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60년
1956년 데뷔 이후 영화와 브라운관을 종횡무진 오가며 ‘국민 배우’라는 타이틀을 얻었지만 평생 배우로 살아오면서 그가 지금 이 순간도 놓지 않는 것은 바로 연극이다. 연극과 영화, 드라마가 구분되는 ‘어떤 지점’을 늘 날카롭게 주시하는 배우 이순재에게 연극은 시대를 초월하는 예술이고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하게 보편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창구다.

새로운 드라마가 한 편 뜨면 주인공도 덩달아 하루아침에 뜬다. 일명 ‘스타 탄생’이다. 드라마가 막을 내리기도 전에 광고 제안이 물밀 듯이 쏟아지고 예능 프로에서는 스타를 모셔가기 바쁘다. 스타의 일거수일투족은 SNS를 달구고 그들이 나타난 브랜드 행사엔 취재진이 벌 떼처럼 몰려든다. 간혹 그중 몇몇은 드라마가 끝나고 자신의 미흡한 연기력과 작품 해석 능력, 대사 전달력 등을 보완하고 문제점과 해결책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조금씩 진짜 배우의 길로 접어들기도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대부분은 도태되기 일쑤다.
배우가 되는 건 스타 탄생과는 다르다. ‘하루아침에 배우가 된’ 연기자를 생전 들어본 적 없듯, 배우가 되는 제1의 전제 조건은 절대적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무대에서 보냈느냐’다. 얼마만큼 ‘훈련되었느냐’다. 국민 대부분이 명배우로 손꼽는 송강호나 최민식, 김윤식, 설경구, 황정민, 김명민, 하정우, 유해진이 보여주는 연기의 뿌리는 모두 하나다. 그들은 연극을 통해 꾸준히 내실을 다졌고, 무대에서 연기에 대한 투혼을 아낌없이 증명했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어둡고 배고픈 무명의 터널을 뚫고 스타가 된 사람들이다. 이 시대의 다양한 아버지상을 누구보다 많이, 그리고 제대로 표현한다는 평을 받는 배우 이순재의 시작도 바로 연극 무대였다.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의 주요 장면
서울대학교 철학과 54학번으로 입학한 그는 대학 시절 연극 동아리에 발을 들이며 전공 강의실보다 연습실 무대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가 이토록 연극에 빠진 이유는 단순하다. 그 당시 대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던 여가 선용 방법이 연극이었기 때문. 동아리 활동으로 시작한 연극은 그에게 전공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고, 학과 교수들은 그의 활동을 묵묵히 지원했다. 4학년 졸업논문을 앞둔 그가 연극 합숙훈련으로 무려 3주간, 주임교수던 고형곤 박사(전 고건 총리의 아버지로 칸트 철학의 대가)의 수업에 빠져야 했을 때 고 박사는 “연극도 철학이니 열심히 해보라”고 격려하며 응원을 보냈고, 헤겔 철학의 대가로 알려진 박종흥 교수 또한 연극에 대한 넒은 이해와 포용력으로 그의 연극 무대를 늘 지지해주었다.
연극에 몰입하면서 그는 이해랑 선생이 늘 강조하던 ‘돈이나 명성, 인기 등을 버리고 연극 그 자체에 전념하고 몰입하는’ 연극 정신에 더욱 매료되었고, 그것은 그가 1961년 <나도 인간이 되련다>로 TV에 데뷔한 후에도 꾸준히 연극 무대에 서게 한 버팀목이 됐다. 샹송 가수 에디트 피아프의 삶을 다룬 한국 토종 뮤지컬 <빠담빠담빠담>, 1970년대에 한국 초연으로 많은 관객을 불러모은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비롯해 안톤 체호프의 <벚꽃 동산>을 포함한 4대 희극과 셰익스피어의 작품 등 고전 연극 무대를 통해 그는 20대와 30대를 온전히 연기에 대한 고민에 바쳤다.
