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야 생동하는 것
조용익 화백은 많은 이들이 잊고 있던, 그러나 단색화라는 미술계의 거대한 흐름에서 빠질 수 없는 이름이다. 그의 대규모 회고전은 노(老)화백의 재기를 알릴 뿐 아니라 한국 단색화의 시작점을 되짚어보는 자리이기도 했다.
무릇 회고전이란 감동을 수반하는 자리다. 주인공인 작가가 느끼는 감동, 회고전을 축하하기 위해 전시장을 찾은 지인들이 느끼는 감동, 미술관에 들른 관람객이 느끼는 감동의 온도는 모두 다르겠지만 한 사람이 예술가로 살아온 인생 전체를 조명하는 공간에 들어섰을 때 마음이 일렁이지 않는 이는 없으리라. 지난 2월 26일 성곡미술관에서 조용익 화백의 <지움의 비움>전을 둘러보는 관람객들의 눈빛에는 경건함이 스쳤다. 그리고 이어진 개막 행사에는 유달리 밝은 에너지가 넘쳐흘렀고, 한국 미술계 원로와 주요 인사들이 찾아와 조용익 화백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1998년 갑작스레 찾아온 병환과 함께 한동안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그가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온 것을 더없이 반기는 분위기였다.
4월 24일까지 열리는 이번 전시에 걸린 작품은 총 100여 점. 그의 첫 회고전이자 8년 만의 개인전이다. “나도 내 작품을 이렇게 한자리에 모아놓고 보는 건 처음이라 감회가 새로워요. 제자들이 가장 기뻐하지. 이사를 다닐 때마다 작품을 옮기는 게 힘들었는데 자식 같은 제자들이 와서 도와줬거든.” 어려운 시기에 작품을 보관할 공간이 없어 기증할까 생각도 했지만 제자들이 말렸다고 한다. 그의 작품은 강원도 사북의 폐교, 여주, 음성 그리고 충주의 반지하 건물을 전전했다. “그림이 고생 많았지.” 힘들어도 차마 떠나보낼 수 없었던 작품들이 이제야 전시장에서 빛을 보게 됐다. 2000년대 작품 중에는 장판지, 폐자재 등을 캔버스 삼아 그린 작은 그림도 많다. 재료비도, 둘 곳도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조용익 화백은 박서보, 정상화, 하종현, 윤형근, 정창섭 등과 함께 활동하며 한국 추상회화의 주요 흐름을 이끈 작가다. 그가 참여한 1961년 제2회 파리 비엔날레, 1962년 악튀엘전 등은 한국 현대 추상회화의 시작을 알린 전시였다. 또 1977년부터 1983년까지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을 역임하며 화단에서 중추적 역할을 했고, 1974년부터 1992년까지는 추계예술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그는 현재 한국 현대미술의 가장 큰 화두인 단색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지만 투병 생활을 하는 동안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다. 그의 작품이 다시금 화제가 된 계기는 지난 2015년 11월에 열린 홍콩 크리스티 경매. 거의 마지막 순서에 배치된 작품 2점이 시작가보다 3배나 높은 가격에 낙찰됐다. 잊힐 뻔한 거장을 극적으로 재발견한 순간이었다.
조용익 화백의 대표작은 아크릴물감을 캔버스에 고르게 칠한 뒤 손가락이나 페인팅 나이프를 이용해 색을 지워나간 작업이다. 수행자적인 무수한 반복 행위로 색을 지워 균일한 패턴을 만든다. “물감을 캔버스에 얹는 건 플러스 작업이지만 덜어내는 건 마이너스 작업이죠. 조각가와 비교하면 헨리 무어가 플러스 작업을 했고, 자코메티는 마이너스 작업을 한 것 같아요. 난 자코메티처럼 덜어내는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어요. 계속 비우고 긁어내면서.”
Work 76-416,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 163x131cm, 1976
Work 76-816,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 130x97cm, 1976
Work 74-7,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 139x106cm, 1974
비워내는 것이 곧 그리는 작업이 되는 그의 창작 방식에서는 동양철학의 근본 사상이 엿보인다. 그가 단색화의 다양성을 꾀한 작가로 조명받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미술평론가 윤진섭은 그의 작품 세계를 크게 세 시기로 나눴다. 1974년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는 손가락을 사용해 부드러운 물감의 흔적을 질서정연하게 남긴 ‘점화(點畵)의 시기’다. 7~8년간 마치 악보의 스타카토 기법처럼 짧게 끊어 지워나가는 작업을 반복했다. 이후 1980년대 후반까지는 붓을 들고 물감이 다 마르기 전에 한 번의 호흡으로 캔버스 전체에 리드미컬하고 반복적인 물결무늬를 그린 ‘물결의 시기’. 물결 연작을 그리면서 기존 스타카토보다 긴 호흡으로 변했다. 그는 이를 두고 “한 숨에 그린다”고 표현한다. 중단을 허용하지 않는 ‘일획’으로 완성한 그림이다. 그리고 1990년대 초부터 2000년대 후반까지는 화폭에 대나무를 닮은 형상을 그린 ‘무심(無心)의 시기’다.
이번 전시 작품 중 ‘Work 76-416’이나 ‘Work 74-7’, ‘Work 77-626’ 등은 주황색, 민트색 등 1970년대 당시 단색화 화가들이 잘 사용하지 않은 컬러로 시선을 끈다. 40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강렬하면서도 세련되고 오묘한 빛깔을 간직한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화가로서 타고난 컬러 감각이 드러난 작품이지만 정작 그가 중시하는 것은 색보다는 필치와 반복성이다. 이제 완전히 건강을 되찾은 그에게 무심의 시기 이후 제4시기를 기대하며 최근 작업에 대해 물었다. “예전엔 그림을 그리면서도 욕심이 있었는데 이제는 마음을 비우고 자연스럽게 그리고 싶어요. 자연에 대한 동경도 생겼죠. 내게 그림은 그 자체로 생활이니까, 숨 쉬듯 그려요.”
크리스티 경매 이후로 해외의 반응도 뜨겁다. 3월 홍콩의 에드워드 멀랭(Edouard Malingue) 갤러리를 통해 아트 바젤 홍콩에 출품한 이후 이 갤러리와 함께 5월 그룹전을 준비 중이다. 요즘은 대나무 작업에서 다시 예전처럼 비워내는 작업을 하는데 회고전 이후 전시회에서는 최근작도 함께 선보이고 싶다고 한다.
조금은 늦게 발견한 단색화 거장의 작품이 주는 메시지는 비워야 채울 수 있다는 것 그 이상이다. 지우고 비운 자리에서는 새로운 약동감이 느껴진다. 지금부터 해나갈 그의 작업과 전시에도 오래도록 이런 생동감이 깃들길 바란다.
에디터 안미영 (myahn@noblesse.com)
사진 김잔듸(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