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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로 해체한 풍경, 가상이 드러낸 현실

ARTNOW

포인트 클라우드 기술로 현실의 사물들을 디지털 공간에 소환하고, 게임 엔진의 레디메이드 오브제를 해체해 새로운 질서로 재조합하는 박재훈. 작가 박재훈에게 사물은 문명의 욕망과 폭력이 응축된 언어적 기호이며, 가상 세계는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진실을 드러내는 무대다. 디지털 공간에서 조물주가 된 작가가 구축하는 세계는 아름답지만 섬뜩하고, 시적이지만 냉혹하다.

박재훈 서울대학교 서양화과와 동 대학원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 왕립 예술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그는 현재 암스테르담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세계적 주목을 받고 있다. 게임 엔진의 레디메이드 오브제를 해체하고 재조합하며, 조물주처럼 자유로운 디지털 공간에서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세계를 창조한다.

불타는 풍차가 잿빛 연기를 내뿜으며 소리 없이 돌아간다. 네덜란드를 상징하는 아름다운 문화유산에서 박재훈은 가려진 식민지 역사와 과열된 자본주의의 폭력을 읽어낸다. ‘과열된 풍차’처럼, 일상의 사물들 속에 숨겨진 이데올로기와 권력 구조를 디지털 공간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폐허, 후쿠시마 원전, 세른(CERN)의 거대 입자가속기가 포인트 클라우드(point cloud) 기술로 가상공간에 소환된다. ‘사건의 지평’에서 비극과 과학기술의 찬란함이 한 화면에 병치되며 예측 불가능한 상상적 영토를 만들고, ‘회전문’의 플라스틱 마네킹은 백화점 회전문에 갇힌 채 물리법칙에 따라 계산된 속도로 부딪히고 넘어지며 이내 얽히고설킨다. 박재훈에게 사물은 단순한 오브제가 아니라 문명의 욕망과 폭력이 응축된 언어적 기호다. 오는 10월 현대퓨처넷 옥외 미디어월에서 상영될 ‘피그말리온의 돌’ 공개를 앞둔 그에게 사물의 언어, 디지털의 물질성, 그리고 가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예술적 실험에 대해 물었다.

사건의 지평, 3D 시뮬레이션 비디오, 2021.
아래 왼쪽 대안공간 루프의 〈눈 홉뜨기: 디지털 파사드를 위한 제안들〉전에서 선보인 ‘거룩한 묘시’ 설치 전경, 2024.
아래 오른쪽 단두대가 있는 방, 3D 시뮬레이션 비디오, 2분 33초, 2023.

어린 시절 경험이 작업에 어떤 영향을 줬나요? 아버지가 건축 일을 하셔서 어릴 적부터 건축 현장은 제 놀이터였습니다. 철근과 목재, 콘크리트가 교차하는 풍경과 냄새, 그리고 공간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고 느끼는 것이 제 시선을 길렀다고 생각해요.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졸업 즈음에는 캔버스의 평면성보다 공간과 사물이 가진 조형 언어에 끌렸습니다. 대학원에서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고, 오브제를 매개로 한 설치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네덜란드에 건너온 뒤에는 코로나19 팬데믹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3D와 가상 세계로 관심을 확장하게 되었고요. 현실의 사물이 디지털 환경에서 어떻게 재현되고 변형되는지 탐구하면서, 사물을 언어로 바라보는 관점을 디지털 작업에도 적용하게 됐습니다.
사물을 언어로 보는 관점이 작품 세계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나요? 저에게 사물은 단순히 기능을 수행하는 도구를 넘어 하나의 기호 체계이자 언어입니다. 사물은 곧 인간을 비추는 거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만든 사물은 대부분 인체와 비례적으로 관계를 맺고, 그 안에 인간적 운명과 문화적 맥락이 녹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물을 서로 조합하고 재맥락화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사물을 다루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구조적 · 개념적 완성도와 정밀함을 중시하는 태도도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정밀함에 대한 집착은 작품에 어떻게 드러나나요? 미술사에서는 예술가의 ‘손’을 신화처럼 숭배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 신화에 불편함을 느껴왔습니다. 사물 설치를 선호하는 이유도 기계적 정밀함과 수학적 원리에 의지하면, 작가의 손보다 개념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보이더군요. 3D 렌더링 작업에서 사진 같은 결과를 지향하지만, 렌더링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회화적 흔적이 드러납니다. 두 선이 겹칠 때 프로그램이 어떤 지점을 선택해야 할지 몰라 ‘버벅이는’ 디지털 글리치(glitch) 현상 같은 것이죠. 저는 이런 회화적 흔적은 일부러 남겨두려 합니다. 그것이 기술의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또 다른 미감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과열된 풍차, 3D 시뮬레이션 비디오, 2분, 2020.
아래 1 선전 기계, 내열 합성 폴리머 가공, 37.5×28.1×8.5cm, 2025. 2 발사대, 합성 폴리머 아크릴 도색, 37.5×28.1×6.8cm, 2025. 3 내부의 중심, 합성 폴리머 아크릴 도색, 37.5×28.1×11.5cm, 2025. 4 우주비행사 기동 유닛, 합성 폴리머 아크릴 도색, 37.5×28.1×14.2cm, 2025.

