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드웨이 열전
낮보다 화려한 밤의 도시. 끊임없이 뜨고 지는 별들의 세계. 올겨울 브로드웨이를 뜨겁게 달굴 새로운 화제작을 소개한다.
어떤 장르든 ‘가장 도전할 만한 격전지’가 있다. 클래식 음악 천재들이 너도나도 유럽 유학을 떠나고, 젊은 미술가들이 뉴욕과 베를린에 모여들고, 자국에서 나름 스타 대접을 받던 영화배우들마저 굳이 할리우드로 넘어가 신인처럼 오디션장을 들락거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실패의 위험 부담만큼 막대한 성공의 기회를 제공하는 자본과 영향력, 이른바 ‘판의 규모’가 다르기 때문이다. 공연계에도 이런 꿈의 무대가 존재한다. 매년 약 1300만 명의 관객이 약 1조800억 원어치의 공연 티켓을 구입하는 곳. 뉴욕 맨해튼 41번가와 53번가에 걸쳐 자리 잡은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극장 밀집 지역, 바로 브로드웨이다. 브로드웨이를 한바탕 뒤엎는 보수 공사의 시작은 매년 6월경, ‘연극계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토니상 시상식이 끝나면서부터다. 꾸준히 관객이 들끓는 몇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극장이 신중한 ‘물갈이’에 들어간다. 지난해에도 사정은 마찬가지 였다. 판매율이 지지부진한 작품들이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 무대 위로 또 다른 성공을 꿈꾸며 속속 입성한 신작. 그런데 이번 시즌에는 비교적 분명한 특징 하나가 눈에 띈다. 공연에 문외한인 이들조차 한 번쯤 보거나 들어본 이름, 소위 ‘할리우드 스타’를 내세운 공연이 유독 많다는 것이다.
그 포문을 연 작품은 2014년 10월부터 아메리칸 에어라인 극장에 오른 <The Real Thing>이다. 이완 맥그리거(그의 브로드웨이 데뷔 무대다)와 매기 질렌할의 출연으로 일찌감치 화제를 모았는데, 사실 화려한 건 캐스팅만이 아니다. 원작자 톰 스토파드는 영국 부조리극의 천재로 꼽히며 2012년엔 조 라이트가 연출한 영화 <안나 카레니나>의 각색을 맡아 연극보다 더 연극 같은 독특한 구성을 가능케 한 인물. <리얼 싱>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성공한 극작가의 연극과 실제 그의 삶을 나란히 저울 양쪽에 매단 뒤, 예술을 모방하기 시작한 일상의 단면을 예민하게 매만져가는 작품이다. 1982년 초연 이후 온갖 권위 있는 시상식을 휩쓴 고전 중 고전이지만, 결국 중요한 건 이번 시즌의 반응이다. 베일을 갓 벗은 2014년 버전에 대한 평가는 현재 다소 부정적이다. 제목과 같은 ‘진짜’ 감정이나 호흡, 보통의 삶에 대한 증거를 찾기 힘들다는 평가와 함께 ‘타임캡슐 같은’ 프러덕션 디자인에 대한 혹평이 이어졌다. 방대한 대사를 소화하는 맥그리거의 솜씨는 매끈하지만 과거 동일 인물을 연기한 제레미 아이언스나 스테펀 딜런에 비해 인위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Photo by Joan Marcus
<The Curious Incident of the Dog in the Night-Time>의 한 장면
<리얼 싱>을 향한 의외의 혹평은 비슷한 시기에 막을 올린 또 한 편의 작품과 비교하면 더욱 흥미롭다. 눈에 띄는 스타 한 명 없이 에델 배리모어 극장에서 공연 중인 <The Curious Incident of the Dog in the Night-Time>이 그 주인공. 물론 대다수의 브로드웨이 공연이 그렇듯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신성’은 아니다. 2003년 발간해 베스트셀러에 오른 마크 해던의 동명 미스터리 소설을 원작으로 한 데다 이미 런던의 무대에 올라 각종 수상 이력을 남기며 나름 매진 행렬을 기록한 공연이다. 다만 이번 브로드웨이 버전은 지난봄 줄리아드 음대를 졸업한 신예 앨릭스 샤프의 첫 뮤지컬 무대라는 점에서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현재 그의 공연은 꾸준히 입소문을 타며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버라이어티>의 매릴린 스타시오가 “<태양의 서커스>만큼 훌륭하다”며 극찬했다니, 이만하면 슈퍼스타를 민망하게 할 데뷔 성적인 셈.
