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코 본질
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 궁중 음식 기능보유자’인 한복려 궁중음식연구원 원장을 만나러 가는 아침, 기분 좋은 소식을 접했다. 전날 발표한 ‘2015 제8회 올해의 여성문화인상’ 수상자로 그녀가 선정되었다는 것. 우리나라의 문화발전과 여성 문화인의 창작 환경 조성에 기여한 우수 여성 문화인을 발굴하는 이 상의 수상 배경은 이렇다. “궁중 음식 전수 교육과 재현, 관련 연구서 저술 및 경복궁 소주방 복원 자문, 궁궐 생활문화 콘텐츠 발굴 등 활발한 활동으로 한국 전통문화를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다.”
궁중음식연구원은 전통 식문화 연구의 종가로 창덕궁 옆 원서동에 호젓하게 자리잡고 있다.
가사노동의 효율성을 무섭게 따지고 드는 요즘 사람들에게 ‘중요무형문화재’나 ‘조선왕조 궁중 음식 기능보유자’라는 단어의 무게감은 그리 크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궁중 음식은 우리가 가정에서 먹는 민속 음식이나 향토 음식과 달라 각 가정에서 세습될 수 없고, 그 가치도 현저히 차이가 나 국가적 차원에서 보호와 관리가 필요한 분야다. 이런 이유로 궁중 음식은 무형문화재 등의 등재가 필요했고, 국가에서는 1971년 ‘조선왕조 궁중 음식’을 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하는 동시에 조선시대 마지막 주방 상궁인 한희순 상궁(1889~1972년)을 1대 기능보유자로 인정했다. 한복려 선생의 어머니인 황혜성 선생은 한참 전인 1944년부터 낙선재 소주방에서 한희순 상궁에게 30년 가까이 궁중 음식 조리법을 전수받고 있던 상황. 한희순 상궁이 별세하면서 황혜성 선생이 2대 기능보유자로, 다시 2007년 한복려 원장이 3대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궁중 음식 전수 교육은 물론 더 나아가 전통 음식과 문화의 접목에 힘쓰고 있다.
황혜성 교수의 맏딸로 1970년대부터 어머니에게 조선왕조 궁중 음식을 전수받은 한복려 원장은 2000년 남북 정상회담, 2005년 부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등 중요 국가 행사에서 만찬과 디저트 메뉴 등을 자문하기도 했다. 그녀가 더욱 유명세를 탄 건 2004년 MBC 특별 기획 드라마 <대장금>에서 선보인 궁중 음식을 재현하면서. <대장금> 촬영은 1년 내내 다음 날 촬영할 대본이 전날 자정이 되어서야 나오는 힘든 일정이었지만 ‘궁중 음식을 대중에게 제대로 알리겠다’는 사명감으로 임했고, 대중 역시 드라마를 통해 우리의 전통 궁중 음식에 한발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이외에도 한국문화재보호재단 이사, 한국관광공사 명예 홍보대사, 궁중 의례 재현 전문 위원, 한식재단 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하며 궁중 음식 전수 교육은 물론 다양한 저술과 학회 활동을 통해 궁중 음식과 전통 음식을 널리 알리는 한복려 원장을 추경이 절정에 달한 10월 초 고즈넉한 궁중음식연구원에서 만났다.

우선 2015 올해의 여성문화인상 수상자로 선정된 걸 축하드립니다. 무엇보다 후배 양성과 교육, 음식과 생활문화 콘텐츠 발굴을 높이 평가받은 것이라 그 의미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네. 그동안 궁중 음식을 문화라는 큰 틀 안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할지, 음식 문화와 다른 장르의 문화를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까 연구하면서 제 할 일을 한 것뿐인데 문화 경쟁 시대를 맞이하면서 제가 이런 상을 받게 된 것 같습니다.
