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父子), 부자(富者)] 아버지가 되어간다는 것
우리가 자연스럽게 닮아가는 그와, 우리의 아이에게 전해주고 싶은 것에 대하여.

내 아버지는 올해로 팔순을 맞으셨다. 평생을 논밭과 산에서 일하셨다. 해가 뜰 때쯤 나가면 식사할 때를 제외하곤 논밭과 산에 계시다 어두워진 후에 돌아오셨다. 아버지는 집안의 가난 때문에 진학의 기회를 미룰 수밖에 없었다. 가끔 빈 공책에 한자를 옮겨 쓰거나 글씨 연습을 하거나 인사말을 쓰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아버지는 공부를 못한 일에 미련이 많으신 듯했다. 그러나 한 번도 그런 생각을 내비친 적은 없었다. 아버지는 말씀이 적었다. 무엇에 관해서든 상세하게 말씀을 하지는 않으셨다. 할 말을 오래 미뤄두었다가 꼭 필요하다고 여길 때에야 짧게 말씀하시는 편이었다.
내 기억의 서랍에는 아버지와 관련해 몇 장의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아버지가 모는 자전거의 뒷자리에 앉아 멀리 가는 장면이다. 내가 나고 자란 경북 금릉군 봉산면 태화2리에서 김천시 시내까지는 7~8km 남짓 거리다. 아버지는 어느 날 나를 자전거에 태우고 김천 시내 오일장에 데려가셨다. 아마도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이거나 갓 입학한 때가 아닌가 싶다. 나는 그날 토끼 두 마리를 샀다. 그날 이후 그 토끼 두 마리를 길렀다. 풀을 뜯어다 먹이고 수시로 토끼장을 들여다보았다. 순하고 귀가 큰 토끼를 내 손으로 기르는 것은 아주 설레는 경험이었다. 그렇게 토끼를 길러 여러 마리로 늘렸고, 몇 마리를 팔아서 작은 강아지를 샀다. 강아지를 기른 후에는 까만 아기 염소를 길렀다.
내가 나고 자란 동네에서 추풍령까지도 그리 멀지 않은 거리다. 어느 날 아버지는 나를 자전거 뒷자리에 태우고 추풍령으로 이발을 하러 가셨다. 내 나이 열 살 무렵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때 아버지는 마흔 살 정도 되셨을 때다. 추풍령에서 내려오는 바람을 맞으며 아버지가 모는, 중고로 산 자전거가 고갯길을 힘차게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허리춤을 꼬옥 잡고 신이 나 있었다. 동네를 떠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버지께 새참을 갖다드리는 일도 내 몫의 일이었다. 어머니가 작은 주전자에 라면을 끓여주면 그것을 일하시는 아버지께 갖다드렸다. 아버지는 써레질을 하고 계시거나, 두렁의 풀을 베고 계시거나, 논에서 김을 매고 계셨다. 새참을 갖다드리면 아버지는 숨을 잠깐 돌리면서 나를 한 번 반갑게 보곤 음식을 조금 들어 고수레를 하셨다. 그러곤 내게도 나눠주셨다. 새참을 드리러 가서 나는 샘을 치우는 일을 더러 했다. 논배미에 있는 작은 샘을 치우는 일을 내게 시키셨다. 그러면 나는 묵은 낙엽을 걷어내고 바닥의 흙을 긁어냈다. 샘의 저쪽에서 흰 실오라기 같은, 깨끗하고 차가운 물이 나오면서 샘이 조금씩 맑아지는 것을 나는 쪼그려 앉아 지켜보았다. 샘을 치우던 일의 쾌감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한 가지 장면을 더 말하자면 시험을 보는 날 새벽의 풍경이 있다. 김천 시내로 통학하면서 중학교를 다닌 나는 꽤나 성적이 우수했다. 아버지는 나의 학교 성적에 흡족해하셨다. 시험을 보는 날 새벽에 일어나 내가 책상에 앉아 있으면 안방에서 주무시던 아버지가 어느새 방으로 와서 내 등 뒤에 가만히 앉아 계셨다. “힘들지? 고생이 많다”라고만 간단하게 말씀하곤 그렇게 두서너 시간을 앉아 계시다 동이 틀 무렵에 일을 보러 바깥으로 나가셨다. 공부 하다 뒤를 돌아보면 아버지는 더러 졸고 계셨는데, 이 장면은 아직까지도 내 마음을 참으로 뭉클하게 한다. 이제 아버지는 시력을 많이 잃으셨다. 힘든 농사일을 놓고, 작은 밭을 가꾸면서 시골에 살고 계신다.
