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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시대의 표정을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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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와 베토벤, 클림트와 에곤 실레. ‘예술의 수도’ 빈을 누빈 천재 예술가들이다. 여기, 그들의 숨결을 찾아 떠난 발레와 같은 우아한 동선이 있다. 한여름 밤 우연히 만나 밤새 이야기를 나누며 빈의 골목을 누비던 영화 속 주인공이 되는 순간이다.

부르크 극장 외부 전경

부르크 정원에 있는 모차르트 동상(사진 조성관)

1996년 한 편의 영화가 세상에 나온 이후 빈을 찾는 청춘 남녀가 급증했다.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영화 같은 사랑을 꿈꾼다. 그런 청춘에게 깊이 각인된 이 영화의 무대는 빈(Wien). 영어로는 비엔나(Vienna)다. 기차 안에서 처음 만난 주인공 남녀는 빈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해가 뜨기 직전까지 데이트한다. 이때 남녀 주인공이 타고 다니는 전차 트램(tram)이 나온다. 이들이 탄 전차는 1번 트램이다. 1번 트램은 2번 트램처럼 순환선이다. 링슈트라세(Ringstraße), 즉 환상(環狀)도로를 뱅뱅 돈다. 일일 승차권(day pass)을 끊어 1번 트램을 타면 몇 번이고 원하는 정류장에서 타고 내릴 수 있다.