“1960년대 신인 배우는 신성일 씨가 대표적이었어요. 그 이후 그에 비할 만한 신인 배우가 없었다고. 잘생긴 연기자는 많았어요. 근데 몇 작품 하면 나가떨어져요. 기본도 안 된 연기자를 외모만 보고 배우를 시켜서 그래요. 연기 훈련이 전혀 안 된 배우들이었지. 우리처럼 작업에 대한 본질과 그 가치를 알고 도전하는 사람들하고 스타로 반짝 뜬 사람들은 의지가 달랐어요.”
연극 무대에서 연기의 장을 묵힌 배우들은 대사 암기력 또한 남다르다. 특히 이순재의 대사 암기력은 업계에서 익히 소문난 부분. 이번에 다시 합류한 아서 밀러의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주인공 윌리 로먼 역을 맡은 그는 3시간의 공연을 위해 약 580마디의 대사를 외워야 한다. “우리 작업이 본래 암기에서 시작돼요. 과거 한국 영화가 10년 정도 후시녹음을 하던 때가 있었는데, 그 시절을 제외하고는 영화, 드라마, 연극 모두 암기력을 전제로 합니다.” 일단 암기를 잘하기 위해선 작품의 내용과 주제, 맡은 배역의 성격 등을 명확히 파악해야 한다. 연극 동아리 시절부터 그게 습관이 된 그는 그래서 애드리브도 일절 안 한다. 아니, 용납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맞다.
“개그 프로에선 애드리브가 필요합니다. 동숭동에서도 애드리브를 많이 활용하는 연극은 아예 따로 있어요. 그렇지만 드라마나 정통 연극에서는 상대 배우나 작가, 연출가와 사전에 약속한 것 외에 본인 맘대로 애드리브를 해서는 안 돼요. 그런 배우가 있으면 난 반드시 지적해요. 애드리브는 자기과시예요. 일종의 욕구죠. 그런 것이 상대 배우의 연기에 영향을 미치면 안 됩니다.”
그가 즉흥연기를 참지 못하는 건 앞서 말했듯 고전 연극으로 연기를 시작한 이유가 크다. 대문호가 쓴 명대사를 배우 맘대로 손상시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한 일이기 때문. 더구나 그 당시 TV와 라디오 드라마는 문단에 등단한 작가의 작품이 대부분이던 때가 아닌가. 작가들은 배우들에게 접속사 하나까지 정확하게 읽도록 했고, 어떤 작가는 대사를 언제 끊어 읽고 언제 숨을 쉬어야 하는지까지 체크했다. “대본한 줄 한 줄 수없이 연구하고 고심해서 쓴 작가의 대사를 배우 맘대로 바꿀 수는 없어요. 작가가 얼마나 연구하고 고민해서 고른 단어고 문장인데요. 그런 작가와 연출가랑 오랜 시간 일해왔기 때문에 정확하게 대사를 전달하는 것이 몸에 배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일부 작가의 대본은 문맥이 통하지 않는 문장이 많다. 막장 드라마인 경우는 그 수위가 더 심하다. 그런 대본을 받으면 이순재는 작가가 있는 앞에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토론한 후 올바른 문장으로 바꾼다. 극의 주제와 내용을 제대로 표현하고자 하는 굳은 의지다. 이런 그를 예전 어떤 기사에서는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연기로 보는 사람들을 감탄하게 한다. 후배 연기자들에게 마치 ‘연기는 이렇게 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것 같다”.
