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LETTER

노블레스 매거진의 뉴스레터를 신청해보세요.
트렌드 뉴스와 이벤트 소식을 가장 빠르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닫기

불편해질 권리

LIFESTYLE

클릭 한 번으로 쉽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이 시대에 굳이 크고 구식인 LP가 주목받는 이유에 대하여.

지난해 미국에서 발매 첫 주만에 4만 장이나 팔려나간 잭 화이트의 LP 음반 <Lazaretto>

서울레코드페어 당시 한정판 LP로 재발매된 노이즈가든의 <Noizegarden>

매년 레코드 스토어 데이에 참가하고 있는 런던의 인디 레코드숍 러프 트레이드

1981년 8월 1일, 미국의 한 케이블 TV채널이 방송을 시작했다. 당시 이들이 처음 내보낸 화면은 우주 비행사 닐 암스트롱이 달에 착륙하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재미나게도 그가 실제 달에 꽂은 성조기는 이 방송의 로고가 박힌 깃발로 대체돼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뮤직비디오 한 편이 전파를 탔다. 버글스(The Buggles)의 ‘Video Killed the Radio Star’였다.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를 죽였다는 이들의 노래 제목은 말 그대로 음악에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MTV 시대는 그렇게 시작됐다.
그럼 이번엔 2000년대. 오늘날 MTV의 탄생과 필적할 만한 음악 산업의 큰 사건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다. 스티브 잡스는 살아생전 ‘음악은 소유하는 것’이라 믿으며 MP3 플레이어인 아이팟으로 애플을 키웠지만, 최근엔 이들도 잡스의 패착을 시인하며 뒤늦게 스포티파이, 구글, 판도라 등의 기업에 이어 ‘애플뮤직’이란 이름으로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를 시작했다. 한편 이보다 앞서 올 초 국제음반산업협회(IFPI)는 지난해 미국 내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가 CD 판매량을 앞질렀다고 발표했다. 심지어 올해는 스트리밍 서비스가 최다 수입원인 디지털 다운로드 서비스도 따라잡을 거라는 전망까지 내놨다. 이는 현대의 음악 듣기 습관이 소유(CD, 다운로드)에서 구독(스트리밍)으로 변하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음(音)을 담는 쟁반(盤)이란 뜻의 ‘음반’은 이제 보이지도 않는 투명 물건으로 전락할 거라는 뜻. 스티브 잡스가 알면 가히 관 뚜껑을 열고 나올 만한 이야기다.
그런데 여기 놀라운 게 하나 더 있다. 바로 명이 다해 죽은줄 알았던 LP(바이닐) 음반이 세계 곳곳에서 다시금 주목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LP를 대체한 CD조차 서서히 ‘유물’로 전락하고 있는 이 마당에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지만, 최근 <월스트리트 저널>은 닐슨사운드스캔(NSS)의 자료를 인용해 지난해 미국에서 팔린 LP가 2013년보다 52%나 증가한 약 920만 장이었다고 보도했고(13년 만의 최고 기록이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 또한 올 초 오피셜차트 컴퍼니(OCC)의 자료를 인용해 지난해 영국에서만 129만장의 LP가 팔렸다고 발표했다(20년 만에 최고 판매량이다). 그런데 잠깐, 클릭 한 번으로 음원을 내려받는 것조차 귀찮아 점점 스트리밍 서비스로 음악 팬이 몰리는 지금, 음악 감상 행위의 난이도가 최고조에 이르는 LP가 다른 한편에서 주목받는 이유는 뭘까?

