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미처 발견하지 못한 감각의 시간
빅토르 위고는 “길을 잃으면 파리지앵은 산책을 한다”라고 말했다. 그 때문인가. 에르메스의 올해 테마는 플라뇌르 포에버(flaneur forever), 즉 산책하는 사람이다. 에르메스 총괄 아티스틱 디렉터 피에르-알렉시 뒤마(Pierre-Alexis Dumas)는 “본능에 이끌려 감각의 날을 세우고 걷는 이는 한가로운 산책길에서 찰나를 놓치는 법이 없다”라고 말했다. 여유로운 산책을 통해 감성을 깨우고자 에르메스가 선택한 도시는 런던. <노블레스>는 마치 런던 토박이가 된 듯 도시의 골목을 거닐었다.
벨그레이비어
벨그레이비어
1987년 창립 150주년을 맞은 에르메스, 故 장-루이 뒤마 회장은 특별한 해를 기념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낸다. 그는 에르메스의 넘치는 활력을 보여줄 방법을 고심한 끝에 ‘겨울 불꽃놀이’를 생각해냈다. 이후 에르메스의 전통이 된 ‘올해의 테마’는 이렇게 태어났다. 에르메스의 테마는 에르메스가 누구인지 설명하고 테마를 통해 에르메스와 그 제품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늘 이목을 집중시킨다.
에르메스가 산책을 위해 선택한 도시, 런던. 빅벤, 런던 타워, 템스 강, 웨스트민스터 사원, 버킹엄 궁전을 런던의 명소로 여기는 사람은 런던을 알아가는 사람. 테이트 모던, 사치 갤러리, 이스트엔드를 알고 있다면 런던을 좀 더 깊이 알고 싶은 사람. 노팅힐의 포토벨로 거리와 혹스턴, 쇼디치, 메이페어, 킹스크로스가 어디인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런던을 거닐어본 사람.
첼시
첼시
메릴본
에르메스는 대규모 산책을 위해 전 세계에서 모인 250여 명의 에디터를 11개 그룹으로 나누었다. 산책이 단순히 풍경을 감상하는 정도로 그치지 않은 이유는 거리를 안내한 이들이 그 지역의 유명인사로 누구보다 그곳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기 때문. 그들의 경험과 에피소드가 산책을 한층 살찌웠다.
에디터가 산책한 거리는 노팅힐(Notting Hill). 휴 그랜트와 줄리아 로버츠가 주연한 영화의 제목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인지 에디터에게 노팅힐은 낭만적인 장소로 각인되어 있다. 건축가 소피 힉스(Sophie Hicks)의 안내로 시작한 노팅힐 탐험. 중성적 매력의 소피 힉스는 패션 에디터, 스타일리스트를 거쳐 배우로도 활약했다. 그 후 건축 공부를 시작해 요지 야마모토와 끌로에 부티크를 디자인했으며, 현재 서울의 아크네 스튜디오 플래그십 스토어를 단장하고 있는 이색적인 경력의 소유자다.
그녀의 집이자 스튜디오에서 산책을 시작한 노팅힐의 이미지는 영화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의 옛 스튜디오로 정갈하고 소담한 이 공간은 호크니가 예술가로 성장하기 전 젊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비거 스플래시(A Bigger Splash)>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은 곳이기도 하다.
소피 힉스의 설명을 빌리면, 실제로 노팅힐은 1970년대까지 이민자가 주로 거주하는 위험 지역 중 하나였단다. 특히 카리브 해 연안 출신의 이민자가 다수 생활했다고. 실제로 거리를 걷다 카리브 해 이민자로 보이는 이들의 장례 행렬을 볼 수 있었는데, 엄숙하기보다는 마치 축제를 즐기는 듯 노래를 흥얼거리며 줄지어 걷고 있었다.
휴 그랜트가 줄리아 로버츠를 잊으려 애쓰며 거닐던 포토벨로 시장. 이곳의 이름은 길의 북단에 자리한 스페인 학교 부지에 있던 포토벨로 농장에서 유래한 것이다. 앤티크 마켓과 노점이 즐비한 포토벨로 거리를 따라 열리는 시장은 런던에서 인기 있는 명소로 손꼽힌다.
영국에서 처음 지은 영화관인 에드워드 왕조 스타일의 일렉트릭 시네마도 인상적인 곳 중 하나. 1940년대 후반에 연쇄살인범 존 크리스티가 잠시 영상 기사로 일했다는 무시무시한 일화도 전해진다. 영화 <노팅힐>에서 휴 그랜트가 살던 웨스트본 파크 로드 280번지도 볼 수 있다. 파란색 대문은 여전하다. 아쉽게도 그가 운영하던 여행 전문 서점은 문을 닫았다고.
고만고만한 키의 주택을 따라 걷다 보면 1972년 에르노 골드핑거가 지은 트렐릭 타워를 만날 수 있다. 주변과 상이한 분위기의 이 타워는 지은 당시에도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험악하고 대담한 이미지를 풍기지만 건축적으로 높이 평가할 만한 요소를 두루 갖춘 건물이다. 지금은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공영 아파트다. 민와일 가든스도 흥미로운 공간. 도심의 녹색 지대로 스케이트보드를 위한 공간이 자리 잡았다.
공원 옆의 운하를 따라 다시 걷는다. 영국이 자랑하는 산업 디자이너 톰 딕슨이 옛 급수탑을 아파트로 개조한 워터타워를 지나 그의 스튜디오와 숍 위층에 자리 잡은 도크 키친에서 먹는 점심으로 노팅힐 산책은 마무리되었다.
