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는 런던
영국 왕립미술원이 정석의 길을 밟으며 재오픈한 반면,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지하 공간에서는 대안을 제시하는 새로운 행보가 펼쳐졌다. 지금 런던은 어느 때보다도 분주하다.

새 단장을 마친 영국 왕립미술원
돌아온 왕립미술원
교육과 전시를 통해 예술과 대중을 잇고 이를 장려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한 영국 왕립미술원(Royal Academy of Arts, RA)은 1768년 처음 문을 열었다. 매해 수준 높은 전시를 선보이는 것은 물론 영국에서 유일하게 등록금을 내지 않는 중요 예술 교육기관으로 윌리엄 터너, 에두아르도 파올로치, 트레이시 에민, 앤터니 곰리, 노먼 포스터, 데이비드 치퍼필드 등 많은 예술가와 건축가가 이곳을 거쳐갔다.
유구한 역사를 이어온 지 올해로 250년, RA는 올해 데이비드 치퍼필드의 건축 디자인으로 더욱 견고하게 다시 태어났다. 대규모로 진행한 레노베이션 중 하이라이트는 ‘벌링턴 하우스(Burlington House)’. RA의 핵심 전시 공간으로 활용해온 이곳을 맞닿아 있는 ‘6 벌링턴 가든(6 Burlington Gardens)’까지 대폭 확장했다. 서로 다른 미감을 지닌 두 건물을 연결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치퍼필드는 기본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노출 콘크리트와 군더더기 없는 단순한 디자인의 다리로 두 건물을 연결해 균형을 맞춘 것. 한편, 25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RA 원형 강당도 전시장으로 변신했다. 터너, 컨스터블의 작품이 포함된 RA의 주요 컬렉션과 잠피에트리노(Giampietrino)가 그린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모형이 여기에 자리 잡았다. 그것도 영구적으로. 이제 RA는 언제나 양질의 예술을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진화했다.

영국 왕립미술원의 아키텍처 스튜디오.
RA가 개관 250주년을 기념하는 방식은 단순히 건물 가꾸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날을 빛내고자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 그레이슨 페리(Grayson Perry)가 큐레이팅을 맡은 전시 <250th Summer Exhibition>을 때맞춰 개최했다. 이름 모를 아마추어 화가부터 애니시 커푸어, 데이비드 슈리글리, 데이비드 호크니, 뱅크시까지 RA는 지금 가장 눈길을 끄는 예술을 보여주고자 1300여 점에 달하는 작품을 한데 모았다. 또한 이들을 새롭게 확장한 공간에 집중 설치해 공간과 작품을 동시에 보여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도모하기도. 더욱 흥미로운 건 전시한 모든 작품이 구입 가능하다는 점이다. 물론 이름이 알려진 작가의 작품이야 그들의 가치만큼 고가지만 가능성 있는 신진 작가의 작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올봄 소프트 오프닝은 아리아나 파파데메트로 풀로스(Ariana Papademetro-poulos)를 소개했다.
기대하지 못한 곳에서 만나는 예술
런던에서 의외의 공간이 갤러리로 탈바꿈하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다. 고풍스러운 호텔이 갤러리로 바뀌거나 모델하우스, 카페 그리고 레스토랑에서도 종종 전시를 만날 수 있다. 이 같은 시도는 런던 아트 신을 환기하지만 대부분 단발성에 그치는 경우가 많아 아쉬움을 남기곤 했다. 그런 점에서 올해 초, 앤토니아 마시(Antonia Marsh)가 오픈한 소프트 오프닝(Soft Opening)은 이례적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앤토니아는 뉴욕에서 기획한 레지던시 프로그램 ‘The Girls Only’로 이름을 알린 뒤 런던, 코펜하겐에서 성공적 큐레이팅을 이어간 인물이다. 세계 곳곳을 떠돌던 그녀가 예술을 본격적으로 알릴 공간을 찾고 있을 때, 런던의 한 장소에 마음을 뺏겼다. 바로 관광객이라면 꼭 방문하는 곳, 퇴근시간만 되면 많은 이용객으로 통제되는 곳, 런던에서 가장 바쁜 피커딜리서커스 전철역이다. 앤토니아는 이곳을 오가며 갤러리를 지하철역에 오픈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왜? 대중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지하철역에 갤러리를 열어 그들이 예술에 대한 열린 생각을 이어가게 하기 위해서다. ‘갤러리는 단지 작품을 파는 곳인가, 아니면 영감의 원천인가?’라는 물음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관람객과 예술가의 만남에 대한 고찰까지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자 문을 연 소프트 오프닝. 이미 지하철역이란 장소 선택만으로도 대중에게 다양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라이언 맥긴리도 소프트 오프닝을 거쳐갔다.
한편, 피커딜리서커스는 런던에서 제일가는 상업지구다. 치솟는 땅값으로 이제는 젠트리피케이션을 넘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마저 감돌고 있다. 그래서일까? 라이언 맥긴리(Ryan McGinley)를 비롯한 영국 신예 작가들을 중심으로 탁월한 프로그램을 선보이는 소프트 오프닝은 피커딜리서커스라는 장소에 예술로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을 거란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다. 그 인기에 힘입어 앤토니아는 자신의 집 지하실에 제2의 소프트 오프닝을 열 계획을 세우고 있다. 런던에서 가장 공적인 장소에 이어 아주 사적인 장소까지, 그녀의 집에 꾸릴 제2의 소프트 오프닝이 벌써 기대를 모으는 건 당연하다.

더 넓은 공간으로 이사한 선데이 페인터.
떠오르는 남부 아트 신
런던에서도 높은 범죄율과 빈곤율로 악명 높은 남쪽 지역 페컴. 예술과 인연도 전무한 이곳에 갤러리를 연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한데 ‘선데이 페인터(The Sunday Painter)’의 두 디렉터, 윌 자비스(Will Jarvis)와 해리 비어(Harry Scoging Beer)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캠버웰 예술대학(Camberwell College of Arts)을 졸업한 두 친구는 거창한 욕심 없이 친구들에게 작품을 보여주고자 학교 근처인 페컴에 갤러리 터를 잡았다. 두 예술 학도의 안목은 남달랐다. 실험적 전시를 거듭한 덕에 선데이 페인터는 남부 지역 아트 신을 이끄는 갤러리로 부상했고, 성장을 거듭해 올해 페컴에서 벅스홀로 자리를 옮겼다. 그것도 2배 넓은 공간으로. 2층 구조의 건물은 건축가 샌체즈 벤턴(Sanchez Benton)이 주도했으며, 재개관 전시는 미국 작가 신시아 데이그노(Cynthia Daignault)가 장식해 예술성을 한껏 끌어올렸다. 예술가를 우선시하고 끊임없이 지역과 소통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겠다는 선데이 페인터의 예술을 향한 열의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여기에 데이미언 허스트의 ‘뉴포트 스트리트 갤러리(Newport Street Gallery)’, 예술가들의 허브 ‘페컴 레벨스(Peckham Levels)’ 그리고 올해 9월 오픈을 앞둔 뉴크로스게이트의 ‘골든 스미스 대학교 갤러리(Goldsmiths Centre for Contemporary Art)’까지 가세해 남부 지역 예술에 힘을 더하고 있다. 이들의 약진으로 런던의 예술 지형도는 남부를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에디터 이효정(hyojeong@noblesse.com)
글 양혜숙(기호리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