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젤의 또 다른 이름, 에른스트 바이엘러
바젤 아트 페어의 창시자 에른스트 바이엘러에 대한 관심은 시간이 흐를수록 깊어지기만 한다. 미술 시장의 위기와 함께 갤러리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검증이 요구되는 오늘날, 20세기 후반 갤러리의 전범(典範)을 보여준 바이엘러의 발자취를 좇는다.
아트 바젤의 창시자이자 아트 딜러이며 컬렉터였던 에른스트 바이엘러의 생전 모습
바젤 아트 페어와 바이엘러 재단의 창시자로 바젤을 세계 미술계의 중심에 우뚝 서게 했을 뿐 아니라 마이애미, 홍콩 등 전 세계에 바젤 아트 페어의 기운을 전파한 에른스트 바이엘러(Ernst Beyeler, 1921~2010년). 오스카르 슐로스(Oskar Schloss)라는 62세 노인의 서점에서 견습생으로 일한 것이 경력의 시작이다. 교수, 변호사, 의사 등 학식 있는 소수의 지역 주민에게 철학, 문학 등의 고전 서적을 판매하는, 규모는 작지만 매우 신뢰가 깊은 단골을 확보하고 있는 서점이었다. 세계 여행을 꿈꾸고 지적 호기심이 충만한 젊은 바이엘러에게 슐로스는 개인교사처럼 세계의 역사, 경제, 문학, 철학 등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게을러서 잘 먹지 않는 개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다른 개를 데려와 경쟁하게 하는 슐로스를 보고 훗날 고객 간 경쟁을 유도하는 영업 비밀을 터득했다고 회고했을 만큼 슐로스의 삶을 가까이서 보고 배운 것은 바이엘러 인생에서 큰 행운이었다. 1945년 슐로스의 예기치 못한 타계 이후, 탄탄한 고정 고객을 확보하고 있는 서점의 문을 닫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 생각한 바이엘러는 서점을 인수했지만 당시 적잖은 금액이었던 은행 대출과 유족들에게 지불해야 하는 인수금 때문에 비즈니스는 처음부터 적자였다. 다행히 청년 창업을 지원하는 한 투자자를 만나 빚을 갚았고, 자금 회수를 위해 잘 팔리는 책을 중심으로 인테리어를 새롭게 단장하고 잘 팔리지 않는 책을 처분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고서점에서 판화 및 프린트 판매점으로, 나아가 미술 전문 갤러리로 자리 잡게 되었다. 1947년 첫 전시회를 열고 처음엔 일본 판화를 판매해 재미를 보기도 했지만, 스스로 판화에 대해 그리고 일본에 대해 잘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곧 일본 판화는 판매 목록에서 제외시켰다. 그의 갤러리에서 고서적이 사라진 것도, 훗날 사진이 현대미술의 주류로 떠올랐음에도 다루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팔릴 만한 것을 살피되 잘 모르는 분야에 대해서는 과감히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일찍이 간파했다.
1969년 피카소 작업실을 찾은 바이엘러
바젤, 세계 예술계의 수도
1950년대 당시, 스위스의 한적한 소도시에 불과한 바젤은 미술로 그리 유명한 도시는 아니었다. 그러나 주변 도시와 달리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서 특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바젤 미술관(Kunstmuseum Basel)은 지역 예술 애호가들의 기증으로 세운 세계 최초의 공공 미술관으로 그 덕분에 값진 컬렉션을 구성할 수 있었고, 1940년대 후반부터 적극적인 컬렉션 정책을 편 결과 피카소, 마티스 등 나치에 의해 ‘퇴폐 미술’로 낙인찍혀 사라질 뻔한 다수의 명작을 구해내기도 했다. 특히 1967년은 ‘피카소의 해’였다. 피카소의 작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던 컬렉터 슈테헬린(Staechelin)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은 피카소 작품 2점을 팔기로 결심했다. 바젤의 시민은 이 작품이 바젤을 떠나는 것에 반대하며 시 차원에서 작품을 구입해야 한다고 나섰다. 젊은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달리며 피카소를 위해 투표해달라는 선전물을 돌렸고, 많은 시민의 지지로 피카소의 작품 2점은 바젤 미술관에 남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피카소 역시 기쁜 마음에 작품 4점을 바젤 미술관에 선물하면서 바젤은 피카소의 명작이 모인 미술관으로서 명성을 얻게 된다. 이후 바젤 시민의 피카소 작품 기증이 이어진 것은 물론이다.
