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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나라로

ARTNOW

안규철은 말한다. “미술 작품은 영원하지 않다”고. 그의 작품은 이런 자명한 현실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미술의 존재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찾으려는 시도다. 이불에 이어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의 두 번째 작가로 선정된 그가 서울관에서 대규모 개인전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2016. 2. 14)를 열었다. 안규철이 본,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한, 어쩌면 영원히 보이지 않을 ‘사랑의 나라’는 어디일까?

중절모를 들고 ‘64개의 방’ 앞에 선 작가. 중절모는 그의 작품에 주로 등장하는 아이콘이다. 영상 시리즈 ‘사물의 뒷모습’에서 끝없이 추락하는 오브제로 등장했다. ‘64개의 방’은 벨벳 커튼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64개의 방이 미로처럼 이어지는 설치 작품이다.

안규철이 로베르토 무질의 <생전 유고 / 어리석음에 대하여>를 펼쳐 보고 있다. 전시 출품작 ‘1000명의 책’에서 관람객이 필사하는 국내외 문학작품 중 하나다.

마종기 시인의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라는 시에서 전시 제목을 가져왔어요. ‘어? 안규철이 사랑?’ 머릿속에 물음표가 그려졌습니다. 짧은 작가 노트의 첫 문장을 장식한 “결국 사랑인가?”라는 자문은 “그렇지만 나는 그 말을 다시 해야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집니다. 왜 ‘사랑’이란 단어를 선택하셨나요?
한국은 첨예한 갈등이 빚어지는 곳인데, 제가 보기에 그 갈등의 주체가 원하는 것은 모두 사랑이었어요. 잘 먹고 잘살고 싶은 각자의 욕망에 따른 다른 사랑요. ‘그런 상대적 사랑 말고 다른 사랑을 말할 순 없을까?’ 이것이 제가 전시를 통해 던지고 싶은 화두였습니다.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나라나 세계를 상상하는 거죠. 과거에 우리는 보이지 않는 유토피아를 꿈꾸었습니다. 그곳을 다시 불러오지 못하는 작금의 상황이 한국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라는 마종기 시인의 시를 전시 제목으로 사용했습니다.

‘사랑’이라는 단어에 ‘미술’이라는 단어를 넣어 읽으면 어떨까 싶더군요. 한편 ‘사랑’은 2014년 하이트컬렉션에서 열린 개인전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의 주제인 ‘실패’와도 공명합니다.
맞아요. 사랑이 아무리 상투적이라도, 그런 정서를 미술로 끌어오면 왜 안 되느냐는 반문도 있었죠. ‘미술이 사랑을 이야기하면 꼭 통속적이 되는 것일까?’ 미술이 많은 사람과 접점을 찾는 방법은 무엇일까 고민했어요. 미술은 다른 세계의 별난 무엇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계에 속한 것이다,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연대를 미술을 통해 느끼게 할 수 있겠다, 미술은 그런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전시를 통해 보여주고자 시도해봤습니다. 전시를 본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그런 질문과 의도가 어느 정도 전달된 것 같아 다행입니다.