Ⓒ Richard Termine
<The River>에서 열연 중인 휴 잭맨
이처럼 포장지 속 알맹이가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면 스‘ 타 캐스팅’이라는 홍보는 오히려 독이 된다.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괜히 더 욕을 먹는 경우도 많다. 다만 공인된 연출력과 안정적 무대 연기를 담보할 때 배우들의 명성이 흥행에 상당한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 또한 사실이다. 휴 잭맨의 이름을 걸고 11월 막을 올린 <The River>가 대표적인 예다. 울버린의 국제적 명성에 가려 종종 잊혀지지만, 실제 휴 잭맨은 2004년
더불어 휴 잭맨 못지않은 무비 스타 둘이 각각 브로드웨이에 입성했다. 우선 부스 극장에서 12월 오픈한 <The Elephant Man>을 보자. 19세기 영국에 실존한 다발성 신경 섬유종증 환자 조지프 매릭. 코끼리 같은 기괴한 외모 탓에 평생 불운하게 살아야 한 이 남자를 <실버라이닝 플레이북>(2012년)과 <아메리칸 허슬>(2013년)로 두 차례나 오스카에 노미네이트된 브래들리 쿠퍼가 연기한다. <엘리펀트 맨>은 토니상 수상 작가 버나드 포머런스의 고전 뮤지컬로 이미 수차례 무대와 스크린에 재현했는데, 스콧 엘리스가 연출한 이번 공연은 쿠퍼 외에도 퍼트리샤 클라크슨, 알렉산드로 니볼라 등 걸출한 배우들이 함께한다.
2015년 1월 새뮤얼 J 프리드먼 극장에서 오픈하는 <Constellations>에는 <브로크백 마운틴>(2005년)의 마초 카우보이 제이크 질렌할(<리얼 싱>의 매기 질렌할과 남매다)이 출연한다. 우연히 만난 두 남녀의 여정을 통해 인간관계의 무한한 가능성을 표현한 작품으로 2012년 런던에서 초연해 ‘관객의 뇌와 피부 속으로 침투하는 최고의 공연’이라 호평받았고, 이브닝 스탠더드 어워드에서 최우수 연극상을 수상하며 당시 29세였던 극작가 닉 페인에게 최연소 수상자라는 영예를 안겨주었다. 무엇보다 이번 브로드웨이 무대는
Ⓒ Vanessa Viana
<The Illusionists> 무대에서 종이를 이용한 마술을 선보이는 마술사 제프 홉스
물론 할리우드 스타의 이름값에 빚지지 않은 화제작도 있다.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에서 매진 행렬을 기록하고 최근 마퀴스 극장에 도착한 <The Illusionists>는 1996년 데이비드 카퍼필드의 공연 이후 18년 만에 브로드웨이로 귀환한 세기의 마술 쇼다. 7명의 국제적 마술사가 참여하는데, 2012년 세계마술올림픽(FISM)에서 ‘최연소’ 겸 ‘아시아인 최초’ 그랑프리 수상자 타이틀을 거머쥔 한국인 마술사 유호진도 그중 한 명. 흥미로운 마술 트릭과 아슬아슬한 곡예로 가득한 이 무대는 모든 연령대의 관객을 겨냥한 쇼맨십을 보여줄 예정이다.
Photo by Matt Hoyle
꾸준히 브로드웨이 진입을 시도하다 드디어 입성한 뮤지컬 <Honeymoon in Vegas>
마지막으로 지난해 토니상 수상자인 작곡가 제이슨 로버트 브라운의 <Honeymoon in Vegas>도 1월의 기대작으로 꼽힌다. 꾸준히 브로드웨이 진입을 시도하다 드디어 입성한 뮤지컬로 <뉴욕 타임스>의 벤 브랜들리가 ‘지나치게 웃기다’고 평한 데 이어 <엔터테인먼트 위클리> 역시 ‘웃음이 슬롯머신 당기듯 빠르게 터진다’며 극찬했다니, 일단 유쾌한 뮤지컬인 것만은 분명하다. 가볍게 웃고 떠들며 브로드웨이의 밤을 즐기고 싶은 이에게 추천할 만하다.
에디터 김이신 (christmas@noblesse.com)
글 류현경(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