1956년에 연극 <지평선 너머>로 데뷔한 이후 1961년 KBS 개국 첫 드라마 <나도 인간이 되련가>를 통해 브라운관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지금껏 200여 편의 영화에서 주연과 조연을 오가며 선이 굵은 이순재식 연기를 선보여왔다. 특히 한국 영화가 초창기 붐을 이룬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에는 한 달에 꼬박 25일 정도를 밖에서 숙식하며 매년 20편 이상의 영화에 출연했고, 평균 4~5편의 드라마를 찍었다. 특히 드라마에서 그의 진가가 발휘되었는데 1970년대에는 <인목대비>, <사나이들>, <천여화>, <그리워 그리워>, 1980년대에는 <제1공화국>, <풍운>, <보통 사람들>,

그를 대표하는 필모그래피는 이렇게 넘치지만 <사랑이 뭐길래>의 대발이 아버지 이상으로 애착을 보인 배역은 따로 있다. “나로서는 최선을 다한 작품 중 하나가 1982년에 한 <풍운>이란 작품이에요. 거기서 흥선대원군을 맡았는데, 작품을 시작하면서 담배를 끊을 정도로 굳은 의지를 가지고 시작했죠. 언론 통폐합(1980년 11월, 신군부 세력이 언론을 장악하기 위해 강제로 언론 매체를 폐지, 통합한 조치) 직후이기도 했고 개인적으로 2~3년 공백이 있던 때라 이 작품에서 뭔가를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과거 드라마에서 흥선대원군 배역은 모두 체격이 큰 배우가 맡았다. 그러나 실제 대원군은 단신에 체격 또한 왜소한 인물. “말하자면 대추씨 같은 사람이었다고. 나같이 작은 대원군은 처음이었을거예요. 그래서 더욱 그 역할을 제대로 해보고 싶은 욕심이 났어요. 대본을 봤을 때도 ‘이 작품 틀림없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거든요.”
맡은 배역마다 이순재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그는 <거침없이 하이킥>과 <꽃보다 할배>를 통해 우리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안겼다. 특히 <거침없이 하이킥>에서는 사소한 일에 쉽게 흥분하는 할아버지 한의사로 등장해 ‘야동순재’라는 별명까지 얻으며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다. 역대 최고령으로 MBC방송대상에서 <무한도전> 팀과 공동 대상 수상이라는 쾌거를 이루자 사람들은 “이순재가 예능으로 영역을 확장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생각이 다르다. “시트콤을 우리 방송에서 분류를 잘못해놓아서 그렇지 원래 드라마예요. 배우가 뭡니까. 분장하는 사람이에요. 분장은 ‘이제부터 내 얼굴을 버린다’는 겁니다. 시트콤도 그래요. 극 중에서 편의상 실제 내 이름을 사용하긴 하지만 그건 완전한 드라마였죠. 그 작품 정말 재미있었어요. 그즈음 각 방송사마다 시트콤의 부활을 이야기한 것도 아주 긍정적이었다고 생각하고요.” 평균연령 76세, 넷이 합쳐 302세, ‘고령화 배낭족’이라는 타이틀을 내세우며 예능의 흥미와 다큐의 교훈을 함께 접목한 <꽃보다 할배>도 이순재에게는 예능 프로가 아니었다. “난 그걸 여행기로 접근했어요. 우리가 평생 연기하면서 어디 맘 놓고 길게 여행을 가본 적이 있었나. 근데 여행 보내준다고 하니 좋더라고. 더구나 친한 배우들이 다 같이 가니 얼마나 흥이 나요. 그리고 거기에 나와 동료들, 그리고 시청자에게 어떤 메시지를 남겨줄 수 있는 여행기가 되었으면 하고 바랐고, 그래서 아주 열심히 찍었어요.”
