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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우리를 지탱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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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을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철학이다.

검은 복면을 뒤집어쓴 채 AK-47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알라후~아크바르~”를 외치는 ISIS 멤버들의 모습에서 섬뜩함과 의아함을 동시에 느낄 수밖에 없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저토록 화가 나 스스로 죽고 싶고, 남들을 죽이고 싶은 걸까? 지난해 파리 테러는 세계인을 경악하게 한 대참사였다. 하지만 지중해의 ‘삶의 낙(joie de vivre)’의 상징인 니스에서 입에 담기도 불편한 살육 사건이 벌어지고, 뮌헨에서도 비슷한 폭력 사건이 연이어 터지자 ‘과연 이것이 우리가 적응해야 할 새로 다가오는 사회의 모습인가?’라는 두려움이 은연중에 퍼져나간다. 얼마 전, 나는 옛 동창 몇 명을 만난 자리에서 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날의 대화는 세상이 지난 몇 년 만에 완전히 변해버려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었다는 긴 탄식으로 끝났다. 우리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유럽이 EU로 합쳐지고, 이념과 독재로 고립되어 있던 나라들이 하나둘 장벽을 무너뜨리고 글로벌 사회로 편입되어 머지않아 전 세계가 유례없는 평화와 안정을 누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역사가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이제 모든 국경이 열려 전 세계 사람들이 하나가 될 것’을 고하는 <역사의 종말>이라는 책을 내 세계적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렸다. <뉴욕타임스>의 저명한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세계는 평평하다>라는 저서에서 통신 기술의 발달로 선진국과 후진국의 경계가 사라지고, 전 세계 사람들이 비슷한 혜택을 즐기는 멋진 세상이 될 것을 예견했다.
그로부터 겨우 10년, 이민자 어린아이의 등에 ‘폴란드로 돌아가라’라는 스티커를 붙인 영국의 어떤 어른들 이야기가 SNS에 떠돈다.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나라’임을 자부하는 프랑스인은 선거철이 되면 프랑스를 EU에서 탈퇴시키고 이민자들을 쫓아내겠다는 극우 정당 FN이 몇 석을 차지할지 공포스럽게 바라본다. 아시아는 어떤가? 미국의 작가 데이비드 카플란은 남중국해를 ‘아시아의 끓는 가마솥’이라고 부른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핀란드, 말레이시아, 베트남에서는 반중 감정이 다시 치솟고 있다. 한국 역시 인터넷에서 성별과 계급, 종교와 지지 정당에 따라 서로 모욕적인 별명을 붙이고 욕하며 심지어는 모르는 사람에게 잔인한 폭력까지 서슴지 않는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불과 10년 전 세계를 휩쓴 그 긍정의 불꽃은 어디로 갔는지 찾아보기 힘들고, 그 당시 사람들이 꿈꾸던 미래에 대한 장밋빛 비전은 스러진 환상에 머물렀다. 지금은 긍정 대신 증오가 세상을 불태우고 있는 것이다. 긍정의 행진은 1960년대에 시작됐다. 1960년대 말 미국과 프랑스는 곳곳에서 젊은 세대가 기성세대에 대항해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청바지, 로큰롤, 장발, 통기타와 성적 개방으로 대변되는 ‘히피’ 운동이었다. 젊은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도 제대로 반성하지 않아 다시 한 번 세계대전을 일으킨 기성세대가 내세우는 모든 것을 반대했다. 국가, 종교, 가족을 모두 전쟁의 원인으로 여긴 것은 바로 이전 세대가 벌인 끊임없는 전쟁에 대한 염증 때문이었다. 하지만 젊은이들 중에는 ‘사랑’으로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의 모토는 ‘Make Love Not War’였고, 거꾸로 뒤집은 V자가 동그라미 안에 있는 ‘Peace Sign’이 그들을 상징했다. 이때의 가치관은 존 레넌의 ‘Imagine’이라는 노래 가사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상상해봐. 나라라는 것도 없어. 별로 어렵지 않아. 죽일 이유도, 죽을 이유도 없어. 종교도 없는 거야. 평화 속에 사는 거지. 너는 나를 몽상가라고 하겠지만, 그건 나뿐만이 아냐. 언젠가 우리 쪽으로 넘어와서, 세계가 하나로 사는 거야.” 이때부터 어떤 국가나 종교도 ‘이렇게 사는 것이 올바른 거야’라고 강요하면 안 되는 풍토가 생겼다. 1980년대부터 2010년까지 세계 지식인들이 고등교육을 통해 전수받은 이 철학을 ‘코즈모폴리턴 사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바로 그 세대 역시 그토록 싫어하던 부모 세대처럼 자식 세대에게 큰 부담을 안기게 된 셈이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 마이클 샌델은 철학자 등 지식인들이 코즈모폴리턴 사상의 여파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기준을 이야기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고 말한다. 지식인들은 정신적 리더 자리에서 물러나 제3의 관찰자가 되었다. 