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엘 브란돌리니의 내밀한 상상 세계
파리 7구의 조용한 교회 광장 앞에 자리한 한 아파트. 전형적인 오스만 양식 건물 안에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마법 같은 공간이 존재한다.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세계적 인테리어 디자이너 뮤리엘 브란돌리니의 유럽 거점이자 그녀의 감각적 미감이 응축된 ‘자서전’ 같은 공간이 이곳에 있다.

반투명 금색 블라인드를 통해 들어오는 은은한 자연광으로 부드러운 분위기가 감도는 거실. 나다 뎁스의 테이블 주변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가 소유했던 안락의자 2개, 벼룩시장에서 구입해 직접 원단을 바꾸고 아프리카 장식을 더한 의자 2개가 놓여있다.
뮤리엘 브란돌리니(Muriel Brandolini)가 지닌 다국적 배경은 그녀의 인테리어 스타일을 그 자체다. 베트남 호찌민에서 태어나 프랑스, 베네수엘라, 마르티니크, 미국 등지를 거친 인생 여정은 특유의 미학에도 깊이 스며 있다. “제 삶은 색과 패턴, 텍스처의 혼합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저를 한마디로 설명하면 ‘믹스(mix)’라는 단어가 어울리겠네요.” 브란돌리니의 이러한 정체성은 파리 아파트 안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난다. 시대나 유행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삶의 경험과 여행의 기억 같은 것을 디자인 재료로 한 공간은 매우 개인적이고 시적이다.
이 아파트는 사실 브란돌리니의 계획에 없던, 우연의 산물과도 같은 장소다. 이곳을 마련하기 전 파리에 들를 때면 항상 리츠 호텔에 묵었는데, 2012년 호텔이 레노베이션을 위해 문을 닫는 바람에 다른 머물 공간이 필요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들른 부동산 사무소에서 한 아파트를 소개받았고, 보자마자 ‘이곳’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남편과 단둘이 사용하기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규모, 4.5m의 높은 천장, 여러 개의 창문으로 들어오는 풍부한 햇빛, 그리고 무엇보다 고요한 기운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고민 없이 바로 집을 계약했다. “공간을 처음 접하면 어떤 판단도 하지 않고 그곳의 공기와 분위기를 있는 그대로 느끼는 편이에요. 그리고 그 느낌은 거의 틀린 적이 없습니다.”
직접 진행한 인테리어에서도 가장 중요시한 것은 정서적 리듬이었다. 정해진 계획 없이 직관적으로 결정한 가구 배치, 색 조합, 텍스타일 사용은 직감으로 완성된 아름다운 결과물이다. 거실만 봐도 저마다 다른 개성을 뽐내는 가구들이 모여 신기하게도 하나의 통일된 리듬으로 연결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전적 곡선이 강조된 빈티지 암체어, 아프리카 프린지 장식이 달린 의자, 그리고 화려한 패턴의 패브릭을 입은 소파와 쿠션 중심에는 레바논 디자이너 나다 뎁스의 모던한 접이식 테이블이 놓여 있다. “저는 오브제를 시대나 작가 이름을 고려해 선택하지 않아요. 형태와 감각이 맞으면 그걸로 충분하죠.”

왼쪽 19세기 파고다 침대, 옆에는 미셸 오카 도너가 만든 청동 테이블이 놓여 있다.
오른쪽 복도 책장 앞에 놓인 의자는 이탈리아 디자이너 프랑코 라지의 1980년대 작품.
