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병헌(Byunghun Min)
아날로그 방식이기에 여과되지 않고 풍부하게 전달되는 정서가 있다. 사진작가 민병헌의 작품이 그렇다. 원시적 기운을 내뿜는 미묘한 회색빛이 긴 여운을 남기는 그의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숨어 있는 또 하나의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30년 넘게 민병헌이 고수해온 흑백사진의 가치를 충분히 증명하고도 남는다.

최근 갤러리플래닛의 < monologue > 전시에서 1990년대 중반 ‘잡초(Weed)’ 시리즈 작품들을 만날 수 있어 반가웠습니다. 한 번도 공개하지 않은 작품이라고요.
네. 미발표작들을 전시했어요. 난 지금도 방랑자처럼 살지만 1990년대엔 더했죠. 서울 근교 농가를 돌아다니며 비닐하우스 틈바구니에서 자라다 죽은 잡초에 미쳐 몇 년 동안 그걸 찍었어요. 작년에 그 시절의 필름을 쭉 정리했는데, 이걸 왜 인화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작품들을 골라 단 한 장씩만 인화했어요. 촬영한 건 1990년대 중반이지만 프린트는 2014년에 했죠.
단 한 장씩만 인화한 이유는 뭐죠?
‘잡초’ 시리즈는 내 사진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작품이에요. 1980년대 초에 사진을 시작했는데 ‘잡초’ 연작을 통해 사진계의 중심으로 한 걸음 다가가게 됐으니까요. 내가 이번에 군산으로 이사했는데 새 작업실에는 큰 사진을 인화할 수 있는 시스템을 아예 갖추지 않았어요. 그래서 내 인생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잡초’ 시리즈 사진을 마지막으로 한 장씩만 크게 인화해보자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럼 앞으로 큰 사진은 인화하지 않을 계획인가요?
30년 넘게 흑백사진을 해왔는데 죽을 때까지 계속한다면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보다 작고 밀도 있는 흑백사진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죠. 본래 젤라틴 실버 프린트의 매력이 밀도감이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내가 변덕이 좀 심한 편이라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어요.(웃음)
요즘은 누구나 휴대폰으로 쉽게 그럴싸한 사진을 찍을 수 있으니, 작가님이 고수하는 작업처럼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한 인화 방식은 오히려 신선한 시대가 됐어요.
언젠가 ‘디지털 사진을 거부하는 민병헌’이라는 표현이 보도된 적 있어요. 그런데 난 거부한 적 없어요. 다만 관심을 가진적이 없을 뿐이지. 흑백사진이 더 예술적이거나 고상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흑백이든 컬러든 디지털이든 작업하는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에 따라 예술이 되기도 하고 엉터리가 되기도 하겠죠. 난 처음 사진을 배울 때 흑백사진을 했는데 그게 정말 좋았기 때문에 이 작업을 계속하고 있어요. 하지만 아직도 내 사진을 보면 못한 부분이 보여요. 근데 그게 참 다행이죠. 안 보인다면 재미가 없어져 벌써 그만뒀을 텐데 계속 매달릴 수밖에 없으니까.
암실이란 공간은 작가님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암실이 날 끌어당기는 것 같아요. 예전부터 어둡고 촌스러우면서 불 하나 밝힌 그 공간에 혼자 있을 때 제일 행복했어요. 내 작업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혼자서 해야 한다는 거예요. 한 작업을 몇십 년 동안 하다 보면 그게 곧 그 사람을 설명하는 게 돼요. 다른 사람과 섞여 있는 상태에서는 나를 보여줄 수 없죠. 그러니 당연히 암실에서 나는 혼자여야 해요.
본격적으로 인지도를 얻게 된 ‘잡초’ 시리즈 외에도 ‘안개(Deep Fog)’, ‘하늘(Sky)’, ‘스노랜드(Snow Land)’, ‘몸(Body)’ 등의 연작이 있어요. 대상을 찍고 싶다는 마음이 동할 때는 언제인가요?