이번 전시를 보고, ‘동사의 형식’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관람객은 낮은 둔덕을 딛고 새하얀 전시장에 입장하죠. 저는 그게 이상하게 느껴졌어요. 낯선 땅에 처음 발을 내딛는 기분이랄까요. 이곳에서 관람객은 아홉 마리 금붕어가 9개의 동심원으로 된 연못에서 쳇바퀴 돌듯 헤엄치는 모습을 내려다보고, 전시 기간이 지나면서 건반이 점차 빠지는 피아노 연주를 듣고, 전시장 중앙의 성 같은 구조물의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고, 전시장 곳곳의 글을 읽고, 필경사가 글을 쓰는 장면을 훔쳐보고, 모빌처럼 천장에 매달린 식물과 화분을 올려다보고, 흑과 백의 공간에 들어갔다 나오죠. 전시장에서 작품을 보며 몸을 쓰는 일이 낯선 것도 아닌데, ‘전시를 본다’는 경험의 감각을 일깨우는 듯했습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매력은 겉으로 보기엔 건물 자체가 소박하고 건축가가 뒤로 숨어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안에 들어서면 엄청난 스케일의 공간을 만나게 되죠.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의 첫 번째 작가로 선정된 이불의 전시를 보러 이곳에 왔을 때 난쟁이가 된 기분이었어요. 그야말로 프로젝트형 전시를 위한 공간이구나 싶었죠. 이곳은 한시적으로 사건이 일어나고, 다음 작가가 또 다른 사건을 벌이는 기획 전시실이지, 작업실에서 완성한 작품을 모아 전시하는 곳은 절대 아니에요. 이 엄청난 공간을 받은 작가는 몇 개월 동안 여기서 뭔가 특별한 일이 벌어지도록 해야 한다는 중압감을 떠안을 수밖에 없습니다. 작가는 마치 놀이동산처럼 관람객이 즉각 반응할 수 있는 감각적 스펙터클을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게 돼요. 공간의 조건 자체가 작가의 역할을 제한하고 영향을 미치는 거죠. 제겐 그 제한 조건을 해결하는 일이 중요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관람객의 위치를 구경꾼에서 참여자로 바꿀까, 관람객이 이 안에서 능동적으로 움직이며 공간을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전시의 마지막 섹션인 ‘침묵의 방’으로 안규철이 들어섰다. 거대한 공 모양의 구조물 안은 말 그대로 텅 비어 있다.

일반 관람객 입장에서는 안규철이라는 작가의 작품 세계로 진입하는 좋은 관문이 될 것 같아요. 식물, 물, 금붕어, 피아노, 손, 중절모, 테이블, 사다리 같은 구조물 등 이전 작품에도 등장한 모티브가 이어지며 만드는 감각적 리듬이 즐거웠습니다.
미술관은 역시나 죽은 것을 위한 공간이구나 새삼 느꼈어요. 이곳에 식물이나 물고기처럼 살아 있는 것이 들어오면서 전시가 굉장히 촉각적으로 변하더군요. 이 큰 공간을 어떻게 분할할까 많이 고민했죠. 첫 번째 공간에 들어가면 바닥에 놓여 있는 동심원이 전시 공간 전체의 차분함을 이끌죠. 그 옆에 거대한 성벽처럼 ‘1000명의 책’ 구조물 블록이 있고 비정형 화분이 천장과 바닥에 매달려 있죠. 그 뒤에는 밀도가 아주 높은 64개 방의 벨벳 커튼이 있고, 맨 마지막에 다시 구형의 허공이 있습니다. 코스 요리처럼 원에서 시작해 구로 끝나고, 그 사이에서 고립된 육면체들이 흩어졌다 모였다 하는 구성이죠. 혹자는 “안규철은 컨셉은 있는데, 비주얼이 없어”라고 말하는데, 물론 저라고 비주얼을 생각 안 하는 것은 아닙니다.(웃음) 쓸데없는 것을 안 붙이려다 보니 자꾸 비우게 되는 거죠. 조형 작가로서 제 일을 외투 만드는 일에 비유하면, 기호학적 의미에서 ‘외투’라는 것에 가장 부합하는 외투의 전형을 찾으려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2010년 이후 작품은 자족적 사물에서 관람객의 참여로 비로소 완성되는 일종의 ‘플랫폼’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2014년 백남준아트센터의 기획전 <달의 변주곡>에 출품한 ‘5개의 무지개’, 2013년 갤러리스케이프 개인전에서 선보인 ‘마음속의 수평선’과 ‘무지개를 그리는 법’, 2012년 광주비엔날레 출품작 ‘그들이 떠난 곳에서-바다’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죠.
2004년 로댕갤러리(현재 삼성미술관 플라토)에서 열린 개인전이 그 변화의 출발점인 것 같아요. 서울관 전시와 마찬가지로 큰 공간을 어떻게 채울까 하는 문제가 제게 주어졌고, 112개의 문을 연결해 49개의 방을 만들었습니다. 사실 텅 빈 통로에 불과한 그곳을 방문한 관람객의 반응은 아주 다양했어요. 그들은 공간과 자신의 기억을 연결함으로써 작품을 나름대로 경험하고 해석하더군요. 아이에게는 신기한 놀이터였지만, 1980년대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닌 사람은 제게 왜 이런 고문 장치를 만들었느냐며 항의하기도 했어요. 거기서 제가 한 일은 두 줄짜리 ​문장으로도 설명이 가능한 아주 단순한 공간 구획뿐인데, 이렇듯 작품에 대한 극단적으로 다른 반응이 깊은 인상을 남겼죠. 2012년 광주비엔날레에서 이런 경험을 더 확장해봤습니다. 조각난 그림을 도시 곳곳에 버려두고 그것을 발견한 사람들이 우리 쪽에 연락하면 전시장으로 가져오게 하는 프로젝트였습니다. 제 역할은 이런 상황을 펼쳐놓고 그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기다리는 사람이었죠. 하지만 관람객을 참여시키는 이런 작업의 결과는 종종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상투적 반응으로 귀결되곤 해요. 같은 작품을 다른 곳에 전시해도 비슷한 결과가 나오더군요. 관람객이 작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빈칸을 만들어준다고 하고는 오히려 너무 제한하지 않았나 혹은 거꾸로 너무 열어둔 것은 아닌가 자문했죠. 그래서 이번엔 관람객의 역할을 타이트하게 제한해봤어요.

