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날레의 홍수에서 살아남기
21세기 들어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국제 미술 전시의 이름은 단연 ‘비엔날레(biennale)’다. 1895년 베니스에서 처음 시작한 이래 세계 곳곳에서 생겨난 비엔날레는 미술계 사람들이 가장 기다리는 주요 행사가 됐다. 비엔날레 홍수 시대에 글로벌 지역 비엔날레에 대한 단상을 전한다.
2015 이스탄불 비엔날레의 오프닝 세리머니
지난 30년 사이 국제 미술계의 가장 큰 변화를 꼽으라면, 글로벌 시대가 도래하면서 시작된 비엔날레의 확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많은 국제적 사건이 일어난 ‘1989년’은 베이징의 천안문 사건(6월),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8월), 베를린 장벽 붕괴(9월)가 이어지면서 냉전 체제의 종식과 더불어 새로운 세계의 도래를 약속했다. 이와 더불어 각 지역 국가의 미술 전시를 서로 소통시킨 비엔날레를 필두로 한 미술의 글로벌화는 미술계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게 했다. 한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1995년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 정책의 일환으로 베니스 비엔날레에 한국관을 신설했고, 동시에 광주비엔날레를 창립했다. 광주비엔날레는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시작한 ‘국제’ 비엔날레다. 1960년대에 열린 도쿄 비엔날레가 일본 작가 위주의 내수용 전시인 것에 반해, 광주비엔날레는 처음으로 아시아에서 강력한 국가 지원에 힘입어 시작된 중요한 행사다. 이후 ‘비엔날레 증후군’ 현상은 국제적으로 매우 빠른 속도로 번져나갔다.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170개의 비엔날레가 열리고 사라졌으며 2015년 한 해에만 29개의 비엔날레가 열렸다.
2015 이스탄불 비엔날레에서 로런스 와이너(Lawrence Weiner)가 선보인 ‘On the Verge’(2015)
Photo by Sahir Ugur Eren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Michelangelo Pistoletto)의 ‘Venus of the rags’. 대리석과 천으로 만들어졌다. 2015 이스탄불 비엔날레 출품작
Photo by Sahir Ugur Eren