가구나 소품을 고를 때 개성과 형태의 순수함을 우선시한다는 그녀는 “이 집에 유명 디자이너의 제품만 있을 거라는 생각은 완전한 착각”이라고 말한다. 벼룩시장에서 발견한 50유로짜리 램프부터 친구이자 유명 디자이너인 에르베 반 데르 스트레텐이 그녀만을 위해 특별 제작한 조명, 뉴욕의 조형예술가 미셸 오카 도너의 청동 테이블 등 철저히 브란돌리니 특유의 취향에 맞춰 선택된 물건으로만 채웠기 때문이다. 이 중에는 유럽의 앤티크 제품도, 아시아 공예품도, 그녀가 직접 디자인한 커스텀 아이템도 있다. 특히 가장 눈에 띄는 건 다채로운 텍스타일이다. “텍스타일은 제게 감정의 연장선이에요. 그 자체를 정말 좋아하는 데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라는 직업도 텍스타일에서 시작됐죠. 오래전 뉴욕에 사는 친구의 아파트를 빌려 머문 적이 있는데, 인테리어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친구에게 페인트를 다시 칠해도 되느냐고 물으니 허락하지 않더군요. 그래서 값싼 패브릭을 구입한 뒤 커튼을 만들어 달거나 가구를 감싸는 등 나만의 스타일로 꾸민 것이 지금의 저를 있게 한 거죠. 텍스타일은 공간을 따뜻하게 하고, 시간의 결을 담아내는 마법 같은 소재예요.”
소파 위에는 뭄바이 자수 장인이 만든 쿠션이, 침실에는 장 프랑수아 르사주가 제작한 정교한 쿠션과 이불이 놓여 있다. 거실 창문에 걸린 반투명한 직물로 제작한 블라인드는 자연광을 걸러내며 실내 전체에 황금빛 안개 같은 분위기를 선사한다. 거실과 바로 연결되는 방에는 19세기 포르투갈식 파고다 침대를 배치해 연극 무대 같은 느낌을 연출했다.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거나 책을 읽기 위한 휴식 공간에 이탈리아 별장에서 직접 공수한 파고다 침대를 배치한 것은 그녀다운 선택이었다. 우아하고 비대칭적인 선이 동양적 기운을 느끼게 하는 침대 위에 중국에서 구입한 실크 수공예 원단을 배치해 아시아와 라틴풍 감각이 교차하는 브란돌리니의 아이덴티티를 대변하는 듯한 공간을 연출했다.
“파리는 제게 두 번째 고향이에요. 가족과 연결돼 있는 데다 감성적으로 안정감을 주죠. 뉴욕이 일하고 달리는 곳이라면, 파리는 한 템포 쉬거나 삶을 재정비하는 곳이에요” 그녀는 이 공간을 단순한 휴식처 혹은 출장 중 머무는 ‘피에아테르(pied-a-terre, 임시 숙소)’라기보다는 ‘감정의 베이스캠프’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이 아파트에 머무는 대부분의 시간은 창가에 앉아 글을 쓰거나 도면을 그리고, 새로운 컬렉션의 색 조합을 실험하는 데 쓴다. 물론 친구들도 자주 초대한다. 벼룩시장에서 직접 고른 접시로 손님을 위한 테이블을 차리는 일은 그녀가 열정을 쏟는 활동 중 하나다.
벽지 하나도 기성품이 아닌 직접 컬러를 개발해 인도에서 커스텀 제작한, 그야말로 본인의 취향이 완벽하게 반영된 아파트에는 뮤리엘 브란돌리니가 살아온 시간, 경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여행지에서 모은 수집품, 오래된 가족사진, 직감적으로 고른 가구, 이 모든 것이 겹겹이 쌓인 이곳은 그녀만의 기억으로 꾸민 특별한 무대이자 한 창작자의 내면을 담은 전시장이다. 그녀는 공간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 세상과 연결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창작의 중심에는 직관적 레이어링이 있다. 오롯이 감각에 기대 작업하는 방식은 팬톤 컬러 색상표나 올해의 디자인 트렌드 같은 정해진 틀을 완강하게 거부한다. “진정한 스타일은 공감에서 시작된다고 믿어요.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방법은 일상에 감정을 끌어들이는 것이죠. 저는 이 집에서 다양한 감정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왼쪽 식탁과 의자, 접시까지 모두 빈티지다.
오른쪽 거실에 놓인 다양한 형태와 시대적 배경을 가진 의자들.
에디터 김수진(jin@noblesse.com)
글 양윤정
사진 임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