‘세계 어느 도시에서 이런 현상을 볼 수 있겠느냐’는 바이엘러의 긍지는 이런 역사에 근거를 둔 것이다. 바이엘러가 제네바나 파리 등 당대 미술의 중심지를 찾아 떠나지 않고 바젤에 남은 것, 1970년 아트 페어를 창단해 바젤을 세계 미술의 중심지로 만들고 1982년 갤러리 비즈니스를 재단으로 전환시키며 바젤 시에 많은 작품을 기증한 것은 모두 바젤 시민으로서의 긍지와 나눔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오늘날 바젤은 바젤 아트 페어로 전 세계 미술계 인사와 예술 애호가를 불러모을 뿐 아니라 바이엘러 재단을 비롯해 바젤 미술관, 팅겔리 미술관, 비트라 디자인 미술관, 샤우라거 미술관 등 세계 최고 수준의 다양한 미술관이 서로 협력해 예술 도시로서 지향해야 할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다.
1 바이엘러 미술관은 이탈리아의 유명 건축가 렌초 피아노가 설계했다.
2 2012년 바이엘러의 컬렉션 전시가 열린 미술관 내부
그의 성공 비결: 기본, 신뢰, 인간미
바이엘러는 어떻게 성공했을까? 원하는 것은 꼭 손에 넣어야 하며 어떤 작품이든 반값에 사려고 버티는 백만장자 컬렉터 앞에서 바이엘러는 기죽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다른 딜러들은 며칠씩 걸리는 작품값 산정을 앉은자리에서 단 2시간 만에 끝내 고객의 환심을 샀고, 본인과 고객 모두 만족할 만한 조건으로 거래를 성사시켰다. 한편 작품을 해외로 내보내는 것을 꺼리는 이탈리아의 보수적 정책에 대해서는 베니스 구겐하임 미술관을 통해 미국 미술관이 작품을 살 수 있도록 기지를 발휘하기도 했다. 또한 피카소의 조각 작품을 사고 싶어 하는 뉴욕 현대미술관과 절대 팔지 않겠다는 피카소 사이에서 중재해 만족스러운 협상을 이끌어낸 일련의 행보를 볼 때 바이엘러는 자타 공인 타고난 장사꾼임이 틀림없다. 실제 한 딜러는 바이엘러를 ‘레이저처럼 날카로운 두뇌를 지닌 사람’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특별히 미술사를 공부한 것도 아니면서 명작을 척척 알아보는 자질에 대해서도 그저 눈과 마음, 그리고 온몸으로 느낄 뿐이라고 말한 점도 대단히 ‘감’이 발달한 타고난 재주꾼이라는 점을 반증한다.
이렇듯 바이엘러는 현대미술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지만, 그가 남긴 대담집을 보면 동시에 얼마나 겸손한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다.(Christophe Mory, < Ernst Beyeler: A Passion for Art >, Scheidegger & Spiess, 2011 참고. 초판은 2003년 프랑스어로 출판). 칸딘스키의 미망인은 남편이 남긴 유작의 대리인으로 바이엘러를 지목하며 최고의 딜러라고 칭찬했지만 바이엘러는 도리어 “나는 시대를 창조하지 못했다”고 회고했고, 20세기 초기의 딜러들, 즉 앙브루아즈 볼라르는 세잔과 르누아르와 고갱을, 헨리 칸바일러는 큐비즘을, 시드니 재니스는 몬드리안과 브란쿠시와 다다이즘을 지지하며 당대의 선구적 미술을 알아봤지만 자신은 그저 인상주의부터 팝아트에 이르기까지 좋은 작품이 널리 알려질 수 있도록 보급하고 수준 높은 작품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했을 뿐이라며 스스로를 낮추었다. 아마도 이런 차분함과 겸손함, 신사다움이 그의 타고난 비즈니스 능력과 결합해 진실한 성공을 이끌지 않았을까?