펠린 탄(Pelin tan)과 안톤 비도클(Anton Vidokle)이 작업한 ‘2084: a science fiction show/Episode 2: The Fall of Artists’ Republic’. 이스탄불 비엔날레 출품작
Photo by Sahir Ugur Eren
이스탄불, 리옹 그리고 타이중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한 번쯤 비엔날레의 특징과 그 영향력 그리고 방향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난 수십 년간 르네상스 속에 살아온 비엔날레는 여전히 초심을 견지하고 있을까? 주어진 역할을 올바르게 수행하고 있을까?
기본적으로 비엔날레는 국제 미술계의 실험실 같은 역할과 함께 서로 다른 문화적 맥락에 대한 연구 및 탐구를 기본으로 하는 전시다. 그리고 미술계의 중요한 담론에 대해 함께 토론하는 플랫폼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엔날레의 부흥이 시작되고 약 25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현상은 매우 흥미롭다. 많은 비엔날레 가운데 누가 정확히 짚어주지 않아도 암암리에 형성된 서열이 있으며, 그중 가장 상위권에 위치한 것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베니스 비엔날레다. 그런데 최근 베니스 외에도 특별히 주목받는 몇 개 지역이 있다. 바로 이스탄불과 리옹이다.
이스탄불은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기독교와 회교가 서로 공존하는 문화의 접점이다. 중세의 세계화가 가장 활발한 하이브리드 문화의 생성지이기도 하다. 베니스 비엔날레가 다양한 국가관 전시를 통해 ‘미술 올림픽’ 같은 색깔을 띤다면, 1987년 시작된 이스탄불 비엔날레는 특히 최근 10년간 강력한 큐레이터들의 중요한 담론을 피력하는 ‘담론 제작소’라 불리며 새로운 스타를 발굴하는 전시로 호평을 받고 있다. 특히 유서 깊은 도시의 특성을 이용한 장소 발굴 및 전시 개발로 유명한데, 지난 9월 5일 개막한 올해 비엔날레는 그런 특성이 잘 드러나도록 도시 전역에서 행사를 진행했다.
전시 기획을 맡은 캐럴린 크리스토브 바카르기에브(Carolyn Christov-Bakargiev)는 지난 2012년 카셀 도큐멘타를 성공적으로 기획한 큐레이터로 초반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예상대로 그녀는 ‘소금물: Thought Forms 이론(Saltwater: Theory of Thought Forms)’이라는 제목으로 1500점 이상의 미술 작품과 해양학, 환경학, 해양사, 신경과학, 철학, 아르누보의 역사에 기인한 물건을 함께 소개했다. 1906년 ‘신경’을 발견해 노벨상을 받은 산티아고 라몬 이 카할(Santiago Ramon y Cajal)이 1870년에 그린 파도 페인팅과 애니 베전트(Annie Besant)의 ‘Thoughts Forms’ 이미지도 전시의 서두에서 소개했다. 그녀는 예술의 기능과 목적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호흡기와 신경을 안정시키는 중요한 기능을 하는 소금의 역할을 언급하는 등, 수세기를 거치며 많은 사람을 치료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온 우리 시대 예술의 다양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물론 현대미술 작품이 직접적으로 사회를 개혁하거나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접근한 수많은 20세기 학자의 사고와 철학적 담론은 분명 이 시대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었고, 이스탄불 전역을 돌아보며 그 자취를 감상할 수 있었던 이번 비엔날레 기획은 많은 미술인과 현지 관람객에게 시사하는 바가 컸다.
이번 전시는 도시 전역의 다양한 장소에서 열린 덕분에 커미션을 바탕으로 한 신작이 많았다. 크리스틴 테일러 패턴(Christine Taylor Patten)은 비정형적 패턴으로 움직이는 바다 물결을 형상화한 작품 ‘마이크로’를 공개했다. 1940년에 사망한 러시아의 유명 정치인 레프 트로츠키(Lev Trotsky)가 1920~1930년대에 유배당한 뷔위카다(Buyukada) 섬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윌리엄 켄트리지(William Kentridge)는 새로운 비디오 설치 작품을,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Adrian Villar Rojas)는 섬 해안에 설치한 대형 조각 설치 작품 등을 선보였다.
멕시코에서 활동 중인 프랑시스 알리스(Francis Alys)의 ‘The Silence of Ani’, 2015 이스탄불 비엔날레 출품작
Photo by Sahir Ugur Eren

오토봉 은캉가(Otobong NKanga)의 ‘Wetin you go do?’, 2015 리옹 비엔날레 출품작

중국의 개념미술가 허샹위 (He Xiangyu)의 ‘Turtle, Lion, Bear’, 2015 리옹 비엔날레 출품작
Courtesy de l’artiste et White Cube, Londres

지난 5월 열린 베니스 비엔날레의 전시 전경

안시아 해밀턴(Anthea Hamilton)의 ‘Vulcano Table’, 2015 리옹 비엔날레 출품작
Courtesy of the 13th Biennale de Lyon, Lyon, 2015 ⓒ Blaise Adilon
타이중에 있는 대만 국립 미술관에서 열린 2015 아시안 아트 비엔날레에서 만난 아누렌드라 제가데바(Anurendra Jegadeva)의 ‘Yesterday in a Padded Room…’과 라쿠엘 오멜라(Raquel Ormella)의 ‘Wealth for toil #4’
Courtesy of the artist, Installation view at 2015 Asian Art Biennial in Taiwan

타이중에 있는 대만 국립 미술관에서 열린 2015 아시안 아트 비엔날레에서 만난 아누렌드라 제가데바(Anurendra Jegadeva)의 ‘Yesterday in a Padded Room…’과 라쿠엘 오멜라(Raquel Ormella)의 ‘Wealth for toil #4’
Courtesy of the artist and Milani Gallery, Installation view at 2015 Asian Art Biennial in Taiwan

