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을 벗다
새로 부임한 수장 티에리 에스링거(Thierry Esslinger)는 시계 명가 브레게를 어떻게 이끌지에 대한 명확한 청사진을 갖고 있다.

브레게의 CEO 티에리 에스링거. 그의 뒤에 걸린 사진은 새로운 세대의 마린 5517 컬렉션.
바젤월드 2018의 개막을 두어 달 앞두고 브레게의 한국 홍보 담당자1에게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새로운 사령탑이 된 티에리 에스링거의 첫 번째 공식 인터뷰를 요청한다는 내용이었다. CEO로 부임한 후 첫 인터뷰인 데다, 그것을 한국 그리고 <노블레스>를 통해 전한다고 하니 뭔지 모를 부담감과 새로운 사람을 만나 한 브랜드의 미래를 들을 기대감이 뒤섞여 머릿속은 암전된 것처럼 거멓게 변했다. 그것도 잠깐, 구글링을 통해 그에 대한 뉴스를 찾기 시작했다. 정말 첫 인터뷰가 맞았다. 섬네일 크기의 사진도, 그에 대한 이력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브레게 본사에 공식 프로필을 요청해 그가 걸어 온 길을 확인했다. 1963년 프랑스 오랭 지역에서 태어난 에스링거는 엔지니어링과 경영학을 전공한 후 독일의 철강 기업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1995년부터 취리히에 위치한 하이예크 엔지니어링(Hayek Engineering AG)의 경영 컨설턴트로 근무하다 2017년 9월 브레게의 CEO로 새 커리어를 이어간다. 시계에 조예가 깊은 이라면 ‘하이예크’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을 듯한데 바로 1970년대 쿼츠 파동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 스위스 시계 산업의 부흥을 이끈, 스와치 그룹의 전 회장 니콜라스 하이예크(2010년 타계)가 세운 회사다. 그곳에서 에스링거는 브레게를 비롯한 스와치 그룹의 핵심 프로젝트를 이끌며 지금의 브레게가 있기까지 묵묵히 일해왔다. 그의 행보는 여타 CEO와는 사뭇 달랐다. 그래서 그를 더 빨리 만나고 싶었고, 그가 말하는 브레게의 미래가 궁금해졌다.

1 에스링거가 착용한 시계로, 알람 기능을 갖추고 티타늄 소재로 완성한 마린 알람 뮤지컬 5547.
2 바젤월드 2018에서 새로 선보인 클래식 투르비용 엑스트라-플랫 오토매틱 5367.
바젤월드 개막날, 마침내 브레게 부스에서 그를 만났다. 온화한 표정이지만 날카로운 눈빛, 역시 CEO답다는 생각이 절로 떠올랐다. 늦게나마 축하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많은 사람과 함께 일하는 스와치 그룹, 그중에서도 시계 역사상 중대한 업적을 남긴 브레게를 이끌어가야 해서 책임이 막중합니다. 다행히도 브레게에는 우수한 인재가 대거 포진해 있습니다. 브랜드의 원동력이라 할 수 있는 매뉴팩처에는 창업자 아브라함-루이 브레게가 창조한 워치메이킹 노하우를 고스란히 이어가며 혁신적 기술력을 융합하는 워치메이커가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의 가족이자 브레게의 보물이라 할 수 있죠. 물론 브레게의 지속적 성장을 위해 노력하는 이들의 수고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생각해보면 아브라함-루이 브레게 그리고 브랜드 브레게가 워치메이킹 분야에서 이룬 업적은 실로 대단하다. 리피터 시계의 핵심인 공(gong,해머가 내리치는 가는 스프링 형태의 부품)을 무브먼트 가장자리에 두르는 형태를 고안한 것도, 충격 흡수 장치인 파라슈트를 개발한 것도 그다. 게다가 다이얼에 새기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기요셰 패턴, 중간에 동그란 창을 낸 블루 스틸 핸드의 고안 역시도! 무엇보다 중력을 상쇄하는 투르비용을 개발한 건 당시 시계 산업의 혁명과도 같았다. “우리의 혁신은 브레게의 오랜 역사와 전통에서 찾을 수 있어요. 1775년부터 시작된 전통 방식의 시계 제작은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과거 회중시계를 그대로 손목으로 옮겨온 클래식이나 트래디션 컬렉션처럼 말이죠. 혁신은 결코 우연히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여기서 궁금증이 생겼다. 전통은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새로운 세대,즉 젊은 시계 애호가를 위해 브레게가 특별히 마련한 전략에 대해 말이다. “시대의 흐름에 자연스레 녹아드는 건 무척 중요한 일입니다. 브레게 특유의 진중하고 우아한 기품을 유지하는 동시에 좀 더 젊고 역동적인 모습도 필요하죠. 그 역할을 마린 컬렉션이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올해 마린 컬렉션의 모습을 대대적으로 바꾸는 데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인상적인 컴플리케이션 기능 외에도 현대적이고 미학적인 코드를 통해 새로운 세대에게 어울리는 마린을 재정의했다고 할 수 있죠. 티타늄을 케이스 소재로 사용한 3종의 시계는 분명 젊은 세대에게 큰 반향을 일으킬 거라고 자신합니다.” 올해 브레게는 마린 컬렉션을 정비하는 동시에 ‘Race for Water’ 재단과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이 재단은 해양생태학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진행하는 단체로 플라스틱의 환경오염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해양 보호를 위해 앞장선다. 브레게는 이들이 벌이는 수자원 및 해양 생태계 보존을 위한 프로젝트에 다양한 방법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을 예정이라고. “최근 우리가 보여주는 다양한 행보 중 클래식 투어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영국 런던을 시작으로 서울에서도 지난해 12월 성공리에 마쳤죠. 우리의 시그너처 컬렉션인 클래식과 남성들이 향유할 수 있는 다양한 문화를 절묘하게 융합하는 시도는 기존 고객뿐 아니라 한국의 젊은 신사들에게도 긍정적인 피드백을 얻었습니다.” 에스링거는 클래식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한국 여성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는 레인 드 네이플과 최근 여성용 라인을 확장하며 기계식 무브먼트의 미학을 전하는 트래디션 컬렉션에 대한 얘기도 빼놓지 않았다. 기계식 시계를 향한 여성 고객의 사랑이 반가운 듯하다. 이런 그에게 유서 깊은 브랜드를 이끌어갈 수장으로서의 포부를 물었다. “브레게가 남긴 족적은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저는 이 아름다운 유산을 유지하고 더욱 발전시켜나가고자 합니다. 특히 오래된 타임피스의 복원, 하이 컴플리케이션 분야의 꾸준한 성장 그리고 젊은 세대를 위한 새로운 컬렉션 개발에 힘쓸 겁니다. 전통과 혁신을 아우르는 것이야말로 브레게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입니다.”
에디터 이현상(ryan.lee@noblesse.com)
사진 제공 브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