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클리프 아펠이 서울에 불어넣은 움직임의 숨결
도시는 계절마다 새로운 얼굴을 가지지만 어떤 가을은 유독 빛난다. 빛도, 향도, 바람도 아닌 움직임이 공기를 바꾸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2025년 서울이 그랬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반클리프 아펠의 80년의 예술적 서사가 있다.

올가을, 서울은 유난히 많은 수려한 움직임으로 흔들렸다. 오롯이 신체의 언어로 이루어진 조용한 혁명이 도시 곳곳에서 펼쳐진 것. 반클리프 아펠(Van Cleef & Arpels)이 주도하는 ‘댄스 리플렉션 BY 반클리프 아펠(Dance Reflections by Van Cleef & Arpels)’ 페스티벌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열렸다. 한 달 가까이 이어진 이 축제는 현대무용을 중심으로 전승과 교육의 본질적 가치를 새롭게 조명했다. 2020년 프로그램 출범 이후 전 세계 주요 도시에서 현대무용의 지형도를 그려 온 이들이 서울을 새로운 무대로 선택했다는 사실은, 한국의 무용계가 아시아 현대 예술의 중요한 중심으로 성장했음을 방증한다.
무용과 주얼리가 만난다는 것
반클리프 아펠이 무용에 스며든 건 단순한 후원이 아니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무용을 메종의 영감으로 이해했다. 1941년 발레리나를 주얼리에 담으면서 무용의 시간성을 보석의 영원함 속에 새겼다. 그리고 클로드 아펠과 조지 발란신의 우연한 만남은 결국 현대 발레의 상징과 같은 작품 <주얼스(Jewel)>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어쩌면 이들의 만남은 필연적이었을지 모른다. 예술에 대한 메종의 열정은 또 하나의 형식으로 진화했다. 바로 ‘댄스 리플렉션’. 반클리프 아펠 CEO 캐서린 레니에가 말하듯, 이 프로그램은 ‘메종이 오랫동안 지켜 온 무용과의 관계를 가장 오늘다운 방식으로 되살리는 실천’이다.
서울을 움직인 열 개의 작품
서울의 대극장부터 예술공간, 공장 건물을 개조한 실험적 무대까지. 도시의 서로 다른 풍경을 배경으로 10개의 작품이 펼쳐졌다.

16 ©Hai Yang

17 ©Hai_Yang
타오 댄스 시어터 <16 & 17>
동양적 신체 미학을 바탕으로 단순함의 극점을 탐구하는 타오 예의 대표 시리즈로, 가장 근본적인 질문 ‘신체는 어디까지 단순할 수 있는가’에서 출발한다. 무용수들은 군집이 되었다가 흩어지고, 빛과 그림자가 구분되지 않는 한 덩어리로 존재한다. 밀도 높은 원운동과 반복되는 구조 속에서 인간의 몸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조형물이 된다.

Room with a view ©Ryo Yoshimi Courtesy of kyoto experiment
(LA)HORDE × Rone × 마르세유 국립 발레단 〈룸 위드 어 뷰(Room With a View)〉
거대한 채석장과 기계 문명을 연상시키는 무대 위에서 론의 전자음악 사운드와 결합된 집단적 움직임은 혼돈, 붕괴, 그리고 저항을 압축한 거대한 파동처럼 밀려온다. 기계적이면서도 인간적인, 묘한 감정의 지층을 건드린다. 전자음악, 산업적 이미지, 그리고 무용수들의 집단적 에너지가 뒤엉켜 오늘의 혼란을 생생히 기록한다.

Loie Fuller: Research ©Martin_Argyroglo
올라 마시에예프스카 〈로이 풀러: 리서치(Loie Fuller: Research)〉
19세기 전설적 무용가 로이 풀러의 서펜타인 댄스를 현대적 감각으로 풀어낸 시간 여행 같은 작품이다. 실크와 빛, 회전하는 신체의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장면은 마치 필름 속 몽환적인 잔상처럼 남는다. 고전적 이미지가 동시대의 감각으로 치환되는 순간을 예민하게 포착한다.