그러자 대중은 ‘저건 나쁜 거야’라고 확신 있게 말해주는 사이비 종교나 극단적 종교 단체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그가 ‘정의란 무엇인가’를 화두로 책을 쓴 이유다. 필자가 어릴 때만 해도 친구들끼리 학교에서 싸우면 선생님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아이들이야 싸우면서 크는 거죠”라고 말했고, 부모님은 그런 선생님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싸우고 나서 풀이 죽은 자식을 집으로 데려가면 그만이었다. 나의 경우 중학교 유학 시절에 인종차별적 발언을 한 덩치 큰 미국 아이와 서로 멱살을 잡은 적이 있다. 이를 목격한 체육 선생님은 우리 둘의 셔츠 목덜미를 잡고 레슬링장에 던져 넣으며 “한 놈이 죽을 때까지 나오지 마!”라고 소리쳤다. 물론 싸우지 않았다. 우리는 둘 다 어색한 자세로 레슬링장에 갇혀 4시간이나 벌을 섰다. 그 후 이 문제로 더 싸우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나중에는 오히려 둘이 꽤 친해졌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싸우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라는 사고가 지배적이었다. 예를 들어 <일리아드>의 주인공인 아킬레스만 해도 그렇다. 아킬레스는 자기 왕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남의 신전을 훼손하고 기도하는 여성을 납치하는,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나쁜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압도적인 전투력 때문에 영웅 대접을 받았다. 고대 그리스 남자들은 기름을 발라 번쩍이는 나체로 운동장에 모여 표창 던지기, 원반 던지기, 전차 경주, 레슬링 경기를 자주 벌였다. 나체로 운동한 이유는 그리스의 지독한 외모 숭상주의의 결과로 볼 수도 있지만, 사람과 사람 간의 공평한 싸움이라는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대의 룰에는 독특한 점이 있다. 경기장에서 내려오면 방금 전까지 서로 죽일 기세로 싸우던 상대방과 마주 앉아 와인잔을 기울이며 웃음을 터뜨릴 줄 알아야 진정한 전사로 인정받았다. 인생은 싸움의 연속이라는 걸, 한 번의 싸움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 진정한 강자의 모습이었다. 분노가 강자의 포효라면 혐오는 약자의 두려움에서 나온다. 강자는 두려움이 없어 관대하지만, 약자는 두려움이 많아 자기를 위협하는 것을 무조건 없애려고 잔인해진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는 우리 사회에 ‘멘탈 갑’이 아닌 ‘멘탈 을, 병, 정’이 얼마나 많아졌는지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어떻게 강해질 수 있는가? 강인함은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가치관, 즉 철학에서 나온다.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이 확실한 사람은 누구나 강하다. 주자의 <논어집주>에도 “선비는 의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라는 구절이 있다. ‘의’라는 명확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강자임을 언급한 것이다.
우리는 인간에 대한 많은 것을 오해해왔다. 예를 들어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경제적 동물이라고 믿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한 실험 결과를 보자. 실험자가 A라는 사람에게 100달러를 약속하는데, 조건이 있다. 옆에 있는 B라는 사람에게 그 돈을 나누어줘야 한다. B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 A에게 100달러를 지급하고, 두 사람 다 돈을 벌게 된다. 만약 B가 거절하면 실험자는 돈을 지불하지 않고, 두 사람 다 한 푼도 받지 못한다. 만약 인간이 경제적 동물이라면 A가 99달러를 차지하고 B가 1달러를 챙기더라도 거절하지 말아야 한다. 어차피 B는 없던 돈이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비율이 낮은 제안이라도 거절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30달러 이하의 제안을 받은 많은 B는 이를 거절했다. A보다 자기를 낮게 본다는 불쾌한 기분 때문에 둘 다 돈을 받지 않는 ‘손해 보는 선택’을 한 것이다. 이 실험은 인간은 이익만을 위해 사는 경제적 동물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옳음’을 지키려고 목숨도 기꺼이 내건다. 1년 내내 망태기 옷 하나로 버티며 빵과 찬물로 끼니를 때우는 수도승이 호사스러운 귀족들을 딱하게 여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움직이지 않는 인생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더 잘 살 수 있을까?’ 물론 자본주의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려면 ‘잘 사는 게 무엇인가?’라는 또 다른 문제의 해답부터 찾아야 한다. 나는 21세기는 ‘역사의 종말’이 아니라 또 다른 철학의 시대가 시작될 것으로 믿는다. 그렇게 믿어야 한다. 세계가 반으로 나뉘어 핵무기를 쌓아두고 싸운 것이 겨우 30년 전의 일이고,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화는 유리 온실 같은 것이니 말이다.

에디터 | 이기원 (lkw@noblesse.com)
사진 | 조승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