내 아들은 고등학교 3학년이다. 키가 기린처럼 크다. 멋도 부리느라 거울을 보는 일과 얼굴의 여드름을 관리하는 일과 옷을 차려입는 일에 시간이 꽤 필요하다. 아무거나 막 하지 않는다. 설계하지 않은 일이나 본인의 기호에 맞지 않는 일은 하지 않으려 한다. 음악도 자신이 좋아하는 뮤지션만 선택해서 듣는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인 아들을 둔 아버지지만 아이에게 해주는 일이 별로 없다. 내 아버지보다 많은 말을 하는 아버지가 되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아이와 함께한 일도 내 아버지가 나와 함께한 일보다 썩 많은 것 같진 않다.

나와 아이를 연결해준 것은 공과 자전거였다. 여러 종류의 공을 함께 굴리고, 차고, 던지고, 받았다. 그러나 공을 갖고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도 아이가 성장하면서 서서히 그 빈도가 줄었다. 자전거 타는 법을 따로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아이는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어느새 자전거 안장에 올라타 있었다. 다만 나는 가끔 아이와 함께 먼 곳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다 돌아왔다. 그러나 아이와 많은 얘기를 나누진 못했다. 자전거를 타는 일도 아이의 하루 일과가 복잡해지고 바빠지면서 미루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한동안 한 일은 아이에게 문자를 보내는 것이었다. 좋은 문장, 시 등 내가 그날 읽은 것 가운데 아이가 함께 읽으면 좋을 만한 것을 아이에게 보내는 일이었다. 내가 보내준 것을 아이가 읽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아이가 열 살 무렵 되었을 때 나는 아이에게 동시를 옮겨 쓰도록 숙제를 내서 매일매일 점검한 적이 있다. 하루에 두 편씩 아이는 동시집의 동시를 옮겨 적으면서 적잖은 상상을 한 것 같았다. 더 많은 질문을 하고, 호기심이 분수처럼 솟고, 또 자신의 마음에 담긴 내용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게 되었으니 아이의 성장을 위해선 잘한 일이라 하겠다.
나는 아이에게 내 아버지가 평소에 당부하시던 말씀을 아주 때때로 전하고 있다. 아버지께서는 “남의 말을 하지 말라”고 내게 이르셨다. 남의 허물을 들춰내서 말하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충고할 때라도 그의 유익을 고려하라고 말한다. 또 좋은 행동의 씨앗을 심어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행동과 그 결과 사이의 인과에 대해 말한다. 그 이상의 것을 말한 적은 거의 없다. 차오르는 달처럼 아이의 장점이 스스로 커지기를 바랄 뿐이다.
열아홉 살의 아이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내가 요즘 느끼고 있듯이 내 아버지도 내게서 그런 느낌을 아주 오래전에 느끼셨을 것이다. 그런 느낌을 받으면서 내 아버지의 말씀은 점점 줄어들었을 것이고, 아버지는 내 등 뒤에 가만히 앉아 지켜보는 것이 가장 큰 애정의 표현이라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버지와 아이의 관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믿고 기다리는 것이 제일로 필요할 때가 많다. 미루나무는 미루나무 스스로 땅에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스스로 서는 것일 테니 말이다. 새는 새 스스로 허공을 의지해 날갯짓을 배우며 둥지에서 벗어나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일 테니 말이다. 다만 누군가의 등 뒤에 묵묵히 서는 것, 그것이 응원과 지지와 신뢰가 될 것이다. 낮은 능선의 산 뒤로 좀 더 높은 능선의 산이 서듯이.
에디터 조재국(jeju@noblesse.com)
글 문태준(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