인간 이순재를 들여다볼 일이 적은 시청자에게 <꽃보다 할배>는 좋은 기회였다. 그레이순재, 야동순재라는 별명을 가진 그에게 이 프로그램은 ‘직진순재(지도 보고 앞만 보고 간다 하여)’라는 새로운 별명을 붙여줬다. 팀의 리더로서 박근형과 백일섭, 신구를 이끌고 대만, 스페인, 그리스 등을 섭렵한 그는 드라마를 할 때처럼 그 역할에 자신만의 색다른 열정을 보이며 시청자에게 다큐 이상의 묵직한 감동을 안겼다. 특히 스페인으로 향하는 기내에서 12시간 내내 눈 한 번 붙이지 않고 스페인 여행서를 정독하며 촬영팀의 목적지와 이동 루트 등을 꼼꼼히 살피는 모습, 각 랜드마크에 대한 정보를 메모하고 스페인어의 일상 어휘와 문장을 반복해 외우는 장면은 보는 이를 숙연케 했다. “나이 먹었다고 어른 행세하고 대우나 받으려고 하면 그렇게 늙어버리는 거고, 난 아직도 한다 하는 마음으로 하면 되는 거예요”, “우리 나이쯤 되면 내가 언제 어떻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런 건 잊어버리고 닥치면 닥치는 대로 이겨나가면 되는 거야”, “팔십이라는 건 빨리 잊어버려야지. 아직도 육십이구나 하고 살아야지” 등등 <꽃보다 할배>에서 그가 시청자에게 전한 삶의 철학과 가치를 통해 우리는 ‘진정한 레전드의 모습은 주변을 올바른 길로 이끄는 등대와 같은 역할’에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시청자뿐 아니라 동료들까지 입을 모아 인정하는 그를 위해 후배들이 꾸린 ‘배우 이순재 연기 인생 60주년 기념 사업회’가 주최한 이번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에선 평소 그를 따르던 후배 연극인들이 출연을 자처하며 훈훈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노부부 각자의 가슴에 묻어둔 진심과 아련한 사랑을 그려낸 <사랑별곡>에서 호흡을 맞춘 연극배우 손숙부터 연기파 배우 이문수와 맹봉학, 김태훈 김기무, 유정석, 이무생 등의 젊은 연극인까지 가세해 오는 1월 14일까지 광주와 서울, 대전을 투어할 예정. <세일즈맨의 죽음>은 뉴욕 브루클린의 평범한 세일즈맨 윌리 로먼이 실직 후 좌절과 방황 끝에 자살을 택하는 단 하루 동안의 이야기다. 기자회견이 있는 날까지도 무대 한편에서 상대 배우도 없이 수많은 대사를 홀로 연습할 정도로 완벽에 완벽을 기하지만 실제 공연은 늘 아쉽고 부족한 것 투성이다. “광주와 서울 공연에서 딱히 큰 실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완벽하다고 할 순 없어요. ‘연기’라는 행위 자체가 완성이나 종결이 없단 말이에요. 하다 보면 늘 부족할 수밖에 없죠. 그래도 그 안에서 새로운 창의력이 생기니 그걸 채워나가면서 완성의 단계로 끌고 가는 것이 연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는 이번 연극을 마무리하는 대로 영화 <덕구> 촬영에 합류한다. 시골에서 다문화가정의 손주를 돌보며 살아가는 할아버지의 눈물겨운 이야기다. “영화 때문에 인도네시아로 촬영을 가요. 집 나간 며느리 찾으러.(웃음) 아마도 <세일즈맨의 죽음>보다 관객을 더 많이 울릴 것 같아요. “며느리를 찾아 헤매며 새해를 시작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2017년 한 해가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희망과 도약의 해가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혼란스러운 정국이 이제 종국에 가까웠으니 어서 빨리 진정되고 새해에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한 단계 성장하는 시간이 됐으면 좋겠어요.” 가슴 간질이는 대사보다 화살처럼 콕 상대방의 가슴에 박히는 대사를 훨씬 많이 읊어댄 대배우답게 그는 인사하고 돌아서는 순간까지 한마디를 더했다. “그러려면 정치하는 사람들이 잘해야죠!”
About Him
2015년 제10회 골든티켓어워즈 연극 남자배우상
2012년 거창국제연극제 홍보대사, 수원화성국제연극제 홍보대사
2009년 제6회 방송인 명예의 전당 헌정
2008년 MBC연기대상 PD상
2007년 MBC방송연예대상 대상 <거침없이 하이킥>, <무한도전>팀과 공동 수상
2002년 MBC 명예의 전당, 보관문화훈장(3등급)
1982년 제9회 한국방송대상 TV연기상 <풍운>
1974년 TBC연기대상 대상 <연화>, <사나이들>
1972년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 <분례기>
1971년 연기자협회 초대 회장
1966년 백상예술대상 연극 부문 연기상
에디터 김이신(christmas@noblesse.com)
사진 김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