클림트의 ‘The Dancer’ 앞에 선
바이엘러 미술관 디렉터 사무엘 켈러
변화와 적응에 민감하게 대응하라
바이엘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사무엘 켈러(Samuel Keller, 1966년~)다. 바젤 출신으로 2000년부터 바젤 아트 페어의 디렉터로 일했으며 2002년 마이애미 아트 페어를 성공적으로 런칭한 인물이다. 켈러가 이렇듯 승승장구한 것은 오랫동안 곁에서 그를 지켜본 바이엘러 덕분이다. 바이엘러는 2008년 켈러를 바이엘러 재단의 디렉터로 스카우트해 재단의 미래를 이끌어줄 것을 부탁했고, 60여 년 전 슐로스의 서점이 바이엘러의 갤러리로 거듭났듯 바이엘러 재단은 켈러라는 젊은이를 맞이하며 다시 젊게 태어나게 된다. 만약 바이엘러가 계속 고서점을 고집하고 갤러리 비즈니스로 만족하며 영리 추구를 목적으로 했다면, 그리고 젊은이들에게 미래의 주역 자리를 넘겨주지 않았다면 바이엘러 재단은 오늘날과 같이 번성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미술관을 운영할 때에도 마치 붙박이처럼 한자리에 작품이 걸려 있는 디스플레이 방식을 피했다. 과거의 미술관들은 미처 생각지 못하고 답습해온 방식이었다. 미술을 잘 모르는 방문객도 미술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시간의 흐름에 따라 구성했고, 각 방마다 테마를 정하되 컬렉션을 주기적으로 교체해 계속 새로운 미술관으로 거듭날 수 있게 했다. 이는 오늘날 미술관이 주로 활용하는 방식이다. 테이트모던 미술관은 1~2년마다 주기적으로 테마를 바꿔 상설 컬렉션을 교체하고 있고, 퐁피두 센터도 특별 전시가 아니면 자료실에 필름으로만 보관되어 있을 비디오 아트 작품을 꺼내 상설전에 소개하는 등 미술관의 혁신과 변화를 꾀하고 있다. 바이엘러의 선견지명을 비단 갤러리 비즈니스뿐 아니라 미술관 운영에도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바이엘러가 갤러리 비즈니스를 하던 당시와 지금의 미술계는 완전히 다른 환경에 처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이엘러는 대담집에서 어느 날 한 여인이 갤러리에 들어와 칸딘스키, 세잔, 고갱의 그림 3점을 즉석에서 사간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세탁부였다가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후, 취미거리를 찾아 막 아트 컬렉션을 시작한 부인이었다. 몇 년 후 너무 많은 작품을 구입하다 빚까지 지게 된 그녀가 찾아와 작품을 되팔고 싶다고 했을 때, 바이엘러는 세 작품을 모두 구입가의 배로 계산해 재구입해주었다. 그녀가 빚을 갚고도 남을 만한 돈을 들고 은행에 찾아가자 그동안 끈질기게 빚 독촉을 해온 은행은 이런 식의 ‘투자’라면 얼마든지 돈을 더 빌려주겠다며 사과했다고 한다.