Save the last dance for me ©MAK
알렉산드로 시아르로니 〈마지막 춤은 나를 위해(Save the Last Dance for Me)〉
볼로냐의 전통 춤 ‘폴카 치나타’를 복원해 현대 무대로 되살린 작품으로 서로 맞잡은 두 남성의 몸이 회전하고 기울며 만들어내는 궤적은 전통과 현대의 간극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단순한 복원이 아니다. 과거의 춤과 현재의 몸이 만나는 순간, 전승이란 단순히 이어받는 것이 아니라 새로이 살아나게 하는 행위임을 증명한다.

THE DOG DAYS ARE OVER ©Alwin Poiana
얀 마르텐스 〈도그 데이즈 오버 2.0(THE DOG DAYS ARE OVER 2.0)〉
무용수들은 점프만으로 70분의 공연을 채운다. 리듬은 일정하게 유지되다가 미세하게 무너지고, 다시 결집하며 새로운 구도를 만들어낸다. 안무가의 권위를 최소화하고 무용수의 신체적 개성을 최대화함으로써 점프라는 단순함 안에 무한한 차이를 새겨 넣는 도발적인 무대다.

We Wear Our Wheels With Pride ©Jerome_Seron
로빈 올린 〈바퀴를 두른 사람들(We Wear Our Wheels with Pride)〉
남아공 현대무용단과의 협업으로 완성된 무대는 단순히 춤을 보여주는 순간이 아니라, 삶의 에너지를 무대 위로 옮겨온 듯한 힘을 갖는다. 라이브 보컬과 타악의 진동은 서울이라는 도시 위에 또 다른 호흡을 새긴다. 춤이 공동체의 기억을 어떻게 품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1 degree Celsius ©Asia Culture Center
허 프로젝트 〈1도씨(1 Degree Celsius)〉
서울을 기념하는 새로운 목소리도 있다. 지구 온도 상승 데이터를 바탕으로 소리, 빛, 움직임의 구조를 만들어 기후 위기를 설명하는 대신, 관객이 무대의 체온 변화를 직접 느끼도록 한다. 과학적 데이터가 예술적 감정으로 변환되는 것. 환경 위기의 감각을 직접적인 몸의 진동으로 느끼게 하는 강렬한 메시지이다.

Carcaca ©Claudia Crespo
마르코 다 실바 페레이아 〈카르카사(C A R C A Ç A)〉
무대 위에서 클럽 문화, 민속 춤, 그리고 리듬의 집단성이 교차한다. 마르코 다 실바 페레이아 특유의 에너지와 비트는 관객을 무대 가장자리까지 끌어들인다. 춤이 집단 정체성을 어떻게 구성하는지를 강렬히 보여준다.

900 Something Days ©Philippe Lucchese
네모 플루레 〈900며칠, 20세기의 기억(900 Something Days Spent in the XXth Century)〉
옛 공장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 작품은 산업화 시대의 잔재와 현대적 신체의 충돌을 탐구한다. 공간 자체가 작품의 중요한 레이어가 된다. 예술가의 시선으로 다시 구성된 산업화 이후의 잔영들, 그리고 공장이라는 공간에서 메아리처럼 울리는 유로댄스 비트는 도시의 또 다른 풍경을 환기시킨다.
예술을 보는 방식의 확장
‘댄스 리플렉션 BY 반클리프 아펠’이 특별한 이유는 무대에만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아트 레지던시, 교육 프로그램, 그리고 전문가와 비전문가를 아우르는 워크숍을 통해 무용을 일상 속 감각으로 옮겨오려 한다. 댄스 및 문화 프로그램 디렉터 세르쥬 로랑은 ‘무용은 인간이 가진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언어’라고 말한다. 그의 말처럼, 이 페스티벌은 서로 다른 문화권의 무용수와 안무가, 그리고 관객이 동일한 ‘움직임의 언어’로 만나는 자리다. 무용은 종종 가장 고요한 예술이지만, 한편으로 가장 급진적이기도 하다. 신체의 움직임만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사회를 비추며, 미래를 상상하는 일. ‘댄스 리플렉션 BY 반클리프 아펠’은 바로 그 근본적인 힘을 한국에서 만개시켰다.
올가을 서울은 보석처럼 빛나는 움직임들로 가득 채워졌다. 반클리프 아펠의 유산과 예술가의 열정, 그리고 도시의 에너지가 겹쳐진 서울에서 우리는 어떤 새로운 감각을 발견했는가. 정답은, 아마도 몸이 먼저 알고 있을 것이다.
에디터 소희진(shj@noblesse.com)
사진 반클리프 아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