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변의 가치
20년 만에 한국을 찾은 영국 로열발레의 <더 퍼스트 갈라>와 그 중심에 있는 케빈 오헤어 예술감독을 만났다.

영국의 세계 최정상급 발레단인 로열발레를 이끌고 있는 진취적 예술감독 케빈 오헤어(Kevin O’Hare). 새들러스 웰스 로열발레단에서 버밍엄 로열발레단 수석 무용수로 <백조의 호수>, <로미오와 줄리엣> 등 주요 고전 작품의 주역으로 활약한 그는 무용수일 뿐 아니라 데이비드 빈틀리의 <실비아>에서 아민타 역을 새롭게 창작하는 등 작품 제작에도 적극 참여하며 발레와 기획 전반에 열정을 쏟았다. 이러한 밑바탕은 또 다른 전환점을 만들어내며, 버밍엄 로열발레단과 로열발레의 컴퍼니 매니저, 행정 책임자를 거쳐 예술감독으로 그를 이끌었다.
세계적 발레단들이 치열하게 차별화를 모색하는 가운데 로열발레가 입지를 공고히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열정과 앞으로 나아가는 에너지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재임 이후 로열발레는 <Woolf Works>, <The Dante Project>, <The Cellist>, <Like Water for Chocolate>등 현대적 감각의 신작을 선보이며 레퍼토리를 확장했고, 크리스털 파이트, 시디 라르비 셰르카위, 팸 태노위츠 등 동시대 안무가들과도 활발하게 협업했다. 또 월드 발레 데이(World Ballet Day), 글로벌 투어와 디지털 콘텐츠, 지역사회 프로그램 등을 통해 발레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는 동시에 대중 친화적 발레의 인식을 확산시켰다.
로열발레의 <더 퍼스트 갈라>가 LG아트센터 서울에서 막을 올렸다. 케빈 오헤어 예술감독과 제작진이 미리 답사할 만큼 각별한 열의를 기울인 이번 내한은 로열발레의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대표작 10여 편으로 구성된 갈라 프로그램을 선보인 특별한 무대다. <백조의 호수>, <로미오와 줄리엣>, <지젤> 같은 고전부터 <스펠스>, <애프터 더 레인> 같은 실험성과 예술적 다양성을 보여주는 컨템퍼러리 작품까지 두루 포함된 것은 물론 나탈리아 오시포바, 바딤 문타기로프 같은 세계 최정상 무용수들과 한국인 무용수 최유희, 전준혁, 김보민, 박한나가 함께해 더욱 뜻깊은 무대를 선보였다. 이를 통해 로열발레가 지켜온 불변의 가치를 전하고, 미래를 향한 새로운 도약의 서막을 열었다.

위쪽 <지젤> 2막 파드되 작품의 나탈리아 오시포바. © StudioAL, LG아트센터
아래쪽 <해적> 파드되 작품의 후미 가네코와 바딤 문타기로프. © StudioAL, LG아트센터
깔끔하고 정교한 테크닉, 서정적 드라마 발레로 대표되는 로열발레의 특징을 보여주기 위해 이번 공연에서 특히 중점을 둔 부분이 있나요? 로열발레는 모두가 함께, 완전한 한 몸으로 작품을 만들어간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요. 모든 이가 직급과 역할, 작품의 장르와 스토리에 구애받지 않고 끊임없이 의견을 주고받으며 좋은 작품과 무대를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그런 만큼 무대 디자인과 음악이 완벽하게 어우러져 완성도가 높죠. 이번 <더 퍼스트 갈라> 프로그램은 로열발레의 폭넓은 레퍼토리를 선보이는 동시에 함께 활동하는 무용수들이 재능을 펼칠 수 있도록 구성했습니다. 특히 한국인 무용수들이 모국 관객 앞에 서는 뜻깊은 무대를 소개할 수 있어 기뻐요.
<더 퍼스트 갈라>는 고전과 현대를 아우르는 로열발레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클래식과 컨템퍼러리의 균형을 맞출 때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요? 이번 프로그램에서는 균형을 이루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어느 한 작품이 유난히 튀지 않고, 전체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느낌을 줄 수 있도록 구성했어요. 로열발레 솔로이스트이자 안무가 조슈아 융커의 신작 <스펠스(Spells)>는 세계 초연이라 아직 대중에게는 낯선 작품이지만, 2부 첫 번째로 배치했습니다. 이어 <지젤>, <마농> 같은 전통적 고전 작품을 배치했고, 마지막에는 고전발레와 상업 뮤지컬을 넘나드는 크리스토퍼 휠든의 <애프터 더 레인>으로 마무리해 짜임새 있고 조화로운 프로그램을 선보이고자 했습니다.
이번 공연에서 가장 기대되거나 마음이 가는 작품은 무엇인가요? 모든 작품이 특별하고 소중하지만, 개인적으로 한국 무용수의 무대가 특히 기대됩니다. 최유희 무용수는 제가 예술감독을 맡기 전부터 이미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전준혁, 김보민, 박한나는 제가 직접 영입한 젊은 아티스트예요. 이들이 무대에 서는 모습을 보면 아버지처럼 마음이 벅차오를 것 같습니다.
2012년 예술감독으로 취임한 이후 많은 신작과 기획을 선보였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의미 있었던 공연이나 기억에 남는 작품은? 많지만 네 작품만 꼽아볼게요.(웃음) 첫 번째는
다양한 레퍼토리를 아우르는데, 로열발레는 오늘날 어떤 예술적 방향성과 철학을 지향한다고 보시나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데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예술 형식을 선도하는 과감하고 미래지향적 시선을 갖는 거죠. 우리가 지금까지 간직해온 전통과 방식을 잊지 않으면서도, 관객과 더 깊이 연결되고 심금을 울릴 수 있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작품을 선보이고자 합니다.