바이엘러 미술관의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야외 전경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바이엘러는 그림에 문외한인 부인이 명작을 고른 사례를 통해 자신의 직감과 판단을 믿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최근 컬렉터들은 컬렉터가 아니라 마치 딜러와도 같은 행태를 보이고 있다. 재판매 주기도 몇 년에서 몇 달로 점차 짧아지고 있다. 갤러리스트도 마찬가지다. 바이엘러가 한창 활동하던 당시 갤러리스트는 피카소와 뒤뷔페, 프랜시스 베이컨 같은 대가와 직접 만나 대화하고 그들의 고뇌를 이해하며 작품을 프로모션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함께 만들어갔지만, 오늘날의 갤러리스트에게 그런 기회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거장의 작품은 부동산이나 하이 주얼리에 버금가는 값비싼 재화 가치로 인식되고 현대미술의 경계가 확장되는 만큼, 갤러리스트가 일일이 작가를 만나 작품을 이해하고 전시를 기획해 작품을 판매하는 경우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국제화의 물결과 인터넷 등 통신 수단의 발달로 세계는 가까워졌지만, 그런 만큼 그들의 관계는 ‘좁고 깊게’에서 ‘넓고 얇게’로 바뀌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바이엘러도 지적했듯 과거에는 경매가 전문가들 사이의 숨은 시장이었는데 이제는 개인 구매자들이 직접 경매에 참여하고 있어 그에 대한 전략과 대응이 갤러리의 생존 여부를 좌우하게 된 점 역시 과거와 다르다. 아마도 바이엘러가 켈러를 높이 평가한 배경은 바젤 아트 페어를 키워 갤러리 비즈니스를 지속 가능한 형태로 이끌고 마이애미로 진출해 바젤의 이름을 드높인 점 때문일 것이다.
물론 바이엘러는 운도 좋았다. 그의 곁에서 후원한 아내 힐디(Hildy, 1922~2008년)와 여생을 함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바이엘러가 재정난에 처해 아끼던 작품을 팔려 했을 때 만약 작품을 팔면 이혼하겠다며 작품을 끝까지 수호했을 정도로 예술에 대한 사랑이 대단했다. 그런 커플이었으니 미술 작품을 보러 다니고 전시를 기획하는 그 모든 삶의 순간이 생계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행복한 삶의 여정이었을 것이다. 금실 좋은 부부는 한쪽이 먼저 세상을 떠나면 다른 쪽도 오래 살지 못한다는 옛 이야기를 증명이라도 하듯 힐디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바이엘러는 급격히 쇠약해져 1년 6개월 후 아내 곁으로 갔다.
미술 시장은 예술과 비즈니스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것과 같다. 큰돈을 벌어 그 부를 과시할 수도 있고, 또한 그 모든 것을 ‘속물적인 것’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젤이라는 도시가 있고 아름다움을 찾는 아트 여행이 시작될 때 현대미술을 즐기고 작품을 구입하는 것이 라이프스타일의 하나로 자리 잡게 된다. 이 모든 것의 시작에 바이엘러가 뿌린 씨앗이 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바이엘러는 바젤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을 뿐 아니라,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문화훈장을 수훈했다. 그러나 그는 “상을 타는 건 기분은 좋은 일일지 모르지만, 꼭 필요한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외부의 인정이나 평가보다는 무언가를 이루어 스스로를 증명했다는 자기 확신으로 족하다는 의미다. 그는 덧붙여 “상을 받는 것보다 큰 기쁨은 바젤이라는 소도시에서 6000프랑의 빚으로 시작한 작은 비즈니스가 오늘날 20세기의 대표작을 소개하는 미술관으로 변모하고 파리, 뮌헨 등 대도시 시민이 거꾸로 바젤을 방문하는 걸 보는 일”이라고 회고했다. 그가 서거한 지 3년이 지났지만 바젤은 여전히 현대미술과 동의어로 인식된다. 우리가 그 도시 예술의 혜택을 계속 누리는 한 그에 대한 추모 열기는 영원할 것이다.
에디터 김이신 (christmas@noblesse.com)
글 김영애(이안아트컨설팅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