‘1000명의 책’은 누구나 신청만 하면 이곳에 와서 1시간 동안 필사를 할 수 있지만 일정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죠. ‘기억의 벽’에서는 관람객에게 2개의 색종이 중 하나를 고르게 하고 연필만 줍니다. 최종 결과는 좀 더 기다려야 확인할 수 있겠죠. ‘1000명의 책’은 이번 전시의 중심축과 같습니다. 웹사이트(http://ill.ahnkyuchul.com)를 통해 예약한 참가자가 작가가 선정한 국내외 문학작품을 독립된 공간에서 1시간씩 연이어 필사하는 작품인데, 관람객은 그들이 필사하는 뒷모습을 멀리서 지켜보죠. 인기가 상당합니다. 저도 시도해봤는데 이미 한 달 치 예약이 완료된 상태였어요.
지원자를 못 채우면 내가 들어가서 쓰는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신청하는 분이 많아서 놀랐어요. 필사가 쉬운 일 같지만 아닙니다. 한번은 참여자가 펑크를 내는 바람에 제가 대타로 작업한 적이 있는데 손목이 아프더라고요. 참여자의 글씨체를 보는 재미도 있어요. 임근준 평론가는 괘도에 매직으로 쓰던 글씨체로 예쁘게 썼더군요. 안상수 디자이너는 한글날에 붓을 가져와서 먹을 찍어 아주 정돈된 글씨체로 썼어요. 지난주에 양혜규 작가가 와서 썼는데, 의외로 활달한 필체로 작업했더군요. 전시가 끝나면 필사본으로 책을 만들어 참여자에게 나눠줄 계획입니다.

침묵의 방’ 설치 장면. 백토와 석회 35톤을 쏟아부어 만들었다.
​사진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아홉 마리 금붕어, 스테인리스스틸, 기포 발생기, 수중 펌프, 모터, 물, 금붕어, 400×400×30cm, 2015. 원형 구조물의 공간에서 완벽히 고립된 아홉 마리 금붕어가 각자의 삶을 산다.
​사진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식물의 시간 II, 철, 와이어, 식물, 700×500×500cm, 2015. 15개의 화분이 모빌이 되어 서로의 무게와 위치에 따라 평형을 유지한다.

