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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의 시작과 끝

LIFESTYLE

문화 칼럼니스트 정준호가 독일과 스위스의 예술 문화 관련 여행기를 전한다. 두 나라에서 경험한 오페라의 각기 다른 매력과 서사에 대하여.

위쪽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바이로이트 변경백 오페라극장 내부.
아래쪽 쾌청한 취리히 호반의 르코르뷔지에 파빌리온.

유례없는 폭염이 한가위까지 집어삼킨 지난가을, 중부 유럽은 폭풍 보리스로 몸살을 앓았다. 내 베이스캠프 뮌헨도 악천후였다. 쌀쌀한 추석이었지만, 다행히 바이로이트엔 밝은 보름달이 떴다. 바로크 오페라 축제 폐막 전야 무대는 ‘함부르크의 오페라’라는 프로그램을 선보일 예정이었다. 그런데 시작하기 몇 시간 전 이메일이 왔다. 독창자가 급성 식중독으로 노래를 부를 수 없어 프로그램을 바꾼다는 것이다. ‘함부르크의 오페라’라는 프로그램 때문에 온 나는 적잖이 아쉬웠다. 다행히 베테랑 크리스토프 루세가 지휘하는 레 탈랑 리리크의 관현악곡은 함부르크에 태동했던 독일 오페라의 선곡을 고수했다. 도대체 ‘함부르크의 오페라’란 무엇인가?

독일 오페라의 역사
오페라는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를 부활시키려 한 문예부흥의 마지막 퍼즐이었다. 16세기 말 이탈리아에서 뿌려진 씨앗은 17세기를 오페라 시대로 예고했다. 그러나 1618년에 발생한 30년 전쟁이 찬물을 끼얹었다. 신·구교의 각축에 독일은 쑥대밭이 되었고, 그동안 이탈리아는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대중 극장 문화를 꽃피웠다. 바흐와 헨델 이전에 독일 최고 작곡가로 꼽히는 드레스덴의 하인리히 쉬츠(1585~1672)는 베네치아를 방문해 최신 스타일을 익히고 돌아갔다. 쉬츠는 1627년 독일 최초의 오페라 <다프네>를 썼으나 초연 기록만 있을 뿐 전해지지는 않는다. 계속되는 전쟁은 쉬츠에게 더는 오페라 작곡을 허락하지 않았다. 1648년 종전 결과 맺어진 베스트팔렌 조약은 독일을 300개 넘는 나라로 쪼개버렸다. 오페라는 소수 부유한 궁정의 자체 오락거리에 머물렀고, 독일의 대중 오페라는 17세기가 끝나갈 즈음 겨우 고개를 들었다. 가장 북쪽, 한자 무역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항구 함부르크에서.
제국 자유도시였던 함부르크는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로서 비슷한 런던을 모델로 삼았다. 부유층 시민의 여가를 위해 발달한 공연 문화는 곧 런던에서 함부르크로 이식되었다. 함부르크에 독일 첫 ‘공공’ 오페라극장이 문을 연 것은 1678년. 라인하르트 카이저와 요한 마테존 같은 작곡가가 수십 편의 오페라를 썼고, 곧이어 헨델도 함부르크에 도착했다. 헨델은 네 살 많은 마테존과 친구이자 맞수였다. 마테존의 오페라 <클레오파트라> 공연 때 두 사람은 사소한 경쟁심 때문에 결투까지 벌였다고. 마테존의 칼끝이 코트 단추를 찌르는 바람에 헨델은 목숨을 건졌지만, 두 사람은 곧 화해했다는 일화다. 이후 더 큰 꿈을 좇아 이탈리아로 건너간 헨델은 잠시 하노버로 돌아왔다가 런던에 완전히 정착해 바로크 오페라와 오라토리오의 절정을 이끌었다. 런던의 오페라 문화가 쇠퇴함에 따라 헨델이 오라토리오로 눈을 돌린 것처럼, 함부르크의 오페라극장은 1738년 재정 문제로 문을 닫는다. 이렇게 독일 바로크 오페라의 첫 개화는 깊이 묻힌 채 20세기 말까지 세상에서 잊혔다.
한편, 바이로이트는 매해 여름 한 달 동안 열리는 바그너 축제로 유명하다. 1870년대 바그너가 이곳에 새 극장을 짓고 자작품만을 연주하는 축제를 시작한 이래 매년 여름 순례의 행렬이 줄을 잇는다. 그러나 바이로이트에는 그보다 훨씬 전부터 오페라가 있었다. 프로이센을 강국으로 만든 프리드리히 1세의 딸 빌헬미네와 남동생 프리드리히 2세는 음악을 유난히 사랑했다. 바이로이트 대공비가 된 빌헬미네는 딸 엘리자베트(카사노바가 유럽 최고 미인이라 칭했다)의 결혼을 기념해 변경백 오페라극장을 개관했다. 함부르크의 오페라가 널리 알려지기도 전에 사라진 직후, 1744년의 일이다. 아름다운 로코코 내부 장식과 깊은 무대는 뒷날 바그너에게 적잖은 인상을 남겼고, 그가 이 변방 공국을 자신의 요람으로 삼는 데 영향을 미쳤다. 바로크 시대 거세 성악가 카스트라토의 존재를 널리 알린 영화 <파리넬리>가 바로 이 극장을 무대로 촬영되었으며, 이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른다. 2020년에 재출발한 바이로이트 바로크 오페라 축제는 새로 발굴된 작품을 재조명하는 첨병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올해도 니콜라 포르포라의 <아울리드의 이피게니에>라는 잊힌 작품을 중심으로 알찬 프로그램을 꾸몄다. 지역 특산물이 오페라인, 그것도 골수만을 위한 바그너라는 거암에만 기대지 않고 새로운 활로를 개척한 강소 도시 바이로이트의 저력을 엿본 밤이었다.