LG아트센터 서울의 튜브 공간에 선 케빈 오헤어 예술감독.
아이디어와 영감은 주로 어디에서 얻나요? 비슷한 생각을 지닌 사람들, 그리고 함께 작업하는 안무가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며 영감을 얻지만, 무엇보다 최대한 많이 보려고 해요. 그래서 다른 발레단의 공연이나 연극을 챙겨 봅니다.
무용수에서 컴퍼니 매니저, 행정 책임자, 그리고 예술감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할을 맡아왔어요. 무용가의 삶이 영원할 수 없다는 점도 작용했지만, 저는 수석 무용수로 활동할 때부터 발레단의 운영과 기획에 관심이 있었어요. 특히 몇 차례 자선 갈라 프로그램을 기획하면서 이 일이 제게 맞는다는 걸 느꼈죠. 운 좋게도 왕립 셰익스피어 극단에서 예술 행정 교육을 받으며 일할 기회도 얻었고, 행정 책임자로서 계약과 재정을 다루기도 했습니다. 계획적인 건 아니지만, 이러한 경험은 예술감독으로서 큰 도움이 됐죠.
발레라는 한 흐름 안에서도 무용수와 예술감독의 삶은 분명 서로 다른 시선과 결을 지닐 것 같아요. 그 차이를 직접 경험하며 느낀 바가 있다면요? 무용수로 활동할 때는 단원으로서 공동 목표를 향해 나아가지만, 결국 스스로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어요. 자신의 체력과 몸 상태, 맡은 역할과 표현 방식을 끊임없이 고민하며 내면을 돌아봐야 발전할 수 있으니까요. 반면 예술감독은 자신을 지우고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소위 로열발레단을 돌보는 보호자로서, 저를 통해 발레단이 앞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제 역할이죠. 감사한 것은, 앞서 말씀드린 레퍼토리 작품이 큰 성공을 거둔 덕분에 제가 물러난 후에도 계속 무대에 설 수 있다는 점이고, 제겐 매우 의미 있는 일입니다.
앞으로 새롭게 도전해보고 싶은 영역이나 관심사가 있을까요? 기술의 발전 속에서 ‘그다음 단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있어요. 가상현실을 활용한 실험적 시도도 이어가고 있고, 관련 분야 전문가들과 협업하며 기술을 보다 효과적으로 무대에 접목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 중입니다. 지난해에는 소극장에서 관객이 무대 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무용수와 가까이 호흡할 수 있는 몰입형 작품을 선보였는데, 모두가 진심으로 즐기는 모습을 보며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식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게 됐어요. 동시에 한편으로는 이번 시즌 로열 오페라하우스에서 확인했듯, 한자리에 모여 같은 무대를 바라보며 순간을 함께하는 경험이 여전히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더 좋은 무대를 만들어가는 것이 제 바람이에요.
마지막으로, 오늘날 다양한 문화 속에서 발레의 역할과 로열발레가 앞으로 그리고자 하는 방향이 궁금합니다. 발레는 무대에서 무용수들이 보여주는 신체성, 몸을 통해 관객의 심금을 울리는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영국 발레단으로서 다양성을 넓히는 것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인종이나 배경과 상관없이 누구나 무용수를 꿈꿀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요. 무대 위에서는 타고난 배경과 주어진 환경이 아니라 발레에 대한 열정이 중요하다는 걸 직접 느꼈기에 이 열정을 더 많은 사회적·문화적 배경의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에디터 정희윤(heeyoon114@noblesse.com)
사진 조영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