디지털 세계에서도 ‘물질성’을 본다고 했습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흔히 디지털은 비물질적이라고 여기지만, 저는 그 안에 분명한 물질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게임 속에서 무기를 휘두르거나 농작물을 심고, 영토를 확장하는 등의 행위는 가상의 코드일지라도 물질적 감각을 동반합니다. 현물에 기반하지 않은 가상화폐 시장이 득세하는 것 또한 같은 물질적 감각이 더욱 직관적으로 인간의 욕망의 체계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현실의 오브제가 가상 세계에서도 건축가나 게임 개발자에 의해 구현되고, 저는 그런 오브제를 다운로드해 ‘디지털 레디메이드’처럼 다루며 작업을 전개합니다.
디지털 세계의 물질성과 현실 세계의 물질성은 어떻게 다르다고 보나요? 현실 세계와 달리 디지털 세계의 사물은 철저히 0과 1의 2진법으로 구성됩니다. 3D 모델링은 점과 선, 면의 집합으로 형태를 만들고, 그 과정에서 연산 능력과 최적화의 한계가 드러납니다. 사진적 사실감을 구현하기 위해 텍스처를 입히는 과정에서 다양한 시각적 트릭이 개입하죠. 사실성을 극대화하려고 노멀 맵(normal map) 텍스처를 활용해 사물의 표면에 노란빛의 도돌도돌한 질감을 얹는 것도 그 예입니다. 저는 이걸 디지털 물질성의 부여 과정으로 봅니다. 이러한 기술은 끊임없이 진화합니다. 마치 생명체가 환경에 적응하며 진화하듯, 디지털 세계 역시 재현의 효율성과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 발전합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현실 세계와 디지털 세계가 서로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탐구는 ‘피그말리온의 돌’에서도 이어지죠. 이 작품을 오는 10월 현대퓨처넷 옥외 미디어월에서 2주간 상영할 예정이라고요. 네. 그 영상은 ‘빛’과 ‘생명’을 핵심 요소로 삼았습니다. 네덜란드에 온 후, 저는 빛의 성질과 그것이 조형성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후기 르네상스와 바로크 회화에서도 빛을 극적으로 다루는 것이 중요한 요소였지만, 회화 속 광원은 대개 캔버스 밖에 존재합니다. 그 작품에서 저는 광원을 프레임 안으로 끌어들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돌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작은 유리구슬, 그 안에 태양이 들어 있는 듯한 이미지를 구현했습니다. 태양빛이 발화하면 이를 중심으로 사물이 밝아지면서 식물이 자라고, 빛이 닿지 않는 반대편의 역광에선 식물이 자라지 않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우주에는 반사체가 없어 역광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보름달이 초승달로 변하는 것도 사실은 같은 원리죠. 빛의 명암 대비가 극적으로 부각되며, 피그말리온의 돌조각이 아프로디테에 의해 생명력을 얻어 갈라테이아가 되듯, 우주 공간에서 생명력을 가진 사물이 어떻게 보이는지 탐색할 수 있었습니다.

