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형의 수집가
수집은 단순히 물건을 모으는 취미에서 끝나지 않는다. 진정한 수집가는 소유보다는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행위 자체에 흥미를 느끼기 때문이다. 소리를 기록하는 사람과 경험을 모으는 이를 통해 수집의 또 다른 매력을 들여다봤다.

악당이반 김영일 대표.
소리를 기록하는 장인
그는 오늘도 무거운 장비를 어깨에 이고 산에 오른다. 맨몸으로 올라도 쉽지 않은 높은 산. 핸디 레코더를 이리저리 대보며 소리를 따라 길을 걷는다. 다소 이상해 보이지만 그는 소리를 채집하는 중이다. 국내 유일의 국악 전문 음반사 악당이반의 김영일 대표는 자신을 기록하는 사람이라 말한다. 악당이반 이전에 그는 카메라를 통해 세상을 기록하는 사진가로 활동했다. 그러다 우연히 채수정이 부르는 단가 ‘편시춘’을 들은 후 국악에 빠져들었고, 망막의 기록은 고막의 기록으로 변했다. 당시 국악 음반의 구색과 수준에 실망한 그는 제발로 소리꾼을 찾아가 소리를 녹음했다. 전국을 돌며 300여 개의 CD에 소리를 녹음해 음반사를 찾아갔지만 앨범을 제작해주는 곳은 없었고, 고민 끝에 2007년 직접 음반사를 차린 것이 악당이반의 시작이다. 그는 음악가가 행복하게 자신의 음악을 담을 수 있는 소리의 집, ‘스튜디오 파주’를 세웠다.

1 악당이반의 국내 최고 수준의 녹음 스튜디오. 2 5.1 채널 서라운드를 동시에 기록할 수 있는 AATON의 레코더.
각종 악기와 첨단 장비를 갖춘 국내 최고 수준의 녹음 스튜디오다. 그러나 우리 음악의 생동감은 녹음실에서 잡아내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정작 실제 녹음은 한옥에서 진행한다. 사방이 트인 대청마루에 나무와 흙벽, 종이의 울림이 섞인다. 창호지는 장구와 북소리를 효과적으로 걸러내고 서까래는 소리를 퍼뜨린다. 풀벌레 울음소리가 그대로 전해지는 악당이반의 음반은 소리를 둘러싼 주변 분위기까지 감싸 안는다. 소리를 담아온 지 올해로 19년째, 요즘 그는 더욱 단순하게 있는 그대로의 소리를 녹음한다. 한국의 소리를 기록함으로써 한국의 원형을 발견하고 수집해 음악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 “캐나다에는 자연의 소리를 녹음하는 레이블이 많아요. 바다에서 고래가 헤엄치고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불죠. 우리도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를 담은 아카이브를 만들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전국 각지에서 우리만의 소리를 채집해요. 봄에는 이앙기, 겨울에는 콤바인이 돌아가는 소리, 장날 새벽의 경매장 소리, 오대산 상원사의 종소리, 담양 소쇄원의 대나무 소리도 있죠.” 그는 40여 개의 종소리를 모으기도 했다. 전국의 사찰에서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는 소리다. “우리나라 종은 종을 위한 집, 종루를 만들고 밑에 바닥을 파서 소리의 울림을 극대화해요. 세계에서 유일하게 규칙적으로 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맥놀이 현상이 일어나죠.” 일주일에 3~4일은 꼬박 소리를 채집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한국의 소리를 모두 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기에 효과적인 기준을 세웠다. 녹음하기 전에 고도를 먼저 계측하는 것. “레코더를 무심히 켜고 산을 올랐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등산로 출발점의 풀벌레 소리와 해발 1000m의 풀벌레 소리가 전혀 다르더군요. 자연에서는 높이가 소리를 지배해요. 집 근처에서는 참새가 울고 산 위로 올라가면 어치가 노래하는 것처럼 나무의 수종도 달라지죠. 높이라는 축을 기준으로 소리를 담아낼 수 있다는 거죠. 그라운드제로의 소리는 문무대왕암에서 기록할 예정이에요.” 그가 다음에 오를 산은 강원도 평창에 있는 가리왕산. 잎사귀가 모두 떨어져 휘이익 하는 을씨년스러운 소리로 바뀌기 전에 잎의 소리를 담으러 간다.