원장님 성함 앞에는 ‘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 궁중 음식 기능보유자’라는 긴 타이틀이 늘 따라다닙니다. 원장님께 그 타이틀은 어떤 의미인가요? 그 타이틀은 ‘시대가 나에게 준 임무’라고 봐요. 다음 세대는 저 대신 다른 누군가가 그 타이틀을 갖게 되겠죠. 그래서 저는 ‘내가 지금 누군가를 대신해 그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사명감과 의무감은 자연스럽게 따라오게 되어 있죠.
조선왕조 궁중 음식 기능보유자가 현재 선생님을 포함해 두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1대가 한희순 상궁, 2대는 황혜성 선생님, 그다음이 저희예요. 2대까지는 한 분이었는데, 3대부터는 궁중 음식도 전문화되고 세분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궁중 병과와 궁중 음식이 나뉘었어요. 그중에서 저는 궁중 음식 기능보유자죠.
궁중 병과 기능보유자는 정길자 선생님인데, 두 분이 어떤 과정을 거쳐 선정되신 건가요? 보유자로 누구를 선정할지 어머니께서 고민이 많으셨어요. 자식 중 하나, 제자 중 하나를 놓고 그 중 한 명을 지명해야 했으니까요. 어머니는 늘 저희에게 “너희는 우의정과 좌의정이다. 저울로 재면 똑같다”고 하셨거든요. 속으로 걱정을 많이 하셨는데, 다행히 종목이 나뉘면서 각자 ‘궁중음식연구원’과 ‘궁중병과연구원’을 따로 맡아 운영하고 있습니다.
추석, 설과 같이 전통 명절을 앞둔 시기에는 더 분주하신 것 같습니다. 지난 추석에도 방송을 비롯해 다양한 프로그램과 행사에 모습을 비치셨잖아요. 제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이 맞는지 늘 생각해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제가 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제가 그 일을 해서 음식 문화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면 대체로 수락하는 편입니다.
추석 즈음 국립국악원에서 주최한 ‘토크 콘서트’에서 유서 깊은 우리 음식과 문화에 대해 들려주셨습니다. 관객의 반응은 어땠나요? 그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유는 다른 문화 예술 장르와 음식이 어떻게 융합할 수 있는지, 음식과 문화가 둘 다 어떤 방식으로 돋보일 수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에요. 궁중 음악과 춤을 감상하면서 궁중 음식 이야기를 듣는 것 역시 시대가 요구하는 융·복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토크 콘서트는 ‘사랑방’을 테마로 마치 가족이 빙 둘러앉은 것 같은 편안한 분위기에서 진행해 더욱 좋았어요.
주로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셨나요?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명절 제사나 문화에 대해 바로잡아줬어요. 무엇보다 재미있는 건 정월부터 12월까지 각 계절에 맞는 재료로 빚어낸 범벅을 노래한 범벅타령과 판소리 <흥부가>, <춘향가> 등을 이용해 토크 콘서트를 진행한 국립국악원의 기획이었어요. <흥부가>중에는 흥부가 잘살게 되어 흥부 부인이 상을 이렇게 잘 차렸다는 내용이 실제로 나오거든요. 가사를 프린트해 나눠주니 관객들 역시 이해하기 쉬울 수밖에요. 그들을 위해 떡과 차를 준비한 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인 ‘조선왕조 궁중 음식’을 전수하는 궁중음식연구원은 1971년 설립되었다.
드라마 <대장금>의 요리 자문을 하셨죠. 궁궐 주방의 모습과 다채로운 요리 등 볼거리가 매우 풍부했습니다. 작가가 구상한 요리를 보면서 오류를 잡아내고 대안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자문하셨다고요. 끝마치고 나서 아쉬운 점은 없었나요? 완벽할 수는 없죠. ‘지금 한다면 그렇게 안 할 텐데’ 하는 것도 있어요. 하지만 방송을 통해 궁중 음식을 보여줄 수 있었다는 것에 만족합니다.
