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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드, 도시의 새로운 미학

LIFESTYLE

채우고 쌓는 데 골몰하는 건축에서 비우고 덜어내는 보이드로 도시의 풍경이 변화하고 있다.

건축에서 보이드(void)란 비움의 미학을 말하는 단어. 간단히 말하면 텅 빈 공간이다. 기원전 120년경 건축한 로마의 판테온(Pantheon)을 보이드라는 관점에서 보면 도시 쪽으로 입을 벌린 구멍이 관문 역할을 수행하는데, 방문자가 자연스럽게 신의 영역임을 감지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판테온의 클라이맥스는 돔 천장 정중앙에 뚫린 지름 9m의 구멍 오쿨루스(Oculus). 이는 우주와 교감하면서 인간과 신의 경계를 지우는 종교적 의미를 갖는다. 보이드로 인해 사람은 안과 밖이 모호한 중간 지대에 서게 되고, 지구와 우주를 연결하는 매개체가 된다. 설치미술가 제임스 터렐의 작품은 풍경과 하나 되는 보이드를 보여준다. 제임스 터렐의 대표작 ‘스카이스페이스(Skyspace)’는 관람자가 작은 방 안 천장에 뚫린 구멍을 통해 하늘을 보게 하는데, 천장의 색이 수시로 변하면서 실내 공간과 하늘의 경계가 사라지는 착시를 경험하게 한다. 이처럼 보이드는 서로 다른 공간을 둘로 구분하거나 단절시키지 않고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보이드를 통해 건축물은 육중하고 단단한 물체가 아닌 변화하는 풍경의 일부로 인식된다.

보이드는 상대적 개념으로 ‘채운다’는 의미의 솔리드(solid)와 비교할 때 그 실체가 좀 더 명확해진다. 막힌 것을 뚫어주고 채운 것을 비우는 것이 보이드. 대표적으로 개선문 타입의 전통적 보이드가 있다. ‘현대카드 뮤직라이브러리’는 한강을 조망하는 관문의 형태로 도로 주변으로 건물이 답답하게 늘어선 거리 한복판에 큰 여백을 두어 보행자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과대포장에 열 올리는 주변 건물과 달리 스스로 텅 빈 공간으로 만들어버린 뮤직라이브러리는 역설적으로 주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축물이 되었다. 판교 IT단지 중심에 위치한 엔씨소프트 R&D센터는 입면에 거대한 보이드를 활용해 주변을 압도하지 않고 편안한 인상을 만들었다. 건물 앞을 따라 흐르는 하천과도 조화를 이루며 경관을 거스르지 않는다. 멀리서 본 센터의 외형은 큰 문(門)을 연상시키는데, 마치 IT 산업의 미래와 꿈을 상징하는 개선문처럼 보인달까. 파리 인근 라데팡스 신도심에 우뚝 선 라 그랑드 아르슈(La Grande Arche)의 기념비적 제스처와 어딘지 모르게 닮은 느낌이다. 라 그랑드 아르슈는 중앙을 크게 비운 관문 형태로 당대의 기술력과 힘을 상징하면서 한편으로는 세계로 향하는 프랑스의 미래를 건축적으로 표현한 전형적인 기념비다.