공연 여행가 이상훈.
경험이 이끄는 인생
건축가이자 여행가, 공연 전문가이자 문화 기획자 그리고 수집가까지, 이상훈을 설명하는 수식어는 다양하다. 1년의 반 이상 해외를 떠도는 그는 뮤지컬, 클래식, 오페라 공연을 보기 위해 비행기에 오른다. 국내에서 그만큼 공연을 많이 보는 이는 없을 것이다. 한 해에 보통 150여 개 도시를 돌며 100여 편의 공연을 관람한다. 5년째 베를린 필하모닉 송년 음악회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신년 음악회로 새해를 열고 9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교향악단과 오페라 공연을 좇아 유럽 각국을 떠돈다. 7월 말부터 8월 말까지 열리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는 세계 최고 교향악단과 오페라 가수들이 한곳에 모이는데 이를 중심으로 베로나와 뮌헨, 루체른에서도 오페라 페스티벌이 펼쳐져 가장 바쁜 시기이기도 하다. “파리, 빈, 베를린은 한 해에 대여섯 번 방문해요. 여행 일정은 내년까지 꽉 차 있죠. 500개 이상의 도시를 방문했고 유럽 49개국 중 지금까지 45개국을 방문했어요. 아직 가보지 못한 페로제도, 벨라루스, 키프러스 등까지 섭렵하면 여행 책을 써볼까 해요.”
공연에 대한 애착이 시작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1년 부산을 찾은 <웨스트사이드 스토리>가 인생의 첫 뮤지컬이다. 은행에 붙어 있던 포스터를 보고 호기심에 무작정 티켓을 구매했고, 이후 뮤지컬에 흠뻑 빠진 그는 틈날 때마다 서울에 올라가 공연을 관람했다. 20대에는 장르를 불문하고 공연을 보러 다녔고 클래식과 오페라를 섭렵했다. 공연을 볼 때마다 모은 프로그램 정보나 음반, DVD, 포스터, 악보는 2009년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에서 전시한 적이 있을 만큼 방대한 양을 자랑한다. 공연 자료가 더 이상 집에 보관하기 힘든 수준에 이르자 건축가로서 손수 설계한 그만의 창고를 짓기도 했다. 부산문화회관 근처 주택가 골목길에 위치한 그의 창고는 길을 사이에 두고 2개의 공간이 통유리창을 통해 마주 보는 구조다. 각각 ‘더 뮤지컬’과 ‘더 클래식’이라 이름 붙이고 관련 자료와 수집품을 보관한다. 다락방이 있던 복층 구조를 개조해 층고를 높인 아담한 공간으로 더 뮤지컬은 오렌지 컬러, 더 클래식은 그린 컬러를 활용해 디자인했다. 공연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열려 있는 아지트로 비정기적으로 하우스 콘서트를 열기도 한다.

3 오렌지 컬러가 돋보이는 더 뮤지컬 전경. 4 해외를 나갈 때마다 수집한 마그네틱.
7년 전부터 그는 건축과 가구 디자인을 전공한 건축가로서의 삶을 뒤로하고 공연 여행가로 새 삶을 시작했다. 소규모 그룹의 프라이빗한 공연 여행을 계획하고 함께한다.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를 막힘 없이 구사하고 건축, 클래식, 오페라, 미술까지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해설을 곁들이니 별다른 홍보가 없어도 그를 찾는 이들이 많다. 꾸준히 쌓아온 공연에 대한 경험과 지식은 계속해서 인생을 또 다른 길로 이끌고 있다. “새로운 도시를 방문하면 공연을 관람하는 것뿐 아니라 오페라하우스와 미술관도 방문하죠. 건축과 클래식의 교집합에는 공연장이 있어요. 300개가 넘는 유럽의 공연장을 다니며 건축가의 시각으로 외관, 음향과 기능 등을 분석해요. 현재 부산에 설계중인 오페라하우스의 자문 역을 맡고 있기도 하죠.” 그는 올해도 어김없이 연말과 신년을 베를린과 빈에서 보낼 예정이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한 베토벤 교향곡 전집도 녹음할 때마다 달라졌듯 연주 장소나 지휘자와 협연자에 따라 무한대로 변주되는 것이 공연이죠. 오페라도 누가 연출하고 출연하느냐에 따라 매번 달라져요. 공연은 지루할 새가 없어요.”
에디터 김윤영(snob@noblesse.com)
사진 선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