막장극의 소동을 익살스럽게 보여준 취리히 오페라의 <낙소스의 아리아드네>.

스위스 오페라의 충돌
며칠 뒤 방문한 스위스는 다행히 예년 날씨로 돌아가 하늘도 쾌청했다. 주요 극장 중 가장 빨리 시즌을 여는 취리히 오페라는 첫 무대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낙소스의 아리아드네>로 장식했다. 교향시 작곡가 슈트라우스는 강렬한 표현주의 초기 작품을 통해 오페라 작곡가로 탈바꿈했다. 1911년 <장미의 기사>의 성공으로 그는 작가 후고 폰 호프만스탈과 단짝이 된다. 다음 해 이들은 친구 막스 라인하르트가 연출할 몰리에르의 <서민 귀족(Le Bourgeois Gentilhomme)>을 위한 음악으로 ‘낙소스의 아리아드네’를 써주는 데 의기투합하고, 세 사람은 뒷날 잘츠부르크 축제를 창설하기에 이른다. 루이 14세 시대에 몰리에르(장 바티스트 포클랭)가 작곡가 장 바티스트 륄리와 합작한 <서민 귀족>은 졸부가 귀족이 되고자 속성 교양 교육을 받고 헛돈을 쓰지만 결국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 격이 되고 만다는 풍자극이다. 여기서 졸부란 단순히 신분 상승을 꾀하는 사람뿐 아니라 허영에 빠져 진실을 보지 못하는 모든 사람(정점에 루이 14세가 있다)을 지목한다.
슈트라우스와 호프만스탈은 오페라를 공연하려는 졸부(취리히 공연에서는 극장 감독을 칭한다)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여기서 극장 역사 전체가 충돌한다. 패기만만한 신인 작곡가는 공연 직전에야 자신의 야심 찬 오페라 세리아(정가극) 뒤로 졸부가 좋아하는 코메디아 델라르테(광대극)가 이어진다는 통보를 받는다. 파인다이닝 뒤에 피자를 먹자고 하다니! 급기야 끝에 불꽃놀이가 예정된 데다 시간이 촉박하니 정가극과 광대극을 동시에 진행하라는 막무가내. 코스 사이사이 피자를 먹으라고? 일동은 말도 안 된다고 반발하지만 결국 분량을 흥정한다. 여기서 정가극 작곡가는 바그너 계승의 짐을 짊어진 슈트라우스를 대변한다. 그에 비해 광대극은 화려한 기교를 앞세워 청중을 사로잡아온 이탈리아 오페라다. 극장의 황금기를 지나 황혼에 선 슈트라우스는 바그너만이 아닌 이탈리아까지 아울러야 했다. 르네상스 시점에서 보면 바그너나 이탈리아나 매한가지인 무대극이지만, 각자 위치에서 상대방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먼 사이였다. 그러나 슈트라우스는 일찍이 볼로냐에서 이탈리아어로 공연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보고 ‘오늘에서야 이 곡이 벨칸토를 위한 것임을 알았다”고 고백했다. 그때까지 벨칸토는 진지함으로 무장한 독일 오페라에는 맞지 않는 이탈리아 옷이었던 것. 나아가 슈트라우스의 전작 <엘렉트라>는 이탈리아 무명 작곡가 비토리오 녜키의 <카산드라>를 표절했다는 혐의를 받을 정도로 유사했다. 슈트라우스는 알게 모르게 독일과 이탈리아를 융합하려 했다. 불꽃놀이에마저 시간을 내줄 마당에 가릴 것이 무어란 말인가!
취리히 오페라하우스 예술감독 안드레아스 호모키는 이번 시즌을 끝으로 10여 년의 임기를 마치고 떠난다. 한 조역이 대타로 출연한다고 알리는 그의 등장은 극중극 <낙소스의 아리아드네>를 위해 짠 듯 안성맞춤이었다. 사실상 졸부 역할이지만 무대에는 서지 않는 그를 호출했기 때문이다. 대타 성악가도 무대의상과 연기 없이 가장자리에 서서 목소리만 더함으로써 극장 예술의 복잡미묘함을 증명했다. 영상물로 본 예전 취리히 무대가 지나치게 건조했던 데 비해 이번 연출은 특색 있는 의상과 일렁이는 회전 무대로 긴장감을 더했다. 매끄럽게 회전한 침대처럼 독일과 이탈리아 음악의 앙상블도 완벽했다. 늘 검소하되 방점 있는 취리히 오페라에 바라던 대로였다. 이날 중국 가수의 체르비네타(벨칸토)에 비해 다소 빛을 잃은 아리아드네(정가극)가 후속 무대에서 더 나아졌으리라 확신한다. 작곡가의 노랫말처럼 음악은 ‘용기를 주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취리히 호숫가에 드리운 달빛을 보자 슈트라우스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그리스 비극에서 시작한 서양 예술이라는 무지개의 마지막 끝자락에 서 있다.” 바이로이트와 취리히에서 나는 험한 날씨를 뚫고 나온 그 무지개 전체를 보았다.

바이로이트 신궁전.

마리엔 정원 내 빌헬미네 공비의 흉상 뒤로 들어선 변경백 오페라극장.

<낙소스의 아리아드네>가 극중극임을 강조하는 취리히 오페라의 프롤로그.

폭풍 보리스 탓에 잔뜩 찌푸린 뮌헨 쾨니히스플라츠.

 

에디터 김혜원(haewon@noblesse.com)
글·사진 정준호(문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