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아름다움으로 춤추다
미니멀리즘적 획일성을 탈피해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토드 분체의 디자인은 한 편의 시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1 빨간 불빛의 농도가 차츰 바뀌는 조명 작품 미드서머.
2 스와로브스키와 협력한 지 15주년을 맞이해 디자인한 루미너스 리플렉션 밑에 선 디자이너 토드 분체.
3 스와로브스키와의 협업을 통해 탄생한 럭스 오르빗(Lux Orbit).
자연을 향한 로맨티시즘
2018년 디자인 상하이 기간에 운 좋게 그를 인터뷰할 기회가 생겼다. 첫 만남에서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푸른 호수처럼 투명한 그의 눈. 격의 없고 친근한 미소는 세계적 디자이너라기보다는 대학 선배 같은 느낌이었다.
토드 분체(Tord Boontje)는 1968년에 네덜란드 엔스헤데에서 태어났다. 네덜란드 에인트호번 디자인 아카데미(Design Academy Eindhoven)와 영국 왕립예술학교(The Royal College of Art)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다. 1996년 런던 남부에 작업실을 연 뒤 인스톨레이션, 비주얼 아이덴티티, 조명, 가구, 패브릭, 액세서리 등 다양한 작품을 만들고 있다. “오늘은 주얼리 제품을, 내일은 가구를 디자인하는 식이죠. 사실 모든 디자인이 서로 영감을 주고받으니까요.” 토드 분체는 2002년 스와로브스키와의 협업을 통해 진면목을 드러냈다. “작은 크리스털 부품을 처음 보았을 때 뇌리에 남아 있던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어요. 눈보라가 지나간 후 나뭇가지를 온통 뒤덮은 눈꽃을 마주한 순간이에요. 영롱한 반짝거림이 마치 크리스털 같았죠.” 오늘날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조명 작품의 고전으로 자리 잡은 ‘블라섬(Blossom)’의 탄생 비화다.
2004년 밀라노 국제가구박람회, 가구 브랜드 모로소의 전시관은 그 어느 때보다 붐볐다. 공주, 해적, 무녀, 왕자 등 7개의 캐릭터를 모티브로 디자인한 그의 의자는 보는 이의 마음을 즐겁게 해줄 뿐 아니라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같은 해에 종이 소재를 활용한 조명 작품 ‘미드서머(Midsummer)’도 선보였는데 꽃과 나뭇잎 형태로 오린 종이를 겹겹이 덧대어 화려한 공간감을 연출한 작품이다. 크고 작은 틈새로 새어 나오는 불빛이 어우러지며 자아내는 부드럽고 낭만적인 분위기가 일품이다. ‘갈런드(Garland)’도 동일한 디자인 방법을 채용했지만 종이가 아닌 금속 박편을 소재로 활용했다. “조명 디자인은 그것이 위치할 공간 환경도 고려해야 하죠. 미드서머와 갈런드는 장식적인 인테리어 스타일과 어울리는 작품이에요. 저는 늘 자연에서 영감을 얻고 자연계의 다양한 요소를 활용해요. 종이나 금속처럼 섬세하고 정교한 소재를 자연이 주는 따뜻함을 통해 재탄생시키는 작업이죠.”
2005년 그는 집과 작업실을 모두 프랑스 부르아르장탈(Bourg-Argental)로 옮겼다. 그곳에서 매일같이 숲을 거닐고 하루 동안 빛의 변화를 느끼며 대자연의 신비를 마음껏 누렸다. 꽃밭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의자 ‘프티 자르뎅(Petit Jardin)’이 바로 이때 탄생한 작품이다. 2008년에 디자인한 옷장 ‘피그 리프(Fig Leaf)’는 자연에 대한 그의 시적 상상력을 짐작케 한다. 옷장에는 수작업으로 만든 에나멜 나뭇잎 616개를 사용했는데 나뭇잎 한 장을 제작하는 데 꼬박 예닐곱 시간이 걸렸고, 각 나뭇잎마다 장인의 낙인을 새겼다. “수작업에 시간이 많이 들기 때문에 매년 3개만 한정해 만들고 있어요.” 이 작품을 보면서 문득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푸르른 나뭇가지와 잎들, 빛과 아름다움이 그 속에서 춤을 추누나… 나는 축복하노니, 나의 생명의 여정이 자연의 경건함 속에서 지나가기를.” 그가 의도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작품을 바라보는 동안 자연의 신비가 느껴졌다.