암스테르담 베스테르하스파브릭에서 열린 단체전 〈UNBOUND〉에서 선보인 ‘거룩한 묘시’(2022) 설치 전경, 2023.
아래 왼쪽 돌과 모래, 3D 시뮬레이션 비디오, 4분 44초, 〈Fairy Tales〉, WWNN, Seoul, 2023.
아래 오른쪽 마지막 빙하, 3D 시뮬레이션 비디오, 4분, 2022.

그 작품은 네덜란드어로 ‘토양’을 뜻하는 ‘보뎀(Bodem)’ 연작의 일환입니다. 이 연작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나요? 암스테르담 시청의 커미션으로 탄생했습니다. 저는 시가 도시 속에서 인간과 동물이 함께 거주하는 토양의 공생 시스템을 필두로 척도, 깊이, 시간, 상호작용 네 가지를 다룬 워크숍에 참여했습니다. 워크숍에서 특히 인상적인 건 두 명의 게스트 강연자였습니다. 한 명은 곰팡이 연구자였고, 다른 한 명은 ‘워터넷 (Waternet)’이라는 네덜란드의 수도 및 전기 배관을 관리하는 기관의 전문가였습니다. 워크숍에서 곰팡이 연구자는 나무와 땅속 균사체의 에너지 교환 방식이 자본주의와 놀랍도록 닮았다고 말했습니다. 나무의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시기에 균사체는 오히려 자원을 아끼고, 그렇지 않은 시기에는 더 많이 나눠주고 서로 경쟁하며 공생하는 구조를 말하더군요. 이는 증권 거래 시장의 흐름과 매우 비슷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출발해 토양과 자연, 균사체의 공생을 시뮬레이션 영상으로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물리적 조각으로 확장한 신작에 대해서도 들려주세요. 주로 미디어 작업을 해왔기에 한편으로 전환점이 되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존 작업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인공물과 대량생산된 사물이 여전히 작업의 중심에 있습니다. 이를테면 벤틸레이션 구조가 어떻게 되어야 가장 효율적으로 공기를 배출할 수 있는지 같은 산업디자인 언어에 주목합니다. 이런 결과물을 조합해 형태를 만들고 있어요. 또 종교적 형태에도 관심이 있습니다. 기독교 성당의 패턴, 불교 단청의 문양, 아즈텍 문명의 돌조각에서 볼 수 있는 기하학적 형태는 인간이 남긴 가장 오래된 기호 체계입니다. 흥미로운 건, 이런 종교적 패턴에도 수학적 질서가 숨어 있다는 점입니다. 산업적 효율성과 종교적 상징이 교차하는 접점도 탐구하고 있습니다.
작업을 지속하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요? 제 작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신 인간이 어떤 존재였는지 기록하는 일에 더 큰 의미를 둡니다. 과거가 현재와 미래를 비추듯, 기록은 미래의 단초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기록하기 위해 사물의 역사와 기원을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멸망한 뒤 찾아온 외계의 존재가 지구에 남은 사물과 작품을 통해 인류를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상상이 작업을 지속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힘이라고 할까요?
앞으로 목표에 대해 들려준다면요? 지속적으로 작업하면서 조금 더 큰 작업실을 마련해 목공이나 3D 프린팅, 3D 스캐닝 등 멀티미디어 작업 장비를 갖추는 것입니다. 다양한 배경의 작가들이 머물며 교류하고 전시할 수 있는 공간과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제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하도경(미술 · 디자인 저널리스트)
에디터 정송(song@noblesse.com)
사진 박재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