클림트, 베토벤 프리즈, 2.15×34.14m, 1901~1902. / ⓒ Photo by Oliver Ottenschläger

클림트가 부르크 극장 천장에 그린 ‘이집트에서 온 여인’, 1890~1891 / ⓒ Wien, Kunsthistorisches Museum

클림트, 키스, 캔버스에 유채, 180×180cm, 1908~1909 / ⓒ Belvedere, Vienna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흔적을 찾아서
빈은 합스부르크 제국 시절 600년 이상 음악의 수도로 군림했다. 그 시기에 모차르트, 베토벤, 하이든, 브람스, 슈베르트, 말러 등 일일이 다 거명할 수 없는 음악사의 거장들이 빈의 공기를 호흡하며 불후의 명곡을 남겼다. 빈을 대표하는 음악가들과 먼저 인사를 나눠보자.
첫 번째 주인공은 볼프강 A. 모차르트(1756~1791년)다. 모차르트의 성(姓)을 보자. Moz+art! 그는 인생이 곧 예술인 사람이다. 빈에 오면 비 오는 날을 제외하고 거리에선 모차르트 음악이 흘러나온다. 화창한 여름날, 구시가에 있는 슈테판 성당으로 통하는 케른트너 거리를 걸으면 그가 쓴 626곡 중 한 곡은 흘러나온다. 운이 좋으면 대로 한복판에 피아노를 갖다 놓고 연주하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 어디 그뿐인가. 모차르트로 청각을 정화했다면 미각으로 모차르트를 느껴볼 수도 있다. 빈 시내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물품이 바로 모차르트 초콜릿. 금색 은박지로 싼 초콜릿을 통해 모차르트를 혀끝으로 음미해본다. 다리가 아프면 모차르트 카페에서 아인슈페너를 한 잔 주문한다. 한국에서 ‘비엔나커피’로 알려진 커피다.
1번 트램을 타고 가다 부르크링에서 내린다. 구간별로 별도의 이름을 접두사로 붙였다. 호프부르크 앞이면 부르크링, 오페라극장 앞이면 오페라링 하는 식이다. 부르크링에서 내려 호프부르크를 왼편에 두고 오페라링을 향해 걸어가다 보면 부르크 정원이 나온다. 정원을 향한 두 번째 길로 들어간다. 한 남자의 동상이 나온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다! 그 앞에 작은 잔디밭이 있는데, 높은음자리표 모양으로 꽃을 심었다. 봄과 여름에 초록빛 잔디를 배경으로 높은음자리표가 붉은 색깔로 선연하게 돋아난다.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지만 1781년 빈으로 왔고, 빈에서 비로소 불멸의 음악가가 되었다. 빈으로 오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모차르트는 없었다.
빈에서 만날 또 다른 음악가는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1827년). 그는 독일 본에서 태어나 빈으로 왔다. 음악으로 성공하려면 음악의 수도 빈으로 가서 모차르트를 만나 음악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성격이 무던한 천재는 거의 없다. 천재는 극도로 예민한 감각과 무서운 집중력을 지닌 사람이다. 독신으로 일생을 마친 베토벤은 ‘괴팍한’ 천재의 전형이었다. 범재(凡才)는 번득이는 섬광 같은 천재(天才)의 광기를 감히 이해하지 못한다. 세상의 몰이해 때문에 베토벤은 손바닥만 한 빈에서 자그마치 80여 차례나 이사 다녔다. 베토벤이 살던 곳이라는 명패가 붙어 있는 집만 20개가 넘는다. 이런 집은 그냥 베토벤이 언제부터 언제까지 살았다는 객관적 사실을 기록해놓았다. 그러나 베토벤이 살던 집 중에서 빈 시 정부가 인정한 곳이 하나 있다. ‘파스콸라티 하우스.’ 왜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
지금부터 파스콸라티 하우스로 간다. 부르크 정원에서 나와 부르크링에서 반대 방향으로 가는 전차를 탄다. 호프부르크를 지나 두 번째 정류장인 루에거링에서 내린다. 루에거링에서 내리면 하늘을 찌를 듯한 고딕식 건물이 보인다. 빈 시청사다. 루에거는 19세기 후반 선출직 빈 시장을 지낸 인물이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 제국에서 선출직은 빈 시장이 유일했다. 시청 옆의 석조 건물이 빈 대학. 빈 대학과 마주 보는 지점에 우리가 가려는 집이 있다. 5층짜리 아파트 꼭대기가 파스콸라티 하우스다. 이 집은 높은 축대 위에 지었다. 그렇다 보니 집과 연결된 ‘빈 묄커바스타이’ 골목길은 짧은 오르막이다. 두 사람이 겨우 비켜갈 만한 좁은 나선형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베토벤이 살던 그 방을 느낄 수 있다. 합스부르크 제국 시절 얼마나 많은 귀족과 권력자가 떵떵거리며 살았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예술가를 후원한 파스콸라티를 비롯한 몇몇 사람만이 기억될 뿐이다.
이곳의 주인이던 파스콸라티는 합스부르크 제국 전성기에 남작(男爵)이었다. 남작이면 5등위 귀족 중에서 가장 아래였다.그러나 그는 그런 귀족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심미안을 타고났고 교양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가 소유한 집에 음악가 베토벤이 세 들었다. 이것은 우연이었다. 파스콸라티는 금방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았다. 베토벤은 이 아파트 꼭대기에서 2년여간 살다 싫증이 났는지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파스콸라티는 베토벤이 살던 방에 다른 세입자를 들이지 않고 비워두었다. 언제든지 베토벤이 돌아오면 내주려고. 지금은 5층 창문으로 빈 대학 건물밖에 보이지 않지만, 당시에는 탁 트인 한적한 교외였다. 베토벤은 시원한 교외 풍경이 펼쳐진 이곳을 좋아했다. 집주인은 대부분 세입자 베토벤을 ‘이상한 음악가’ 정도로 취급했지만 파스콸라티만큼은 천재에 걸맞은 대접을 했다. 훗날 빈 시 정부는 파스콸라티 남작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이 집에 그의 이름을 붙였고, ‘베토벤 박물관’으로 지정했다.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의 테레지아 여제 동상

제체시온 외부 전경. 클림트가 주축이 된 빈 분리파 운동을 상징하는 장소다.

미술관 구역 MQ의 광장에서는 음악회, 영화 상영회 등의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열린다.

