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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아름다움

LIFESTYLE

조향사 정미순은 향은 맡는 게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고 말한다.

지난해 방영한 JTBC 드라마 <내 아이디는 강남미인>에서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긴 인물은 단연 나혜성이다. 향에 대한 전문 지식이 대단할뿐더러 자기 사업도 성공적으로 이끄는 그녀에게 ‘너무 완벽해서 비현실적이다’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한데 드라마에나 있을 법 한 나혜성의 실제 모델이 현실에 존재한다. 바로 조향사 정미순이다. “맞아요. 그 드라마에 제 모습이 반영됐어요. 원작자가 자문을 요청했는데, 웹툰과 드라마를 통해 조향의 인지도가 한층 높아지겠다 싶어 흔쾌히 응했죠.”
많은 이들이 정미순을 말할 때 ‘한국 1세대 조향사’라 칭한다. 하지만 이는 그녀를 표현하기에 뭔가 부족하다. 조향사 경력 20년, 맥앤로건과 제주항공 등 여러 브랜드와 협업한 향수 제작사 지엔스 대표, 많은 제자를 배출한 조향 교육자 그리고 향수 박물관 뮤제드파팡 관장. 여기에 ‘백조’ 같다는 비유를 더하면 비로소 그녀의 프로필이 완성된다. 커리어 자체가 완벽한데 굳이 비유까지? 우아한 자태를 위해 물속에서 끊임없이 발장구 치며 노력하는 백조처럼, 정미순이 이 모든 타이틀을 허투루 얻지 않았음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제가 학생일 때는 조향을 배울 데가 딱히 없었어요. 그나마 비슷한 화학을 전공했지만, 만족스럽지 않았죠.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하니 어느덧 평범한 회사원이 되어 있더라고요. 더 늦기 전에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해 회사를 그만두고 유학길에 올랐어요. 가까운 데다 비용이 비교적 저렴한 일본으로 떠났죠.” 20대 후반에 정미순은 다시 학생 신분으로 돌아갔다. 동년배들은 결혼과 승진 등 인생이란 그래프에서 상승 곡선을 그리는데, 자신만 수평 상태에 머무는 것 같아 불안감도 컸다. 하지만 그녀는 조향 하나만을 바라보며 3년간 진득하게 공부했다. 한국에 돌아온 뒤에는 지엔 퍼퓸과 지엔 퍼퓸 스쿨을 오픈해 조향사와 교육자의 길을 걸었고, 2015년에는 뮤제드파팡을 개관해 향에 예술을 접목한 전시를 개최해왔다. 그녀는 성장을 위해 도전과 결단이 중요하다는 걸 잘 안다.
그래서일까. 정미순은 최근 제자들과 함께 ‘향수 온라인 크라우드 펀딩’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시제품으로 소비자에게 자본을 펀딩받아 본제품을 생산하는 크라우드펀딩 말이다. 랜선으로 향을 전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아직 기술은 그 정도로 발달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녀가 시향이 불가능한 온라인에, 그것도 일정 수준 이상 소비자가 모여야 제품을 판매할 수 있는 펀딩으로 신제품을 출시한 이유는 무엇일까? “파인 아트는 시각적 요소 못지않게 작가와 작품의 스토리가 중요하잖아요? 향수도 마찬가지로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작품’이에요. 후각뿐 아니라 텍스트, 디자인 등 다양한 방법으로 향을 느낄 수 있어요. 향수를 스토리로 풀면 크라우드펀딩도 불가능하진 않겠다 싶었죠. 소비자들이 단순히 향이 아닌 스토리를 구매하도록 한 거예요.”
이렇게 탄생한 결과물이 위로와 사랑을 담은 향수 ‘아그네스 오브 갓’이다. 연극 <신의 아그네스>에서 영감을 받아 맑고 순수한 영혼을 지녔지만 고단한 삶을 산 수녀 아그네스를 위로하는 마음을 향으로 표현했다. 펀딩은 원래 목표로 한 금액의 4배를 웃돌며 성공했다. “밑바닥부터 따뜻함이 올라와 쓸쓸한 느낌을 감싸 안는 기분을 자아낸다”, “조향사가 받은 영감을 향으로 느낄 수 있었다”라는 멋진 피드백도 받았다. 게다가 조향 시장에서 불가능하다고 여기던 크라우드펀딩은 그녀의 성공으로 새로운 판매 채널로 자리를 잡았다. 조향 시장의 저변 확대라는 결과까지 가져온 셈이다.
선구자라는 단어가 이렇게 잘 어울리는 사람이 또 있을까? 아무리 좋아해도 불모지에 뛰어들기란, 새로움을 개척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조향 산업이 전무하던 국내에서 시장을 일구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정미순은 그 고단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는 그녀가 후학 양성에 힘을 쏟는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조향사와 교육자의 관계를 딱 자를 순 없지만 요즘은 교육자 정미순 60%, 조향사 정미순 40%에 가까워요. 한국 조향 사업의 성장을 위해 조향사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제 경험을 나누고 많은 걸 알려주면서 길을 열어주려 해요. 사업가로서 수입을 완전히 신경 쓰지 않을 순 없지만, 조금 덜 생각하면 가능한 일이죠.(웃음)”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 과연 조향사가 되기 위해 갖춰야 할 자질은 무엇일까? 거쳐간 제자만 수백 명인 그녀는 후각과 감각이라고 말한다. 조향에 필요한 능력 중 90%는 경험으로 채울 수 있지만, 나머지 10%는 타고난 감각에 달려 있다고. “잔인한 말이죠. 물론 90%에 도달하는 것도 힘들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조향사가 될 수 있어요. 하지만 남다른 감각이 있으면 이전에 없는 특별한 향이나 스토리같이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죠. 예술 작품을 본 뒤 ‘이 작가는 뛰어난 감각을 지녔다’고 생각하잖아요? 조향도 마찬가지예요.”

1 향수 ‘아그네스 오브 갓’.    조향 오르간에서 모든 향이 탄생한다.   3 향을 배합하는 과정.

조향사로 산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현역이다. “한번 꽂힌 걸 계속 고집하면서도 새로운 것에 호기심을 갖는 양극단의 성향을 지녀 향수와 맞지 않았나 싶어요. 향수로 표현할 수 있는 콘텐츠는 무궁무진하거든요. 이렇게 잘 맞는데 어떻게 향에서 빠져나올 수 있겠어요?” 올해는 더더욱 조향 산업 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싶다는 정미순은 사업 해외 진출, 출간 준비 그리고 교육을 해야 할 일로 꼽는다. “이쪽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는 친구도 많아졌고, 향 산업 자체도 어느 정도는 성장하고 있‘었’어요. 왜 과거형이냐면, 파이가 잘 크다 지금 잠시 브레이크가 걸린 상태라 그래요. 이 상황을 좋은 방향으로 푸는 것이 지금 제게 주어진 숙제라고 생각합니다”라며 이를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향 지식을 많은 사람과 기꺼이 나누겠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나만의 향을 찾는 비법은? 정미순은 다시 한번 ‘감각’이란 단어를 꺼낸다. 한국 사람들은 감각이 뛰어나니 자신을 믿으면 된다고. 아! 습도가 낮은 날에 발향이 잘되니 그때 고르는 게 좋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에디터 이효정(hyojeong@noblesse.com)
사진 김제원(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