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스러기의 잔상
“제 그림은 반전의 멋이 있어요. 그래서 한번 보면 작품 앞에서 발걸음을 옮기기 힘들죠.” 유재연 작가의 말이 옳았다. 여느 때처럼 인터뷰를 위해 포트폴리오를 살피는데 그날따라 작품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단 몇 번의 터치로 그려낸 작품은 키치함은 물론 상반된 매력을 갖춘, 그야말로 ‘취향 저격’이었다.

간극을 이야기하는 유재연 작가.
유재연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유재연은 영국 왕립예술학교(Royal College of Art)에서 페인팅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국내외 다수의 단체전에 참여하고 개인전을 열었으며, 2014년에는 영국에서 ‘네빌 버스턴 어워드(Neville Burston Award)’를 수상했다. 런던과 서울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는 그녀는 6월 28일까지 노블레스 컬렉션에서 <문라이트 펀치 Moonlight Punch>전을 연다.
미술계에서는 통상 40대 초반까지 젊은 작가라 말하지만 유재연 작가는 그중에서도 젊다. 그러나 그녀의 약력은 결코 그렇지 않다. 작가로 활동을 시작한 2008년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전시장에 작품을 걸었다. 추진력의 원천은 그녀의 주변에 끝없이 흩날리는 ‘가루’. 그녀는 현실과 환상, 사회와 개인, 유년과 성년 등 이질적인 것들이 충돌할 때 떨어지는 부스러기가 매번 새롭게 다가온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조각들을 유머러스한 미감으로 모아 작품으로 탄생시킨다. 겉과 속이 다르다. 그래서 유재연의 작품에는 시선을 끄는 힘이 있다.

Heil, 캔버스에 유화, 112.1×145.5cm, 2009
오랜만의 국내 활동입니다. 얼마 만이죠? 본격적인 국내 전시는 6년 만입니다. 귀국하자마자 2개의 개인전을 오픈해 바쁜 나날을 보냈어요. 런던에서 진행한 작업을 소개할 수 있어 감회가 남다릅니다.
개인전이 열리는 두 장소의 성격이 서로 다릅니다. 한 곳은 화이트 큐브, 다른 한 곳은 대안 공간이죠. 마침 이번 <아트나우> 스페셜 주제가 ‘공간’입니다. 전시를 준비할 때 장소에 관해 고려한 것이 있나요? 작품과 공간의 ‘조화’를 우선시합니다. 작업의 기반은 회화에 두지만 영상, 출판, 드로잉 등 여러 매체에 관심이 많아요. 제가 나타내고자 하는 주제를 잘 전달할 수 있다면 장르를 가리지 않기 때문이죠. 덕분에 각 장소에 맞는 작품을 고를 수 있는 선택의 폭이 넓었습니다. 우선 대안 공간에선 ‘Magic Window’, ‘Wounded Trampoline’ 그리고 아티스트 북 <;_;> 등 실험적인 작품을 선보입니다. 각각 다른 매체지만 날것 그대로를 보여준다는 공통점이 있지요. 또한 다듬지 않은 매력이 있어 대안 공간과 잘 어울립니다.
반면 화이트 큐브에는 주로 회화 작품을 걸었습니다. 평면 매체의 성격을 염두에 둔 건가요? 화이트 큐브와 회화가 잘 어울린다는 점에 동의해요. 흰 공간 덕에 회화가 빛을 발하는 경향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니에요. 노블레스 컬렉션에 건 ‘Moonlight Punch’ 연작과 ‘Moving 1’, ‘What I See at Night’는 드로잉에 기반을 둔 회화예요. 여기서 베이스가 된 드로잉은 무의식의 결정체입니다. 앞선 작품과 ‘날것’이라는 맥락을 공유하죠. 다른 점이 있다면 드로잉에서 회화로 재탄생하는 추가 단계를 거쳤다는 거예요. 그 과정에서 정돈된 미감이 생겨 화이트 큐브와 합이 맞습니다. 서로 다른 두 공간 덕분에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총망라할 수 있었습니다.