‘빈 분리파’의 주역, 구스타프 클림트와 그 후예들
이번에는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년)를 만나러 가보자. 파스콸라티 하우스에서 나와 다시 호프부르크 쪽으로 길을 잡는다. 왼편에 란트만 카페가 보인다. 란트만 카페는 프로이트의 단골 카페였다. 빈은 정신분석학의 대부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배출한 도시이기도 하다. 란트만 카페를 지나자마자 왼편에 부르크 극장이 나타난다. 연극 전용 극장이다. 1888년 스물여섯 살 클림트는 부르크 극장 천장화 덕분에 예술가에게 수여하는 최고의 영예인 황금십자가상을 받는다. 클림트는 하루아침에 무명 화가에서 주목받는 신예로 도약하게 되었다. 공연이 없는 낮에 방문하면 독일어와 영어 투어를 할 수 있다. 입장료를 내고 이 투어를 따라가면 스타 탄생을 선언한 클림트의 초기작을 감상할 수 있다. 두 번째로 클림트의 초기작을 만날 수 있는 장소는 빈 미술사박물관이다. 환상도로를 사이에 두고 호프부르크와 마주 보는 곳이 미술사박물관과 자연사박물관이다. 두 박물관 사이에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이 있다. 광장 한가운데 서 있는 화려한 동상은 빈을 세계 음악의 수도로 만든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女帝)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를 보면 주인공 남녀가 이 동상 앞을 지나는 장면이 나온다.
광장을 지나 클림트를 만나러 빈 미술사박물관으로 들어간다. 그는 1891년 미술사박물관 내부의 문과 천장의 벽면에 13점의 그림을 그려 넣는다. 이 벽화로 클림트는 또 한 번 최고상을 받는다. 14점의 벽화는 모두 별도의 이름이 없다. 그중 한 작품이 가장 유명하다. 클림트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 그림을 ‘이집트에서 온 여인’으로 불렀다. 이제 그는 빈에서 최고의 젊은 화가로 떠올랐다. 2012년 빈은 클림트 탄생 150주년을 기념해 각종 기념행사를 마련했다. 뮤지컬 <클림트>부터 평소에 보기 힘든 특별전을 준비해 빈을 찾는 여행자를 행복하게 했다. 그중 빈 미술사박물관의 특별 이벤트가 눈길을 끌었다. 벽화는 성인의 평균 키보다 훨씬 높은 곳에 그려 이를 감상하려면 오랜 시간 올려다봐야 한다. 이런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한 차원에서 클림트의 벽화를 실감 나게 감상할 수 있도록 특별 사다리를 설치했다.
빈 미술사박물관에서 클림트의 초기작을 감상했다면 이제 그를 불멸의 존재로 만들어준 후기 작품을 만나러 가보자. 1908년 작 ‘키스’가 전시된 벨베데레 궁전으로. 잠깐, 여기서 누군가는 1891년에서 1909년으로 갑자기 17년을 건너뛰는 듯한 여행에 현기증을 느낄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벨베데레 궁전에 가기 전 시간 여행에서 오는 어지럼증을 진정시킬 징검다리 같은 곳을 먼저 들르자. 빈 시내를 반나절만 여행하는 사람이라도 이 건축물은 최소 한두 번은 보게 된다. 슈테판 성당과 모차르트 하우스를 보고 쇤브룬 궁전을 향하면 반드시 양배추 모양의 돔을 정수리에 이고 있는 특별한 건축물을 지나게 된다. 분리파 회관, 즉 제체시온(Secession)이다. 클림트는 역사주의 양식으로 그림을 그려 성공했지만 그대로 가서는 빈 미술계가 희망이 없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주류 화단에 반기를 들며 과거 양식에서 벗어나 시대를 맞는 예술 운동을 전개한다. 제체시온 벽면에는 독일어로 분리파 운동의 슬로건이 붙어 있다. “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예술의 자유를.” 제체시온에서는 분리파 회원의 전시뿐 아니라 외국 미술을 소개하기도 했다. 1900년 이곳에서 <일본 미술 특별전>을 개최한 사실이 대표적이다. 우리가 제체시온에 가봐야 하는 이유는 1902년 이곳에서 <베토벤 특별전>이 열렸고, 클림트가 ‘베토벤 프리즈’를 전시했기 때문이다. 길이가 장장 34m에 달하는 프레스코화다. ‘베토벤 프리즈’의 감동은 필설로는 형언하기 어렵다. 수년 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클림트>전을 열었을 때, ‘베토벤 프리즈’의 복제품을 전시했다.
제체시온에서 다시 트램 1번을 타고 움직인다. 슈바르첸베르크 광장에서 내려 트램 D로 갈아탄다. 현재 오스트리아 국립 미술관으로 사용하는 벨베데레 궁전은 상(上)과 하(下)로 나뉘는데, 우리의 클림트는 ‘벨베데레 궁전 상’에 잘 모셔져 있다. 이곳에는 19세기와 20세기 오스트리아 화가의 작품이 모여 있다. 클림트 컬렉션은 2층에 ‘유디트 I’ (1901년), ‘키스’(1908년) 등이 있다. 유디트는 유럽의 수많은 화가가 그렸지만 클림트가 그린 유디트가 단연 독보적이다. 구약성서에 나오는 여자 영웅을 클림트는 빈의 팜파탈로 묘사했다. ‘유디트 I’과 달리 ‘키스’는 오로지 벨베데레 궁전에 와야 감상할 수 있다. 국립 미술관 측이 아예 움직이지 못하게 벽면에 영구 고정해놓은 결과다. ‘키스’에 대한 오스트리아 정부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알프레드 쿠빈(Alfred Kubin), The Horror, 약 1902년경 / ⓒ Leopold Museum, Vienna, Inv. 879, (c) VBK, Vienna 2011