작가의 역할을 기획자로 제한하고 관람객을 작품 완성의 주체로 끌어들이는 태도는 프랑스 큐레이터이자 이론가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가 주장한 ‘관계미학(Relational Aesthetics)’에 특별한 관심을 표한 것으로 이해하면 될까요?
작가가 미술관 제도가 제공하고 허용하는 틀 안에서 관람객의 비판적 능력을 활성화한다는 차원이라면, 관계미학의 방법론을 얼마든지 활용해볼 수 있겠다 싶었어요. 제 바람은 시인처럼 노트 한 권과 연필 한 자루로 물질적 부담 없이 작품 활동을 하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미술을 물질의 구속으로부터 해방하고 지적 활동 그 자체로 만들고자 한 데서 비롯된 이런 생각은, 미술 자체의 존립 근거를 질문하는 차원에서 관계미학 작가들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앞서 관람객의 기억에 대해 말씀하셔서 한 가지 고백하고 싶네요. 2014년 커먼센터에서 서로 다른 세대의 작가를 매치해 열린 <청춘과 잉여>전에 ‘그 남자의 가방’을 출품하셨죠. 전시장에 아무도 없길래, 실례인 줄 알지만 날개 모양의 그 가방을 열어봤어요. 역시나 아무것도 없더군요.(웃음) 이번 전시의 마지막 공간에 있는 거대한 원형 설치 작품 ‘침묵의 방’에 들어갔을 때, 그 순간이 다시 떠올랐어요. 기대에 반하는 부재를 확인하고 그 감정을 되새김질하는 일이 선생님의 작품을 보는 아이러니한 즐거움입니다.
물질적 오브제를 만드는 일에 두려움이 있는 것 같아요. 작품이 상품이 되고, 자꾸 다른 맥락에서 유통되는 것에 대해 고민이 많습니다. 작가 혼자 쓸 수 있는 거대한 공간과 제작 지원금으로 뭘 보여줘야 할까 고민하다 그걸 뒤집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작가가 엄청난 물량을 투입해 만들어놓은 작품이 텅 비어 있더라. 그 이상한 역설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관람객이 다시 질문을 던질 수 있겠죠. 이게 무슨 돈키호테 같은 짓인가, 이 인간 왜 저러고 사는가, 그런데 나는 왜 이러고 살까…. 과거에는 작가가 관람객을 가르치는 입장이었다면, 이제는 관람객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발견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침묵의 방’에는 흙과 시멘트 35톤을 쏟아부었어요. 미술관에서 바닥이 무너질까 걱정할 정도였죠. 이 구의 공허함은, 오로지 물질적 성장만을 추구하는 한국 사회와 닮지 않았나 싶어요. 기를 쓰고 인생을 걸어 무엇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안에 아무것도 없는 거죠. 1000명이 필사해 완성한 ‘1000명의 책’이 어디론가 흩어져 안 보이는 상태로 사라지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전시장 밖에 드로잉과 스케치를 따로 모은 아카이브 섹션을 마련했습니다.
아카이브 섹션을 보면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거예요. 드로잉에 담긴 작가의 이야기가 전부라면, 뭔가를 구현하는 일은 무엇을 의미할까? 제게 드로잉은 무의식의 보이지 않는 생각을 형태화하는 일입니다. 이 드로잉은 대부분 액자에 끼워 전시할 ‘작품’을 예상하고 그린 것이 아니에요. (검은 공책을 펼쳐 보이며) 갈수록 노트에 그림보다 글이 많아지네요. 결과적으로 이번 전시에서도 글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웃음)

‘국립현대미술관 현대차 시리즈’의 목표는 “독자적 작품 세계를 구축한 국내 중진 작가를 지원함으로써 한국 현대미술의 새로운 태도와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겁니다. 일반 관람객뿐 아니라 젊은 작가도 전시를 보러 많이 오고 있어요. 혹시 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은 없나요? 국내에 몇 안 되는 메이저 갤러리만 바라보며 작업하면 작가가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제한돼요. 미술계에서 제 역할은 갤러리와 관계없이 어떤 대안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 작가는 저런 걸 끈질기게 하는데, 저런 작업도 뭔가 작동을 하네?” 선배 작가로서 후배들이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멀리 보이는 벽면의 작품은 ‘기억의 벽’. 가장 그리운 대상을 쓰라는 작가의 주문에 따라 관람객이 적어놓은 쪽지가 전시장 벽면에 카드 섹션처럼 펼쳐진다.

관람객은 성처럼 만든 구조물에 올라 전시장 전체를 조망하거나 ‘1000명의 책’의 참가자가 필사하는 뒷모습을 멀리서 바라볼 수 있다.

에디터 김재석 (jskim@noblesse.com)
사진 김태균(LE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