실제로 거닐어본 노팅힐은 낭만적이라기보다는 다양한 문화와 인종이 어우러진 열정적인 곳이었으며, 런던을 대표하는 몇몇 단어 중 하나인 다양성이 그 어느 지역보다 두드러진 곳이었다.
스피털필즈
혹스턴 앤 쇼디치
노팅힐
노팅힐
스피털필즈
혹스턴 앤 쇼디치
내친김에 오후에는 1990년대 이스트엔드 재생 프로젝트의 선두주자인 혹스턴 앤 쇼디치(Hoxton & Shoreditch) 지역을 찾았다. 한마디로 홍대 앞을 방불케 하는 이곳은 옛 양조장인 트루먼 브루어리를 비롯해 수많은 공장과 옛 건물이 작가의 스튜디오와 숍, 레스토랑으로 변신해 젊은이와 트렌드세터를 불러모으고 있다. 그중 어떤 곳도 평범하지 않지만 퓨어 이블 갤러리,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기발한 작업 공간인 빌리지 언더그라운드 기차, 데이미언 허스트의 설치 작품이 놓인 힉스 레스토랑 트램셰드, 혹스턴 스퀘어는 꼭 둘러보길 권한다. 특이한 점은, 이 지역에 근접한 금융가 덕에 예술적 거리를 누비는 전형적인 비즈니스맨이 연출하는 대조적 풍경도 쉽게 볼 수 있다는 것.
런던에서 산책할 만한 곳이 어디 이 둘뿐이겠는가. 18~19세기에 지은 멋진 집과 나무가 늘어선 센트럴 런던에서도 가장 고급 동네인 메이페어(Mayfair). 이곳의 베리 브러더스 앤 러드는 1698년에 오픈한 곳으로 와인 전문가 5명이 선정한 5000종 이상의 와인을 판매한다. 메이페어에는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모자 가게 로크 앤 해터스, 225년 넘게 최고급 시가와 담배를 판매해온 제임스 제이 폭스 시가 제조 회사, 도버 스트리트 마켓 등 오랜 역사와 취향이 깃든 공간이 즐비하다.
첼시 축구 구단의 홈이며 1970년대 펑크 운동의 정신적 중심지인 첼시(Chelsea), 윈스턴 처칠과 로런스 올리비에 같은 명사의 주거지를 포함해 문화재로 지정된 350여 채의 건물이 자리한 벨그레이비어(Belgravia), 여전히 런던의 나이트 라이프를 책임지고 있는 소호(Soho), 전설적 그룹 듀란듀란의 키보드 주자 닉 로즈가 안내한 런던 엔터테인먼트의 중심인 웨스트엔드(The West End). 이곳의 마키 클럽 사이트는 스톤스, 야드버드, 레드 제플린, 지미 헨드릭스, 데이비드 보위가 공연한 곳으로 유럽 팝 뮤직 역사상 가장 중요한 장소로 꼽힌다. 런던의 최고 앤티크 마켓이 열리는 스피털필즈(Spitalfields), 영국의 아이코닉한 거리로 찰스 디킨스부터 비틀스와 마돈나에 이르는 유명인사의 주거지였던 메릴본(Marylebone)까지 런던의 산책로는 끝이 없다.
The Street Artist
The Passage
Eye Spie
The Wardrobe
The Upside Down Square
Walking Sticks
산책을 마친 프레스들이 당도한 곳은 사치 갤러리. 4월 9일부터 5월 2일까지 이곳에서 <완더랜드(Wanderland)> 전시가 열렸다. 이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 브뤼노 고디숑(Bruno Gaudichon)은 “원더랜드를 통해 에르메스와 함께 떠나는 여행은 플라뇌르의 2가지 요소, 즉 꿈과 자유로운 영혼에서 영감을 받아 기획했다”고 밝혔다.
11개의 방을 각기 다른 아티스트가 꾸며 파리의 광장부터 숨어 있는 통로, 카페에 이르는 산책로에서 관람객은 에밀 에르메스 박물관과 에르메스의 현재 컬렉션에서 수집한 갖가지 오브제를 만날 수 있다.
에디터가 처음 들어선 방은 초현실적 미장센으로 꾸민 지팡이의 방. 그다음은 남녀의 소품으로 가득한 옷장으로 안내한다. 십자로를 거쳐 광장으로 들어서면 거리의 광고판을 가득 메운 에르메스의 백을 만나고,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피할 수 있는 카페도 눈에 들어온다. 몽환적인 카페를 나서자 그라피티에 몰두하고 있는 예술가를 마주친다. 이윽고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코끼리까지 들어앉은 쇼윈도가 매력적인 통로. 눈이 호사하는 매직 룸을 지나 집으로 들어서면 전시는 끝난다. 에마뉘엘 피에르, 우고 고타니, 피에르 누벨, 피터 킨 등 매력적인 예술가와 함께한 이 전시는 9월 중순에 파리의 포르트 드 솔페리노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 故 장-루이 뒤마는 2006년의 주제 ‘파리의 해’를 설명하면서 “나는 영감을 얻기가 택시 잡기보다 쉬운 파리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올해 런던을 산책한 이들은 런던도 그에 못지않은 영감의 도시라는 사실을 느꼈을 것이다. 아니, 에르메스야말로 일상의 어느 곳에나 영감을 불어넣는 존재임을 다시금 깨달았을 것이다.
에디터 이윤정 (yoonjunglee@noblesse.com)
사진 제공 에르메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