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화의 끝없는 계승
현대미술에 드러난 산수화의 위상.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강서경 개인전 〈버들 북 꾀꼬리〉 전경. 사진 – 홍철기, 강서경 스튜디오, 리움미술관
20대 초반, 나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1844)에 말 그대로 완전히 꽂혀 있었다. 극도로 절제된 그림에서 몰아치는 힘, 주변 공기까지 느껴지는 여백, 붓질이 뿜어내는 기운까지. 이 간결한 그림은 어쩜 이렇게 순간의 분위기나 그리는 사람의 감정까지 담아냈을까. 고전 명작을 보며 들끓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택한 방법은 내 방식대로 재해석하는 것이었다. 어설프게 모사하거나 추상화처럼 그려보기도 했고, 자수공예과 수업을 찾아가 베틀 위에 나만의 ‘세한도’를 짜보기도 했다.
그런 내가 인왕산 인근에 자리한 수많은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그렇게 다양한 작품을 보고 나서도, 그 풍경을 마주하면 여전히 제일 먼저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1751)를 떠올리는 건 어찌 보면 당연지사. 조선말 사의적 산수를 그린 ‘세한도’와 그보다 90여 년 앞서 간결한 비 갠 후 인왕산의 풍경을 기가 막히게 표현한 국보 제216호 ‘인왕제색도’. 이 두 작품이 아마 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산수화일 것이다. (‘세한도’는 추사 김정희 외에도 많은 후대 사람의 손길을 더해 현재 전체 길이 1469.5cm의 긴 두루마리 형태로 전해진다.)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강서경 개인전 〈버들 북 꾀꼬리〉 전경. 사진 – 홍철기, 강서경 스튜디오, 리움미술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산수화는 산과 강 등 자연경관을 소재로 그린 동양화다. 무생물로서 자연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생동하는 존재로 인식하는 동양의 자연관을 반영한 예술이다. 한국은 삼국시대 이래 중국에서 다양한 화풍을 받아들여 고유의 산수화 양식을 꾸준히 계승했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악 지대인 데다 도교, 불교, 유교 모두 산, 자연과 깊은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했다. 그런 의미에서 산수화는 단순한 자연의 재현을 넘어 당시 사회의 가치와 전통을 반영해 과거를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이다.
동아시아 전통 미술을 대표하며 수백 년에 걸쳐 진화한 산수화는 21세기에도 멈추지 않고 계승되고 있다. 시대를 초월해 산수화를 현대적 시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차별화를 꾀한 현대미술가들 덕분이다. 이들은 역사적·문화적·미학적 의미가 깃든 전통 산수화의 상징적 요소와 문화적 맥락을 현대에 기반한 방식으로 표현하며 산수화의 유산을 계승한다.
최근 우리 마음을 사로잡은 작가는 단연 리움미술관에서 12월 31일까지 개인전을 여는 강서경일 테다. 작가는 한국화에 기반을 두고 실과 철로 작업한 현대 산수화를 제안한다. 이번 전시 제목이자 신작 영상인 ‘버들 북 꾀꼬리’는 버드나무 사이를 날아다니는 꾀꼬리의 움직임과 소리를 풍경화를 통해 읽어낸 선인의 비유를 레퍼런스로 삼은 작품이다. 작가가 표현한 산의 사계절과 낮과 밤 풍경 등은 마치 풍경화를 전시장에 3차원으로 펼쳐낸 듯한 울림을 준다.
내년 2월 11일까지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에서 전시를 선보이는 이정배도 금과 은, 초록과 노랑으로 산수화를 새롭게 해석한 작가다. 그의 작품에선 고전 산수화가 바로 떠오르지 않을 만큼 신선한 컬러가 눈에 띈다. 또 현대 산수화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시현의 붉은 산수화는 사라져가는 자연의 기억과 한국의 현대사회에 관한 비판적 성찰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기법과 주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좋은 예다. 동양의 전통과 현대 기술을 결합하는 황인기의 작품도 흥미롭다. 한국이나 중국의 고전 산수화에서 영감을 받은 그는 이미지를 스캔하고 픽셀화해 작은 레고 조각, 실리콘, 크리스털 등 현대의 재료를 활용한 디지털 산수화를 선보인다.

리움미술관에서 열린 강서경 개인전 〈버들 북 꾀꼬리〉 전경. 사진 – 홍철기, 강서경 스튜디오, 리움미술관
21세기 산수화가는 과거의 표현법이나 이야기를 재해석하고, 현대의 주제와 재료를 접목하는 등 다양한 실험을 거친다. 전통 산수화는 이들의 작품을 매개체로 지속해서 진화하며 새 생명을 얻는다. 우리는 시대를 초월한 이야기가 깃든 과거의 유물을 더욱 깊이 탐구하고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전통과 현대의 요소, 기법, 관점을 혼합하고 새로운 아이디어와 접근 방식을 도입하면서 문화유산과 현대성을 두루 반영한 역동적 예술 작품이 탄생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웹사이트에 들어가면 ‘큐레이터 추천 소장품’이라는 항목 아래 학예연구사의 작품 추천 글을 읽을 수 있다. 이수경 연구관은 ‘세한도’에 대해 이렇게 썼다. “2020년 특별전 〈한겨울 지나 봄 오듯〉으로 ‘세한도’의 가치가 널리 알려지면서 수많은 관람객들이 인터넷에 감상평을 남겼습니다. 함께 나누려는 기증자의 뜻에 맞게 ‘세한도’의 의미가 현대의 새로운 방식으로 더 많은 사람들과 공유된 것입니다. 이처럼 ‘세한도’의 감동과 긴 여운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전통 산수화는 앞으로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대중에게는 위안을 줄 것이다. 나아가 이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21세기 작가의 작품은 다음 세대에게 큰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예술이 있기에 선대와 후대의 예술가를 비롯한 우리가 시대를 초월해 인연을 맺을 수 있다. 앞으로 먼 미래에도 또 다른 산수화 정신이 끝없이 발전하고 이어지길 기대한다.
에디터 백아영(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