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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가 박신양

ARTNOW

배우 생활 30년, 박신양은 그간 한 번도 허투루 연기하지 않았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4년 전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배우 박신양.

“조심하세요. 물감 묻으면 안 지워집니다.” 서울 자양동, 박신양의 작업실에는 사용한 흔적이 역력한 그림 도구가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바닥 여기저기에 물감도 튀어 있었다. 사방에 빼곡히 늘어선 그림 중엔 아직 물감이 마르지 않은 미완성작도 있었는데, 더 놀라운 건 작업실에 있는 그림이 그가 완성한 작품의 극히 일부라는 사실이다. 그의 작품 130여 점은 별도로 마련한 창고에 잠들어 있다. 에밀 놀데나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를 연상시키는 강렬한 그림들, 그리고 그것을 다루는 조심스러운 손길을 보며 내심 감탄했다. ‘이 사람, 진짜 미술을 하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인 러시아 유학 시절, 연기를 공부하던 20대 후반의 박신양은 어느 작은 미술관에서 화가 니콜라이 레리흐(Nicholas Roerich)의 작품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 난생처음으로 예술 작품이 주는 기분 좋은 감동에 압도됐다. “말로는 정확히 표현할 수 없지만, 어떤 강렬한 감정이 와 닿은 것 같아요. 이전에는 제가 작품을 보고 왜 아무 느낌도 받지 못하는 걸까 회의감이 들었거든요. 하지만 그 경험으로 예술이 무엇인지, 예술이 사람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조금이나마 찾을 수 있었죠.” 당시의 황홀한 예술적 체험은 그의 가슴 한편에 오랫동안 남았고, 4년 전 그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시작한 계기가 됐다. “연기를 하며 표현에 대한 갈증을 느끼던 때였어요. 연기도 자기표현의 일종이지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약속한 틀 안에서 진행하는 거잖아요. 나만의 것, 그동안 하지 못한 이야기를 그림으로 꺼내 보이고 싶었죠.”
처음엔 집 안에 작업실을 마련했지만, 도구가 점점 늘고 작품 수도 늘어나면서 별도의 작업실을 얻었다. 하지만 해 질 녘부터 새벽 3시까지, 거의 매일 그림에 빠져 살다 보니 지금의 공간도 작게 느껴져 더 큰 장소로 옮기는 걸 고민 중이다.
작업실에서 유독 눈길을 사로잡은 건 정면을 응시하는 당나귀 그림이었다. 과감한 터치가 돋보이는 당나귀 얼굴은 그의 자화상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왜 하필 당나귀였을까? “누구나 살면서 크고 작은 짐을 지게 되잖아요. 당나귀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당나귀는 우리와 달리 짐을 ‘짐스러워’하지 않아요.
그 우직함에 매력을 느꼈어요. 한편으로 ‘과연 내가 짐을 지는 모습은 훌륭한가’ 생각하게 되었죠.” 초상화 역시 그가 즐겨 그리는 소재다. 그중에서도 독일의 현대무용가이자 안무가 피나 바우슈(Pina Bausch)에게 특히 관심이 많다. “알면 알수록 흥미로운 인물이에요. 무용에 연극적 퍼포먼스를 도입해 인간의 심리와 감정을 끌어냈죠. 이는 그림을 그리면서 제가 항상 고민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살아 있는 감정을 그림에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어요.” 그에게 그림을 그리는 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에 따르면, ‘세상에서 가장 즐거우면서도 외로운 일’이다.

박신양은 요즘 매일 그림에 빠져 대부분의 시간을 작업실에서 보낸다.

작년 9월, 박신양은 제주 세계자연유산센터에서 열린 한중 작가 그룹전 <평화의 섬 제주, 아트의 섬이 되다>에 초대 작가로 참여해 처음으로 대중에게 작품을 선보였다. 이전에도 막연하게 작품을 공개할 시점에 대해 고민했지만, 그렇게 빨리 기회가 찾아올 줄은 몰랐다. “첫 전시인 만큼 굉장히 떨리고 혼란스러웠어요. 제 그림이 사람들에게 보일 만한 수준이 되는지 확신이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한편으론 꼭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왜였을까? “배우 활동을 하면서 하나 깨달은 게 있어요. 어떤 작품이든 대중이 그걸 보고 반응할 때 비로소 작품으로서 가치가 생긴다는 사실이죠. 미술 작품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조금 빠른 감은 있지만, 링에 오른 초보 복서처럼 상대에게 펀치의 쓴맛을 일찍 맛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어요.”
전시는 그에게 자극제가 됐다. 무엇보다 앞으로 작업 방향에 대해 고민하게 했다. “전시가 끝난 후,왜 그동안 더 과감하게 그림을 그리지 않았는지 반성했어요. 누가 시키지도 않은 고민으로 망설인 게 참 바보 같지 않나요? 미술을 하는 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일인데 말이죠.”
인터뷰 하루 전, 그는 한 스튜디오에서 반나절 동안 무용수의 사진 수천 장을 찍었다. 최근 관심을 갖게 된 인간의 몸짓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위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주로 남들이 찍어놓은 사진을 보고 그림을 그렸어요. 하지만 살아 있는 몸짓을 포착하기 위해 그걸 직접 촬영할 필요가 있었죠. 이번 촬영은 제 나름의 새로운 도전입니다. 어떻게 작업할지는 차차 고민해봐야죠.” TV 속 생생한 연기로 와 닿던 그의 열정이 느껴진 순간이었다. 어떻게 박신양은 이렇듯 매사에 열심히 또 진지하게 임하는 걸까? “글쎄요, 저는 뭔가를 저지르기 전에 스스로 ‘책임’을 물어요. 정말로 그걸 좋아해서 하는 것인지, 마음이 내키지 않는데 억지로 하는 것인지 말이죠. 그 질문에 답이 나오면, 그 일을 합니다.” ‘그 일’에는 분명 미술도 포함되어 있다. 아직 다음 전시 계획은 없지만, 박신양은 그것과 상관없이 계속 그림을 그릴 것이다. 미술가로서 그가 내놓을 다음 작품을 기대해보자.

 

에디터 황제웅(hjw1070@noblesse.com)
사진 J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