설치 작가 사르키스(Sarkis)의 ‘2 water tanks’. 2015 이스탄불 비엔날레 출품작
Photo by Sahir Ugur Eren
이스탄불 비엔날레가 인문학적 탐구에서 기인한 전시라면 유럽의 중요 비엔날레로 자리 잡은 리옹 비엔날레는 약간 다르다. 레지스탕스의 유적과 더불어 프랑스 근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장소로 손꼽히는 리옹은 프랑스 제2의 도시로 파리 다음으로 현대미술계에서 주목받는 곳이다. 1970년대에 자크 랑 문화부 장관의 탈중심적 문화 발전 정책의 일환으로 많은 작가가 이주하면서 더욱 문화적으로 발전했으며 일반인에게는 미슐랭 레스토랑의 집결지로 유명하다. 리옹 비엔날레는 최근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티에리 라스파유 리옹 국립 현대미술관 관장이 1991년 창립한 비엔날레다. 그는 지금껏 총감독으로 장기 집권 중이다. 1984년 리옹 국립 현대미술관 관장이 된 이래 30년째 관장직을 맡고 있는 입지전적 인물인 그는 미술관에서 ‘실험적 동시대 미술’ 프로그램을 선보여왔는데, 리옹 비엔날레에도 이를 그대로 적용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뿐 아니라 리옹 비엔날레는 프랑스의 국제적 큐레이터를 키워내는 플랫폼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랄트 스체만, 니콜라 부리오,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허우한루 등 현재 활발히 활동 중인 미술계의 키맨이 큐레이터로 참여하면서 더욱 주목받았다. 올해의 큐레이팅을 맡은 초청 큐레이터는 런던의 헤이워드 갤러리 디렉터 랠프 루고프(Ralph Rugoff)다. 올해 총감독을 맡은 라스파유가 제시한 화두는 ‘모던’이라는 개념인데, 이에 대해 랠프 루고프는 ‘모던 라이프’라는 제목의 전시를 꾸려 관람객의 관심을 일깨웠다.
사실상 포스트모더니즘이 종말을 맞은 이 시점에 다시 ‘모던’이라는 개념을 살피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1945년 이전의 세대를 말하는 ‘모던 세계(modern world)’가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새로움과 혁신적 사고를 뜻한다는 점이 특히 그렇다. 랠프 루고프는 전시 서두에서 “현대미술 작가는 여전히 예술과 철학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이라는 시나리오에 대한 화두를 중심으로 더욱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시각언어를 만들고 있다”며 이번 비엔날레에서 그런 작품을 만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만한 비엔날레는 타이중에 있는 대만 국립 미술관에서 진행하는 아시안 아트 비엔날레다. 이 비엔날레의 이번 주제는 ‘작가의 무브먼트 만들기(artist making movements)’다. 다소 정치적인 느낌이 나는 문장이지만 사실은 매우 빠른 변화와 성장통을 겪는 아시아의 무분별하고 불안정한 사회에 대한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이번에 참여한 작가들의 작품은 이스탄불이나 리옹처럼 대규모 설치 작품보다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불만과 걱정, 소위 말하는 행복의 허구성, 작은 위로의 느낌, 보안 기계의 실패 등 매우 개인적인 서사를 다룬 작품이 대부분이다.
사실 36명의 아시아 작가가 참여해 130여 점의 작품을 소개한 아시아 비엔날레는 1500점 이상의 작품으로 구성된 이스탄불 비엔날레나 리옹 비엔날레보다 매우 작은 규모의 비엔날레다. 하지만 여타 주요 비엔날레와 달리 대만 국립 미술관 소속 젊은 큐레이터가 기획한 기관 전시였고, 더군다나 전시 이외에 다양한 강의 프로그램과 아시아 큐레이터 포럼을 진행해 아시아 현대미술의 정체성과 방향성을 매우 심도 있게 탐구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비엔날레는 지난 몇 년간 엄청난 붐을 이루면서 국제성과 지역성을 더욱 복합적으로 연계한 미술계 행사를 유치하며 각자 차별화를 꾀하고 있다. 1990년대에 국제 교류를 할 수 있는 곳이 비엔날레였다면 2000년대에 들어서는 아트 페어에서 국제 미술에 대한 새로운 담론과 헤게모니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때에 과연 전 세계적으로 열렸다 사라지는 170여 개 비엔날레의 정체성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작품의 성격이 날로 다양해지는 이 시점에 국제 미술계는 비엔날레를 처음 개최한 초심을 돌아보고 실험적 작품을 통한 새로운 작가 발굴의 플랫폼으로서 역할과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이다.
에디터 김이신 (christmas@noblesse.com)
글 이지윤(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운영부장, 런던 대학교 미술사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