Project Roadkill, 작가가 만든 누비이불, 디지털 프린트, 가변 크기, 2010~2018
초기작과 신작이 사뭇 달라요. 초반에는 가족사진이나 애니메이션 이미지같이 구체적인 형상이 보입니다. 작가로 활동을 시작할 때는 콜라주한 이미지로 내러티브를 만들었죠. ‘New Fantasia’처럼요. 이 연작은 제가 수집한 애니메이션 이미지와 누구나 알 만한 역사적 사진을 오버랩한 회화입니다. 디즈니의 <피터팬> 스틸 컷과 히틀러 사진을 겹친 ‘Heil’을 예로 들 수 있겠네요. 가상과 현실이라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중첩하니 작품 스스로 수많은 차이점을 생성했어요. 이렇게 겹겹이 쌓이는 이미지층이 제 작품 철학인 ‘간극’을 잘 나타내죠. 특히 애착이 가는 시리즈예요. 에스키스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죠. 드로잉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요? 드로잉에 푹 빠졌어요. 런던에 온 뒤로 무의식 같은 본연의 존재에 강한 끌림을 느꼈거든요. 매일 일기 쓰듯 습관적으로 드로잉을 했습니다. 그중 저에게 말을 거는 듯한 드로잉을 회화로 재현했고요. 레퍼런스를 참고하지 않은 즉흥적 드로잉을 회화로 옮기다 보니 작품이 단순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여전해요. ‘New Fantasia’가 전혀 다른 이미지의 중첩이라면, 드로잉은 표현과 내용에 차이가 있죠. 제 드로잉은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가볍지 않거든요.

5월 3일부터 노블레스 컬렉션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문라이트 펀치 Moonlight Punch> 전경.
‘Moonlight Punch’도 그런 과정을 거쳐 완성한 거죠? 그렇습니다. ‘Moonlight Punch’ 시리즈는 회화가 된 드로잉이에요. 여기에 사용한 드로잉은 밤에 그린 귀여운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반갑지 않은 존재가 숨어 있죠. 그런데 노트에서는 그 틈새가 잘 보이지 않았어요. 이를 어떻게 드러낼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그 답을 ‘크기’에서 찾았습니다. 작고 가벼운 이미지가 물성을 띠고 전시장의 한 자리를 차지할 때 관람객의 시선을 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결과적으로 드로잉이 커지자 관람객이 작품 앞에 서 있는 시간이 늘어났고, 동시에 깊은 사유를 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이미지의 이면에 감춰진 것을 관람객이 금세 발견했죠. 이를 본격적으로 발전시킨 게 ‘Moonlight Punch’예요.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얼마 전 들은 평론을 소개하고 싶어요. “늦은 밤, 런던 뒷골목에서 마실 수 있는 예쁜 칵테일 문라이트 펀치. 그런데 마셔보니 독주.” 한마디로 반전이 있는 드로잉이죠.
런던과 서울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두 도시는 문화도, 지역도 모든 게 달라요. 이에 따라 작품을 보는 관람객의 시선 또한 다를 것 같습니다.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런던에선 저를 타자화하는 경향이 있어요. 제가 어떤 작품을 선보여도 한국의 ‘분단’에 초점을 맞춰 해석하죠. 작품에 그런 메시지가 전혀 없는데도요. 반면 한국에서는 작품에 담긴 제 감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공감해줘요. 여기서 어느 쪽이 좋다, 나쁘다 판단하진 않겠습니다. 느끼는 게 서로 달라도 결국 그 모든 것이 제 작품에서 출발하고 또 끝나는 것이니까요. 결국 그 모든 게 제 작품의 일부인 셈이죠.

5월 3일부터 노블레스 컬렉션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문라이트 펀치 Moonlight Punch> 전경.
대학 입학과 동시에 아트 신에 진출했습니다. 보통 졸업 후 활동을 시작하는데 눈에 띄는 약력이에요. 대학에 입학한 직후 우연히 현직 작가와 교류할 기회가 있었어요. 그때부터 예술 생태계에 대한 궁금증이 커졌죠. ‘실제 현장은 어떨까?’, ‘구성원들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예술적 교류를 할까?’ 등의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어요. 곧바로 공동 작업실에 입주했죠. 당시 같이 작업실을 사용한 멤버들은 갓 데뷔한 젊은 작가였는데, 그들에게 아낌없는 조언을 받았습니다. 덕분에 기획자, 평론가까지 만날 수 있었고요. 아무래도 또래와 함께 성장하고 의지할 수 있다는 게 큰 도움이 됐어요. 물론 학교생활도 소홀히 하진 않았죠.
대학에서의 미술 학습과 현장 활동을 동시에 소화하신 거네요. 그 둘의 모습이 판이했을 것 같습니다. 학교와 아트 신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건 의미 없다고 생각해요. 작품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었던 학교,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던 작업실 모두 흥미로웠습니다. 이론과 현장을 동시에 경험한 덕에 작가로서 성장할 수 있었죠.
국내 활동을 마감하는 소감이 어떤가요? 향후 일정도 공유해주세요. 다양한 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 뜻깊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부족한 점을 파악할 수 있는 계기였어요. 덕분에 런던에 돌아가면 할 일이 많을 것 같아요. 전시에 대한 피드백을 정리하고 작업을 발전시켜야 하니까요. 사실 이번 전시에서 작업을 계속해도 되겠다는 평을 들었어요. 여기에 상응할 필요가 있겠죠?
에디터 이효정(hyojeong@noblesse.com)
사진 김잔듸(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