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너머의 무대
조명이 비추고 우리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무대 위. 하지만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가장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세계는 바로 어둠 속에서 또 하나의 예술 창작이 이루어지는 백스테이지다.
공연이 막을 내린 후 다음 프로덕션을 준비하는 로열 오페라하우스 무대
아리아를 부르며 목을 풀고 있는 어느 성악가의 소리가 대기실 문틈으로 새어 나온다. 그리고 잠시 후, 복도에서 테너 헤수스 레온과 마주치는 뜻밖의 행운이 이어졌다. 지난 10월 국립오페라단의 오페라 <진주조개잡이> 개막 하루 전날 진행한 백스테이지 투어 현장이다. 공연 시작 전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무대에 올리는 연습 공연을 제너럴 리허설(general rehearsal)이라 한다. 국립오페라단은 유료 회원을 포함한 오페라 애호가들을 초대해 본 공연과 똑같은 조건에서 공연하는 제너럴 리허설을 공개했다. 다른 관객보다 공연을 일찍 관람할 수 있는 특권을 선사한 것. 공연 관람 전에는 백스테이지 투어를 마련해 무대감독을 포함한 스태프들이 관객을 이끌고 무대 뒤편의 각 시설을 소개했다. 객석에서는 보이지 않는 오케스트라 피트에 직접 들어가보는 것을 시작으로 출연자들의 대기실과 분장실, 의상실 등을 둘러보고 완성된 세트를 설치한 무대 위에 올라 무대장치의 구조와 기술에 대한 설명을 듣는 순서가 이어졌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 구역인 무대 뒤편을 돌아보는 백스테이지 투어는 한국에선 쉽게 누릴 수 없는 기회지만, 해외 유명 오페라하우스에서는 하루에도 수차례씩 진행하는 인기 프로그램으로 상품화되어 있다. 런던 코번트 가든에 자리한 로열 오페라하우스는 백스테이지 투어가 가능한 날이 한 달에 절반 정도이며, 적게는 하루 2~3회부터 많게는 5~6회까지 진행한다. 5개월 정도의 스케줄을 미리 공개해 온라인으로 원하는 날짜와 시간을 예약하고 결제할 수 있는 시스템. 이곳은 로열 오페라단과 로열 발레단의 전용 공연장으로, 프로덕션이 항상 진행 중이기 때문에 방문 기간에 어떤 공연이 무대에 오르느냐에 따라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 창문을 통해 발레단의 연습 장면을 잠시 감상하거나 무대보다 몇 배나 넓은 공간에서 운영하는 놀라운 기술 장치들을 확인하고 설명을 듣는다. 공연을 준비 중인 장소인 만큼 사진 촬영이 금지되고, 휠체어 이용자들이 아무런 불편 없이 함께 투어할 수 있다는 것이 로열 오페라하우스 백스테이지 투어의 특징.
백스테이지 투어를 통해 볼 수 있는 화려한 무대의상

로열 오페라하우스의 가발과 분장 담당 아티스트 멜라니 부베 (Melanie Bouvet)가 가발 스타일링을 하는 모습

로열 오페라하우스의 염색팀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염료
세계 오페라하우스 중 화려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파리의 오페라 가르니에는 웅장한 계단과 샤갈이 그린 천장화가 있고 <오페라의 유령>에 영감을 준 장소로 유명해 공연을 관람하지 않더라도 극장 내부를 보기 위해 찾는 사람이 많다. 이곳의 백스테이지 투어도 눈여겨볼 만한데, 프랑스어 또는 영어로 90분간 진행하는 프로그램으로 역사와 건축미에 대해 설명하고 화려한 무대의상을 제작하는 공간까지 공개한다. 또 요청에 따라 프라이빗한 식사를 곁들인 특별 이벤트를 구성해주기도 하는데, 이런 프라이빗 투어의 경우 구성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
유럽의 오페라하우스가 공연 제작 과정과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면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의 백스테이지 투어는 시설 위주로 소개하는 고급스러운 관광 상품에 가깝다. 12명 이하의 그룹을 만들어 매일 아침 7시부터 2시간 정도 공연장 구석구석을 돌아본다. 투어가 끝나는 9시쯤에는 공연 관계자들이 이용하는 레스토랑에서 미리 주문해둔 아침식사를 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가격은 170달러 정도.