에곤 실레, Liegende Frau, 1917 / ⓒ Leopold Museum, Wien, Inv. 626

클림트 전시관에는 클림트 그림만 있는 게 아니다. 클림트의 애제자 에곤 실레(1890~1918년)의 작품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마치 실레의 그림이 클림트를 호위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세계 각국의 관람객은 실레의 다른 그림은 모두 그냥 지나쳐버린다. 실레도 클림트 앞에선 한낱 들러리에 불과한 것인가. 그러곤 모두 ‘키스’ 앞에 모여 숨을 죽인다. 정적이 흐른다. 하긴 쾌락의 절정에서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역사에 가정은 무의미하다지만 에곤 실레가 1918년 유럽 대륙을 초토화한 스페인 독감에 쓰러지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에곤 실레가 10년만 더 그림을 그렸더라면. 그랬다면 우리는 실레를 오스트리아 화가로 클림트와 같은 반열에 올려놓았을지 모른다. 천재 화가는 스물여덟 살의 나이로 너무 빨리 갔다. 그의 작품을 좀 더 만나보자. 목표 지점은 ‘미술관 구역(MQ, Museums Quartier)’. 다시 1번 트램을 타고 호프부르크 방향으로 간다. 부르크링에서 내려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으로 들어간다. 광장을 가로질러 곧장 나가 직진하면 주황색 지붕의 장방형 건축물이 나타난다. MQ다. 합스부르크 제국 시절 이 너른 공간은 마구간과 마차 대기소로 쓰였다. 정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별천지가 펼쳐진다. 마당은 자유로움 그 자체다. 이곳에 들어서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왼쪽의 흰색 건물과 오른쪽의 회색 건축물이 눈길을 끈다. 흰색 건물은 레오폴트 미술관이고, 회색 건물은 현대미술관 ‘Mumok’다. 우리는 레오폴트 미술관으로 방향을 튼다. 세계에서 에곤 실레의 그림을 가장 많이 소장한 곳이다. 물론 클림트, 코코슈카 등 다른 화가의 작품도 있다. 자화상을 한 점도 남기지 않은 클림트와는 대조적으로 실레는 많은 자화상을 남겼다. 그는 거울 앞에서 자세를 잡는 것을 즐겼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다양하게 그렸다. 심지어 ‘자위하는 자화상’까지 남겼다. 레오폴트 미술관에서는 ‘중국 랜턴을 든 자화상’을 비롯한 실레의 대표작을 만날 수 있다. 뭐니 뭐니 해도 실레 그림의 백미는 어린 소녀의 누드다. 실레는 가출 소녀들을 데려다 먹여주고 재워주며 모델로 썼다. 이게 소녀 유괴로 오인돼 한때 곤욕을 치르기도 했지만. 이런 위험천만한 시도를 한 결과 어떤 화가도 시도하지 않은 소녀의 누드를 탄생시켰다.
이렇게 빈에는 여러 가지 얼굴이 있다. 음악과 미술에서 불멸(不滅)의 이름을 남긴 4인을 통해 만난 빈은 가장 대표적 표정이다. 어떤 이는 첸트랄 카페, 슈페를 카페, 데멜 카페 등에서 커피를 마시며 도시를 음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에 따라 궁전을 관람하며 합스부르크 제국의 역사를, 공원을 거닐며 도심 속 휴식의 의미를 엿볼 수도 있겠다. 어떤 경우든 이렇게 빈을 맛보려면 이틀은 잡아야 한다. 최소 48시간은 보내야 640년 제국의 수도 빈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에디터 김재석 (jskim@noblesse.com)
조성관(<주간조선> 편집위원, <빈이 사랑한 천재들>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