기능이나 법규에 맞게 건물을 설계하다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특별한 형태의 건축 보이드도 있다. 국제적 부동산 개발 그룹 발리모어(Ballymore)가 런던 템스강변 나인엘름스에 건설 중인 엠버시 가든(Embassy Garden) 프로젝트가 대표적. 지상 35m, 10층 높이의 2개 건물이 도로를 사이에 두고 들어서는데 이를 잇는 스카이브리지를 설치해 대규모 보이드를 만들 계획이다. 특이한 점은 상부에 떠 있는 구조물, 스카이브리지가 바닥이 투명한 유리 수영장이라는 것. 하늘 위에 떠 있는 수영장은 런던의 스카이라인을 새롭게 그릴 예정이다. 두께 20cm의 강화유리를 이용해 너비 5m, 길이 25m에 물의 깊이는 1.2m에 이르는 유리 수영장은 2개의 타워를 연결하면서 중앙에 보이드를 만들어낸다. 이는 큰 규모의 건물을 상대적으로 작아보이게 하면서 건물 너머 풍경을 담는 프레임 역할을 한다. 건물이 주변 풍경의 일부처럼 보이는 것. 한편, 미국 건축설계 사무소 오아이아이오(OIIO)가 발표한 빅벤드(The Big Bend) 계획안은 세계적 대도시 뉴욕에 새로운 스카이라인이 될 만한 기발한 컨셉 이미지로 관심을 끌고 있다. 좁은 땅 두 곳에 가느다란 빌딩을 세우고 이를 공중에서 연결하는 획기적인 보이드 건축이다. 말발굽을 연상시키는 아치 형태는 맨해튼의 까다로운 고도 제한과 면적 제한을 피하기 위해 도출한 아이디어다. 최고 높이를 610m 이하로 설정해 제한선에 맞추고 전체 길이는 두바이 부르즈 할리파의 830m를 훌쩍 넘는 1219m 빌딩을 목표로 한다. 구부러진 아치 아래로 비교적 낮은 높이의 기존 빌딩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 이상 높이의 공중을 활용한다는 발상이 신선하고 재밌다. 실제 건축될지 그림으로 끝날지 알 수 없지만 가까운 미래에 흔히 볼 수 있는 도시 풍경의 하나가 되지 않을까 싶다.
서울의 풍경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보이드 건축으로는 현재 건립 중인 용산 드래곤시티가 가장 눈길을 끈다. 서로 연결되는 순환 형태의 ㄷ자형 구조물 2개가 엇갈리면서 호텔 타워 3동과 2개의 대형 보이드를 만들어낸다. 거대한 규모임에도 적절한 넓이의 호텔 타워를 구성하고 나머지 부분은 보이드로 크게 비움으로써 주변 경관과 하나가 된다. 외관 디자인의 아이덴티티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건축적 전략이다. 드래곤시티의 보이드는 대규모 빌딩의 위압감을 상쇄하고 주변 지역 스카이라인에 시원한 경관을 제공한다. 보이드 2개의 역할은 서로 다르다. 하나는 하늘로 열려 시원한 통경축을 확보하는 데 주력한다. 하지만 다른 하나는 스카이브리지로 상부를 연결하는 관문 형태의 보이드이자 신도심으로 도약하는 용산이 서울의 문임을 상징하는 역할이다. 주변 풍경의 일부가 되는 보이드와 개선문 타입의 전통적 보이드가 공존하며 다이내믹한 도시경관을 제공할 것으로 예상된다.

보이드의 관점에서 건축은 짓고 채우고 덧붙이고 쌓는 일이 아니라 비우고 덜어내고 내려놓는 일이다. 콘크리트를 부어 건물을 짓더라도 어디를 어떻게 비울지 먼저 생각하면서 자연과 연결하는 방법을 찾는다. 그럴 때 건축은 도시의 빠른 속도에서 벗어나 일상을 돌아보는 휴식처가 되고, 잊었던 아날로그 감성을 회복하는 충전의 장소로 기능한다. 드래곤시티 맞은편에 건설 중인 아모레퍼시픽 용산 신사옥의 보이드는 커다란 중정이자 자연과 소통하는 공간으로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든다.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설계한 것으로 그는 ‘창의’와 ‘소통’, ‘자연과의 어울림’을 중심 요소로 지속 가능한 건물을 지향한다. 이 같은 건축 철학을 반영한 건물은 하부와 상부 중앙에 6~7층 높이의 높은 개구부와 넓은 중정을 끼고 있어 빛과 바람의 소통이 원활하고 비운 공간에 자연이 머문다. 비움을 통해 주변 풍경과 조화를 이루는 보이드 건축은 과밀화된 도시환경 속에서 점점 선택이 아닌 필수조건으로 자리 잡고 있다. 보이드는 그것을 체험하는 사용자의 새로운 생각과 아이디어를 유발하기도 한다. 건축적 상상력을 담은 훌륭한 보이드 건축이 우리의 도시를 더 활기차게 만들 수 있기를 바란다.

 

에디터 김윤영(snob@noblesse.com)
최준석(건축사사무소 NAAU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