지난해 대비 음악 팬의 수가 20%나 증가한 서울레코드페어의 현장

LP의 부활에 대해 주의 깊게 살피려면 오늘날 전 세계 LP 열풍의 근원인 한 음악 축제부터 알아야 한다. ‘레코드 스토어 데이(Record Store Day)’다. 이 축제는 2008년 미국의 몇몇 독립 음반 가게가 아날로그 감성 물씬 풍기는 LP 음악을 들으며 음악 팬에게 숨겨진 명반을 소개하기 위해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은 영국과 일본, 프랑스, 독일, 호주, 이탈리아, 홍콩 등 전 세계 20여 개국의 수많은 독립 레코드 가게로 확대돼 국제적 축제가 되었다. 매년 4월 셋째 주 토요일에 열리는 이 축제를 기념하기 위해 각국의 뮤지션은 한정판 LP나 카세트테이프, CD 등을 발매하거나 공연을 벌이고, 음악 팬들은 곳곳에 열리는 장터를 찾아 희귀 음반을 구입한다. 축제의 본진 격인 미국과 영국의 작은 레코드 가게에서 이제껏 공연한 뮤지션만 해도 블러, 폴 매카트니, 밥 딜런, REM, 메탈리카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우선 ‘서울레코드페어’가 있다. 2011년에 처음 시작해 지난 6월 다섯 번째 축제를 마친 서울레코드페어는 레코드 스토어 데이의 한국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이 축제는 올해 역대 최다 규모인 90여 개의 부스를 설치하고 어느 해보다 많은 이가 찾았다. 심지어 올해는 메르스 여파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대비 페어를 찾은 음악 팬이 20% 정도 증가한 데다, 한국 독립 음악계의 중요한 이정표라 할 수 있는 ‘노이즈가든’이나 ‘언니네 이발관’ 같은 밴드의 한정판 LP도 제작·판매해 여러 이슈를 낳았다. 이렇듯 지금 LP 음악 시장의 성장은 독립 음반 가게들에서 기인했다 해도 무리가 아니다. 그런 독립 음반 가게들이 여는 음악 축제나 장터에 사람들이 몰리는 것도 디지털 음원과는 다른 음악의 맛을 느끼고 싶어 하는 팬이 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때론 판이 튀어 음악의 중요 소절을 건너뛰기도 하고, 바늘이 나아가지 않아 일부 소절이 반복되기도 하지만 LP 특유의 음색은 분명 누군가에게 큰 매력으로 작용한다.
서울레코드페어의 사무국장이자 독립 레이블 겸 레코드숍 김밥레코즈의 김영혁 대표는 지금 LP 음악의 인기 요인을 묻는 질문에 “CD 같은 기존 음반 포맷에 가려져 있던 LP의 장점이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면서 오히려 더 부각된 것”이라고 답했다. 이어서 “CD는 작고 편한 걸 추구하며 만든 매체인데, 다운로드와 스트리밍으로 작고 편한 게 충족되니 비로소 사람들이 더 크고 특별한 걸 찾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 말은 즉 ‘불편함으로의 회귀’다. 바로 형체가 없는 음원을 소비하는 요즘 시대에 LP가 음악을 실제로 구현하는 매개체로 음악 팬에게 어필하고 있다는 것.
그런가 하면 음악평론가 차우진은 요 근래 LP 음반의 인기가 그 ‘물성적 매력’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기존의 CD나 MP3 파일은 어디에서나 구할 수 있어 희소성이 낮았지만, LP는 어느 정도 가격도 있고 여러 개를 모았을 때 아트워크 또한 가능하기 때문에 젊은 층의 21세기 음악 즐기기에서 오히려 독특한 포지셔닝이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분명 빳빳한 종이 커버를 벌려 판을 꺼내고 그걸 턴테이블 위에 조심스레 얹는 경건한 행위는 LP만의 낭만이다. 단, 일단 그걸 턴테이블에 걸어놓으면 가능한 한 끝까지 들어야 한다. 맘에 드는 곡만 골라 들을 수도 없고, 당연히 ‘빨리 돌리기’도 할수 없다. 하지만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닌 이런 ‘자발적 구속’이 주는 음악 듣기의 쾌감이 그리 나쁘진 않다. 심지어 이 불편함 가득한 LP 음악 듣기는 디지털 시대가 주는 편리함이 몸에 켜켜이 쌓인 현시대의 우리에게 되레 ‘음악을 듣는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소유하지 않고 소비하는 음악’이 대세인 21세기에 LP가 음반 소유의 한 형태로 자리 잡은 이유를 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편리함에 물들어 그 극단까지 가보니 다시 불편해지고 싶었다고 얼버무릴까? 아니면 LP 그 자체에 뭔가 이론적으로 형언할 수 없는 매력이 있다고 해야 할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LP가 있던 시절 우린 분명 지금보다 음악을 소중히 감상했다는거다.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와 다운로드의 엄청난 공세 속에서도 LP가 살아남고 새로 음반이 발매되고 이런 걸 보면서 느끼는 것이 있다면, 이 글을 읽는 당신 또한 LP 음악 듣기가 그리 불편한 일은 아닐 것이다.

에디터 이영균 (youngkyoon@nobless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