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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능에 따르세요

LIFESTYLE

이 공연에 참여하는 관객은 가면을 써야 한다. 그것이 관객과 배우를 구분하는 유일한 수단이므로. 무대와 객석의 구분도 물론 없다. 관객이 주체가 되는 몰입형 공연의 세계.

<슬립 노 모어>를 관람하는 관객과 연기자의 거리를 실감할 수 있는 장면.

뉴욕 오프브로드웨이 연극 <슬립 노 모어(Sleep No More)>는 호텔을 통째로 무대로 사용한다. 관객은 누구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배우의 연기를 감상할 수 있고, 관객의 선택에 따라 극에서 볼 수 있는 장면이 다르다. 맨해튼 첼시에 자리한 매키트릭 호텔(McKittrick Hotel)안으로 들어서 눈 부분만 휑하니 뚫린 하얀색 가면과 입장권을 대신하는 트럼프 카드 한 장을 받아 들고 잠시 대기하면, 또 다른 세계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할 수 있다. 호텔의 6층 전 층을 무대로 쓰고, 크고 작은 수많은 공간에서 배우 수십 명이 <맥베스>의 여러 장면을 연기한다. 관객은 각자 취향이나 선호도에 따라 배우를 골라 따라다니며 선택적으로 공연을 관람하기에 같은 공연이더라도 볼 수 있는 장면이 달라지는 것.
배우는 관객 한 명을 골라 작은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단둘이 연기를 하기도, 함께 춤을 추기도 한다. 대사는 거의 없다. 여느 공연과 달리 소품을 마음대로 만질 수 있고, 서랍장을 열어본다거나 책상 위에 놓인 편지를 읽어보는 기회를 얻는 건 자기 하기 나름이다. 어떤 배우를 따라다니고 어느 방향으로 갈지 정하는 것 또한 오롯이 자신의 몫. 배우 위주로 선택해도 좋고 장면 위주로 관람해도 상관없다.
물론 주요 인물은 존재한다. 맥베스, 레이디 맥베스, 맥더프, 레이디 맥더프를 따라다니면 중요한 장면을 놓치지는 않는다. 하지만 “본능에 따라 관람하라”라는 제작자의 팁처럼, 마음이 끌리는 대로 관람하는 것이 이 공연의 매력이 아니던가. 피날레 장면에선 각자 흩어져 다니던 배우와 관객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게 되니 어두운 호텔 안에서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단, 자칫 공동묘지에 혼자 덩그러니 남는다거나, 가면을 쓴 관객끼리 서로 마주 보고 흠칫 놀랄 때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멀리 뉴욕이나 런던까지 가지 않아도 한국에서 ‘시어터 RPG’라는 새로운 형식의 공연을 만날 수 있다. RPG는 롤플레잉 게임(Role-Playing Game)의 줄임말이다.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라는 제목부터 현장성이 듬뿍 묻어난다. 공연과 백스테이지 투어형 관객 참여 프로그램을 뒤섞은 이 공연은 2013년 초연해 지난 6월에도 성공리에 공연했으며, 갓 전국 투어를 마쳤다.
우선 조연출 역할을 맡은 배우 한 명과 여러 명의 관객이 한 조를 이루어 극장 전체를 이동하며 관람하고 관객이 직접 플레이어로 참여하며 극을 완성해나간다. 이 공연 역시 조원과 배우, 그날의 상황에 따라 관객이 받아들이는 바가 달라진다. 실제 공연장, 사무실, 카페, 분장실, 연습실 등 극장 곳곳을 이동하며 연기하고 미션을 수행하는데, 평소 관객이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다는 매력이 있다.

<쉬어매드니스>의 공연 장면.

퍼포머와 함께 공연장을 이리저리 이동하는 것이 다소 부담스럽다면, 객석에서 공연을 관람하며 관객인 자신이 결말을 바꿀 수 있는 경험은 어떨까? 뉴욕에서 1976년 시작해 현재는 워싱턴과 보스턴에서 공연하는 연극 <쉬어매드니스(Shear Madness)>는 공연이 끝날 무렵 관객의 선택에 따라 극의 범인이 바뀐다.
한국에서도 꾸준히 공연 중인 이 연극의 줄거리는 이렇다. 쉬어매드니스 미용실 위층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의 용의자를 찾는 내용으로, 살인이 벌어진 바로 그날 관객과 함께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수사극이다. 미용실 손님으로 가장해 잠복한 형사들이 함께 있던 주인, 미용사, 단골손님인 부잣집 사모님, 골동품 판매상 넷을 용의자로 지목한다.
공연 내내 이러한 과정을 낱낱이 지켜본 관객은 목격자이자 배심원이 되어 용의자의 행적을 묻는다. 4명의 등장인물은 저마다 알리바이를 내세우며 자신을 변호한다. 관객은 그날 공연을 보면서 자신이 용의자라고 생각한 출연자를 지목하면 된다. 가장 많은 지목을 받은 사람이 그날의 범인이 되는 것. 매일 범인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유독 자주 범인으로 지목되는 캐릭터가 있고 반대로 그렇지 않은 캐릭터가 있다. 그래서 새로운 범인과 색다른 엔딩을 원하는 마니아 관객이 모여 단체로 관람한 다음, 미리 정해놓은 등장인물을 범인으로 몰아가는 사례도 종종 있다.

배우의 연기를 현장에서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 몰입형 공연의 매력이다.

보통 전통적 형식의 공연이라면 무대를 특정 구역으로 제한, 관객은 수동적 관찰자로서 역할을 할 뿐이었다. 배우는 무대 위에, 관객은 무대 밖에 존재하며 특별한 상호작용 없이 연극이 펼쳐진다. 하지만 참여형 극(participatory theatre)의 등장은 공연의 새로운 국면을 가져왔다. 관객이 퍼포머와 상호작용하는 형태의 극으로, 단순하게는 공연 전 관객과 친목을 도모하거나 관객을 무대로 초대한다.
이런 참여형 극을 확장해 극대화한 <슬립 노 모어>처럼 특정 장소에서 배우와 관객이 이동하는 형식이 ‘프롬나드 극(promenade theatre)’이다. 관객이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작품에 빠져들어 완전히 몰입할 수 있어 이머시브(immersive) 극이라고도 부른다. <슬립 노 모어>를 만든 영국의 제작사 ‘펀치드렁크’가 이러한 형식의 극을 대표하며, 관객이 공연의 문턱을 뛰어넘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관객을 공연자와 동일한 공간으로 데려온다. 객석에 앉아 완성된 공연을 보기만 하는 소극적인 관람에서 벗어나길 원한다면 도전해보자. 이런 몰입형 극은 퍼포머와 관객을 분리하는 벽이 없다. 배우는 청중이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 참가자인 관객은 새로운 창조력을 발휘한다.
관객 참여 공연의 매력을 두 전문가의 입을 빌려 전한다. 연출가 홍은지는 “관객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누군가가 주입하는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다”고 밝혔다. 펀치드렁크의 디렉터 피터 히긴(Peter Higgin)은 “관객은 극 중에 움직이며 공연의 일부가 된다. 관객은 곧 우리 공연의 중심이다. 관객이 다양한 도전을 하고 소극적인 청중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관객이 주체가 되어 만들어가는 이야기. 끌리지 않는가?

 

에디터 백아영(xiaxia@noblesse.com)
사진 제공 The McKittrick Hotel· Shear Madn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