을 무심결에 이집트 부근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다〉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리스와 이집트에는 각각 테베가 있다. 아테네 북서쪽의 테베가 오이디푸스의 배경이라면, 오늘날 룩소르로 불리는 이집트의 테베는 그리스인이 붙인 명칭이자 바로 〈아이다〉의 무대다.
이집트 관광은 더 이상 애거사 크리스티의 〈나일강의 죽음〉처럼 상류층의 전유물이 아니다. 한국과 일본 관광객이 가까운 만리장성과 장자제를 찾듯이 이집트는 유럽인의 값싸면서 이국적인 관광지였고, 이제는 지구 반대편에서도 인파가 몰려든다. 나일강에는 유람선 수백 척이 기차처럼 줄지어 운항하고 겹겹이 정박한다. 십수 년 전만 해도 백인 가수가 얼굴에 검은 화장을 하고 메트 오페라에 섰다면, 이제는 그런 인종 편견에 반박해 베로나 축제를 거부했던 흑인 소프라노가 메트의 아이다로 호평받는다. 그러나 관객은 새롭고 화려한 영사(映寫)로 단장한 ‘개선 행진곡’에 여전히 열광한다. 오리엔탈리즘이 줄기는커녕 전 세계로 퍼졌다. 문명의 발상지 이집트는 다시 깨어날 수 있을까? 묻지도 않고 내 스웨터를 말아 터번을 만든 뒤 머리에 씌운 카이로의 호객꾼이 10달러를 달라고 생떼를 쓴다. 다행히 지갑엔 1달러뿐이다.
에디터 김수진(jin@noblesse.com)
글·사진 정준호(문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