백스테이지 투어에서 무대 뒤편의 어디까지 볼 수 있느냐는 결국 시설을 어느 정도 갖추었는가와 오페라 전용 극장인지 여부에 따라 다르다. 세계적 오페라하우스는 자체 제작 시스템을 갖춰 극장 내부에 의상 제작소와 소품 제작소를 두고 있으며 의상팀, 신발팀 등 세분화한 제작팀이 상주한다. 당연히 백스테이지 투어를 통해 공연 시설뿐 아니라 작품 제작 과정까지 확인할 수 있다. 의상을 만드는 과정은 물론이고 가발팀이 파마를 하거나 염색팀이 옷감과 슈즈를 염색하는 장면까지 볼 수 있어 볼거리가 풍부하다. 물론 세트나 의상 보관 창고처럼 넓은 공간이 필요한 시설은 공연장에서 떨어진 곳에 별도로 마련해두고 있다. 백스테이지가 흥미진진하다는 것은 그만큼 각 분야 무대예술가의 활동이 활발하고 공연 인프라를 잘 갖춘 것으로 해석해도 좋다.
한국의 무대 뒤편은 어떨까? 우선 세트 보관소는 해외 오페라하우스와 마찬가지로 경기도 광주, 용인, 여주 등 서울 도심을 벗어난 지역에 따로 자리한다. 차이점은 자체 제작 시스템이 없어 무대에 필요한 대부분의 것을 외부 업체에 제작 의뢰한다는 사실. 국내에서 오페라 극장을 갖춘 곳은 예술의전당, 성남아트센터, 대구오페라하우스, 고양아람누리 정도를 꼽을 수 있는데 오페라단은 이 극장을 대관해 공연한다. 전용 극장은 물론이고 자체 합창단과 오케스트라까지 갖춘 해외의 오페라단과 비교하면 무대예술을 기반으로 마련할 수 있는 콘텐츠에 한계가 있는 것.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이렇듯 열악한 환경에도 최근 몇 년간 국내 초연작이나 해외 무대에 선 창작 공연 중 호평을 받은 작품이 많다는 사실이다. 현재 변화하고 있는 무대예술의 트렌드를 한국 무대에서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국립오페라단의 김강준 무대감독은 “전문 인력의 양성으로 한국에서도 최근의 흐름을 반영한 무대를 구현하고 있다. 예전에 그림을 그린 막을 세트로 사용했다면 요즘은 주로 판에 조각을 하며, 영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세트를 대신하는 효과를 내기도 한다. 최근에는 모던하고 미니멀한 무대가 트렌드”라고 설명한다. 작품 자체는 고전이라도 이를 해석하는 연출가와 그것을 구현하는 무대예술가가 현시대성을 반영해 재해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12월 9일부터 12일까지 공연하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역시 최소화한 세트에 강렬한 컬러 대비를 보여주는 2014년 뉴 프로덕션 작품.
연출가가 해외에서 내한하고 무대 디자이너가 원안을 가지고 오더라도 우리의 무대 상황에 맞게 제작하는 것은 공연이 이루어질 현장의 국내 인력이 담당해야 할 몫이다. 무대 위의 화려함을 창조하는 것은 결국 백스테이지에서 활약하는 예술가들. 쉽게 만나기 힘들던 대형 오페라 공연이 자주 무대에 오르는 요즘, 무대 아래의 세계를 엿보고 나면 공연이 2배로 풍성해 보일 것이다. 라이브 공연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막을 내리지만 무대에 올리는 단 몇 시간을 위해 수많은 인력이 오랜 시간 만들어가는 것이 바로 백스테이지, 무대 아래의 예술이다.
에디터 안미영 (myahn@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