촬영 현장에서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아요. 대본에는 보통 간단한 설명만 나와요. ‘왕비의 생신상을 차린다.’ 이 정도만 적혀 있죠. 그러면 저와 연구생들은 조선시대에 왕비의 생신상을 어떻게 차렸는지 다시금 기록을 들춰보며 준비를 해요. 가끔 작가가 요리에 대해 몰라 잘못 쓴 대본은 우리가 급히 바꿔야 했어요. 한 예로 대본에 추석을 맞아 대왕대비가 만두 요리 심사를 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작가는 만두피를 밀가루 말고 다른 무언가로 만들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주렁주렁 열린 단호박으로 만두피를 만든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단호박은 마구 으깨져서 만두피를 만들 수 없거든요. 급하게 다른 재료를 찾아봤는데 박이 있었어요. 근데 그걸로 당장 음식을 만들 수 없으니 수박을 사다 빨간 부분을 다 파낸 뒤 껍질 쪽 푸른 부분을 잘라 촬영한 적이 있어요. 대본도 그렇게 바뀌었죠. 대왕대비가 심사를 하면서 “초가지붕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박으로 만두를 빚었으니 백성들도 잘 해 먹을 수 있겠구나”라고 평가하는 장면으로요.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의 만찬, 2005년 부산 APEC 영부인 오찬 등 국가 행사의 음식 자문과 지도를 맡으셨습니다. 그런 중요한 행사는 준비 기간도 매우 길겠죠? 큰 행사는 참여하는 호텔 등의 업체와 함께 몇 달 전부터 준비를 하는데, 메뉴를 다 정해놓더라도 경우에 따라 무산되는 상황이 많아요.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은 제가 다 맡아 할 수 있어서 수월했어요. 호텔 한 식당의 셰프들을 모아 잘 분담했고, 진행이 순조로웠기 때문에 지금도 크게 만족하는 행사 중 하나입니다.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의 유명 셰프를 만날 기회도 많으시죠? 몇 년 전 한국을 방문한 피에르 가니에르에게 한식을 소개할 기회가 있었어요. ‘이런 유명한 셰프에게 한식을 제대로 알리면 한식이 세계적으로 뻗어나가는 데 도움이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어떻게, 무엇을 알릴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그에게 보여준 것이 독상이에요. 한국의 전통 상차림은 독상, 즉 혼자 먹는 외상입니다. 밥, 국, 김치를 비롯한 반찬을 정갈하게 차려놓고 혼자 앉아 먹는 거죠. 그래서 실제로 연구원에서 돗자리를 깔아 독상을 차려주곤 피에르 가니에르를 바닥에 앉혔어요. 덩치 큰 외국인이 처음으로 바닥에 앉아 밥을 먹어야 했으니 당연히 불편했겠죠. 그러나 저는 우리 문화를 제대로 알리는 데 상대방의 불편한 점까지 배려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아주 잠깐이니까요. 한국 사람은 상을 이렇게 놓고 이쪽으로 앉아 이런 방식으로 밥을 먹는다는 것을 제대로 알려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서양은 동물성 기름, 우리는 식물성 기름을 사용해 나물을 무치고 음식을 한다. 이 작은 상 안에 모든 한국 음식이 있다”고 설명하니 선뜻 이해하더군요.

고종과 순종을 모셨던 마지막 수라상궁 한희순(제 1대 기능보유자, 왼쪽 사진)과 한복려 원장의 어머니 황혜성 선생(제 2대 기능보유자, 오른쪽 사진)
최근 퓨전 한식을 선보이는 젊은 셰프가 많습니다. 해외에 성공적으로 진출한 사례도 있는데, 선생님도 퓨전 한식을 즐겨 드시나요? 저도 종종 먹어요. 미식 모임이 있는데, 그들과 함께 가기도 하고, 젊은 사람들의 트렌드는 어떤지 궁금하기도 해서요.