4 조명 작품의 고전으로 자리 잡은 블라섬.
5 2018년 밀라노 국제가구박람회 기간 동안 모로소 쇼룸에서 선보인 태피스트리.
6 곡선 등받이가 자연스레 햇빛을 가려주며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아웃도어 체어 섀도이.(Lux Orbit).
거장의 디자인 세계
프랑스에서 5년간 지낸 토드 분체는 런던으로 돌아가 영국 왕립예술학교 디자인과 교수로 활동을 시작했다.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건 정말이지 너무 즐거운 경험이었어요.” 4년간의 강단 생활을 이야기하는 그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영국 왕립예술학교는 아내이자 조소 예술가 에마 워펜든(Emma Woffenden)을 만난 곳이기도 하다. 디자인을 가르치며 걸출한 작품을 쏟아내기도 했다. 훌륭한 산업디자이너라면 일생 동안 역사에 남을 만한 의자 하나쯤은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 기준으로 보면 그는 내놓을 만한 의자가 여러 점이다. “공공장소에 놓을 의자, 거실에서 사용하는 의자, 야외용 의자 등 의자에도 서로 다른 기능이 있죠. 기능에 따라 디자인 방식과 소재도 달라져요. 사용자가 자연스레 이들의 차이를 느끼고 제품을 온전히 이해하며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디자인이죠.” ‘다운 투 더스크(Dawn to Dusk)’라 이름 붙인 회전의자는 런던의 템스강 남쪽 기슭에 새로 조성한 작은 공원을 위해 디자인한 것이다. 의자에 조용히 앉아 태양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말 그대로 ‘새벽에서 황혼까지’ 빛의 변화를 감상할 수 있다. 2009년 모로소를 위해 디자인한 아웃도어 체어 ‘섀도이(Shadowy)’는 장인이 수공으로 직조해 원시적인 느낌을 물씬 풍기면서도 현대적 디자인 감각이 돋보인다. 곡선 등받이가 자연스레 햇빛을 가려주며 그림자를 만들어내는데, 해가 쨍쨍한 여름날 이 의자에 앉는 것만으로도 달콤한 쉼을 만끽할 수 있다.
2017년은 스와로브스키와 협력한 지 15년이 되는 해였다. “스와로브스키와 함께 수정체를 연구, 개발했는데 수정의 형상을 디자인했죠. 크리스털 조명을 만들기 위해서는 빛과 수정이 만나 어떤 반응을 하는지 정확히 이해해야 해요.” 조명 작품 ‘루미너스 리플렉션(Luminous Reflections)’에서 이러한 결합을 찾아볼 수 있다. 둥근 고리와 소용돌이치는 듯한 형태의 크리스털이 만나 ‘빛의 흐름’과 같은 형상을 만들어낸 작품. 수정체를 통과한 빛은 마치 어둠 속 새하얀 눈이 빛을 발하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집요하리만치 소재와 기술을 탐색해온 그는 수공예와 장인정신에도 줄곧 관심을 가져왔다. 2018년 밀라노 국제가구박람회를 통해 선보인 모로소의 태피스트리도 그중 하나. 그를 대표하는 꽃과 식물을 형상화한 그림과 프랑스 생활 당시 그린 자연에 대한 이미지가 예술적 수공예를 통해 패브릭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수작업 생산과 기계를 이용한 대량생산에 관해 그는 매우 이성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제품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어느 것이 더 좋은가 하는 문제는 존재하지 않아요. 대량생산은 효율적이고 정확한 반면 수공 제작은 더 따뜻하지만, 양자가 결합할 수도 있죠. 중국의 장인이 대나무를 엮어 짜는 기술도 흥미로운데, 이후 협력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길 바라요.”
인터뷰 후 그가 명함을 건넸다. 앞면에는 이름과 작업실 주소가 뒷면에는 자유분방하게 뻗은 나뭇가지와 긴 뿔이 달린 사슴, 날개를 활짝 편 있는 작은 새 등 대자연의 매력을 담아낸 명함이었다. 그에게 디자인 기법이나 아름다운 도안은 마치 필요할 때 걸치고 필요치 않을 때 자연스레 벗는 옷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작품이 사람에게 전하는 온기와 낭만이라는 것을 그는 가장 잘 알고 있다. “디자인의 관심이 단지 조형에만 머무는 것도, 기능에만 머무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전달하고자 하는 어떤 삶의 철학이죠.”
에디터 김윤영(snob@noblesse.com)
글 조우징 사진 JJYPho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