난 카메라를 들고 뭔가 찾아다니진 않아요. 그냥 ‘논다’고 표현하는데, 놀면서 눈으로 보는 거죠. 어차피 시각적 작업이잖아요. 사람을 만날 때도 첫인상이나 느낌이란 게 있는데 대상을 볼 때도 마찬가지예요. 손에 카메라를 들고 있으면 대상의 본질을 보기 전에 먼저 다가가 찍게 되는데 내 사진의 특성상 그건 안 좋은 것 같아요. 내가 보고 충분히 느낀 다음, 이 작업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카메라를 들고 나와요. 그 뒤엔 2~3년 동안 집중해서 계속하고, 그게 자연스럽게 연작이 됐어요.
시기별 연작을 보면 작품 속에서 민병헌의 그레이가 계속 변화해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난 사진학과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어요. 아마추어로 흑백사진을 시작하면서 앤설 애덤스(Ansel Adams) 같은 작가의 책을 참고했는데, 외국 작가의 사진은 풍경의 스케일이 크고 콘트라스트도 강하더군요. 그땐 흑백 대비가 강한 사진을 좋은 작품이라 했는데 난 그리 와 닿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점차 대비가 약한 방향으로 가게 됐어요. ‘잡초’ 시리즈만 해도 선이 많이 보이고 대비가 드러나는 편인데, 이후에 작업한 ‘안개’나 ‘눈’ 사진 같은 경우 보이는 게 없는 극단적 작품까지 나왔죠. 근데 또 앞으로는 모르겠어요. 최근에 군산에서 사진을 찍고 열흘 전에 첫 암실 작업을 했는데 다시 대비가 강해졌어요. 내가 초기로 돌아가는 느낌이 들기도 해요. 내 작품을 산수화와 비교하는 사람이 있는데 난 그것도 싫어요. 그냥 내 감성일 뿐이죠.
군산 작업실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싶네요. 17년이상 작업한 양수리 작업실을 떠나면서 군산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2013년 말 즈음 앞으로 내 사진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 고민하다 지금까지 별로 가보지 않은 전라도 지역을 한번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 군산에서 우연히 쓰러져가는 가옥 한 채를 발견했고, 그곳이 마음에 들어 작업실을 옮겨야겠다고 즉흥적으로 결정했죠.
앞으로 군산을 비롯한 전라도 지역을 담은 사진을 만날 수 있겠네요. 어떤 작품이 될지 궁금해요.
군산은 도시지만 해가 지면 조용해지는 동네 분위기가 참 마음에 들어요. 최근 군산에서 사라져가는 옛집들을 찍어보긴 했는데 기존에 내가 하던 스타일은 아니에요. 기록적 측면에서 시간이 날 때마다 찍고 있죠. 앞으로 작업은 자연과 풍경 등 원래 하던 방향으로 계속 갈 거예요.
스스로 즉흥적이고 변덕이 심하다고 하지만 한 작업을 지속해온 시간을 생각해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작업은 그냥 해나갈 뿐이에요. 반복의 연속이죠. 내 사진은 대중적이기보다 마니아들이 좋아하는 사진인데, 작업의 일관성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난 사실 사진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앉아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모든 창작 활동이 결국 자기만의 길을 가는거니까, 사진에도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고 싶진 않아요. 너무 몰두하면 생각에 갇혀버려요. 편하고 자연스럽게 대상을 보고 느끼고, 또 반복하다 보면 조금씩 나아지겠죠.
Weed uq04, 젤라틴 실버 프린트 120×103cm, 1996, Print year 2014

Weed uq02, 젤라틴 실버 프린트, 103×120cm, 1995, print year 2014

Weed uq05, 젤라틴 실버 프린트, 103×120cm, 1994, print year 2014

Weed uq07, 젤라틴 실버 프린트, 120×103cm, 1996, Print year 2014

Weed uq01, 젤라틴 실버 프린트, 120×103cm, 1996, Print year 2014

Weed uq03, 젤라틴 실버 프린트, 120×103cm, 1994, Print year 2014
에디터 안미영 (myahn@noblesse.com)
사진 안지섭(인물) 사진 제공 갤러리플래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