전통 한식과는 많이 다를 텐데, 어떤가요? 시대가 달라지는데 전통 방법만 고집하라는 건 무리가 있어요. 결국 어떻게 스타일을 바꾸느냐가 관건인데, 여기서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해요. 내 세대가 음식을 공부할 때는 플레이팅이나 데커레이션을 따로 배우지 못했어요. 색채감이나 미감이 아무래도 요즘 사람에 비해 부족하죠. 자라면서 그런 걸 볼 기회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최근 외국에서 공부한 젊은 셰프들은 그런 장식적 요소를 잘 다뤄요. 문제는 디자인을 메인으로 하고 거기에 한식을 집어넣으려 하는 거죠. 보이는 것에 치중하는 느낌이랄까요? 그런 음식을 보면 한식의 본질이 사라진 걸 느끼게 됩니다.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한국 음식의 본질은 뭔가요? 본질이라는 것은 식자재와 장맛이라고 할 수 있어요. 특히 한국 음식은 장맛이죠. 나물을 비롯해 대부분의 음식이 처음부터 재료에 장을 섞어 맛을 내거든요. 장이 식자재에 배면서 맛을 내죠. 근데 서양 음식은 달라요. 재료와 소스가 별개예요. 스테이크 위에 소스를 뿌린다거나, 아예 음식과 소스가 따로 나와 먹는 사람이 섞는 경우가 많죠.
최근 방송 채널마다 남성 셰프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선생님 시절에는 남자 요리사가 거의 없었죠? 그 당시는 여자도 요리를 업으로 생각하는 개념조차 없을 때예요. 현모양처가 되려면 음식을 잘해야 한다더라 하는 인식만 있었죠. 요즘은 방송 매체에서 워낙 셰프들을 마케팅 차원에서 부추기다 보니 시청자도 어떤 셰프가 훌륭한 셰프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오죽하면 연예인 조리사를 만드는 과가 생겼을 정도겠어요.
방송을 통해 집에서 요리를 시도하는 시청자가 늘었지만 여전히 젊은 사람들 사이에선 외식의 비중이 큽니다. 외식에 의존하는 요즘 젊은이들을 어떻게 보시나요? 우선 요즘 젊은이들은 가사노동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면 몇 배의 효용이 있다고 판단하는 거죠. 그런데 우리가 ‘음식을 한다’는 것을 여러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어요. 단순히 먹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요리는 자신을 안정시키는 매개가 되기도 합니다. 또한 어린아이에게는 가족에 대한 기억, 엄마에 대한 추억을 안겨주죠. 음식은 단순히 맛이 아니에요. 그 맛에 수많은 기억과 추억이 깃들기 마련이지요.
궁중 음식을 전수받으실 때 황혜성 선생님이 가장 강조하신 건 무엇인가요? 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모든 요리의 재료는 살아 있었던 것이다. 너에게 그것이 주어진 것을 감사하면서 함부로 대하지 마라.” 살아 있던 것이기에 그 자체가 굉장히 귀하다는 의미였죠. 그리고 “이 음식을 누가 먹을 것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라. 요리하는 내내 먹는 사람을 생각해야 한다”라는 말씀도 하셨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을 담아 만들라는 말씀이었죠. 그것이 궁중 음식의 기본 뜻이기도 하고요.
‘음식은 손맛’이라고 합니다.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손맛은 무엇인가요? 먹을 사람을 생각하며 음식을 만들 때 신경을 통해 손끝으로 전해지는 맛이 손맛입니다. 좋은 재료가 서로 섞여 간이 배어야 하는 한국 음식에서 손맛은 특히 중요합니다. 요새 사람들은 습관처럼 위생 장갑을 끼던데, 손맛을 차단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손맛은 감각이에요. 무엇을 더 첨가해야 할지, 얼마나 더 무쳐야 할지 판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거든요. 손맛을 기르고 싶다면 조금씩 요리를 시작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미치가 될 수밖에 없어요. 노래를 안 하면 점차 음치가 되는것처럼요.
에디터 김재석 (jskim@noblesse.com)
사진 신미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