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과 스토리를 입은 집 Luigi in Wonderland
1세기 로마 건축의 역작인 판테온을 내려다보는 16세기 고풍스러운 르네상스 건물에 이탈리아 예술계의 이단아 루이지 세라피니(Luigi Seraphini)가 산다. 멤피스 그룹에 속한 건축가이자, 세계 3대 오페라극장으로 꼽히는 라스칼라의 무대 연출가, 유래를 알 수 없는 문자와 그림을 도식화한 미스터리 백과사전 <코덱스 세라피니아누스>의 저자로 유명한 인물. 그가 창조한 이 내밀한 공간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토끼굴처럼 예기치 못한 아찔한 상상과 환상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환상의 시작, <코덱스 세라피니아누스>
루이지 세라피니는 1949년 로마에서 태어났다. 그에 말에 따르면 ‘이보다 평범할 수 없는’ 지루하고 보수적인 환경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유난히 동식물을 그리는 것을 좋아한 소년은 주변의 사물과 방 안 곳곳을 낙서로 장식하는 한편, 장르를 불문한 온갖 서적과 화집을 탐독하며 상상력에 날개를 달게 된다. 무언가 남과 다른 나만의 스토리를 만들고 싶다는 막연한 꿈과 현실적 조건 사이에서 그가 택한 진로는 건축가였다. 하지만 머리와 손에서 끊임없이 솟구치는 환상으로 가득한 예술적 유희에 대한 아이디어를 온전히 떨쳐낼 수 없었다. 서른두 살이 되던 1981년 그는 2년 6개월에 걸쳐 완성한 한 권의 책을 출간한다. 360여 페이지에 달하는 그만의 상상력 백과사전 <코덱스 세라피니아누스(Codex Serafinianus)>다. 동시대의 어떤 작가와도 비교할 수 없는 독창적인 창작 세계를 펼쳐 보인 이 운명적인 책을 통해 그의 인생은 완벽히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그의 신비스럽고 기괴한 상상력을 형형색색의 색연필로 촘촘히 메워 그린 섬세한 드로잉과 의미를 알 수 없는 언어로 채운 다소 값비싼 이 아트 북은 성공적인 출판물이 되기 위한 기본 조건과는 거리가 있지만, 국적과 연령을 초월한 팬덤을 형성하며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그림책’으로 명성을 드높였다. 33년간 이 책을 찾는 손길은 꾸준했는데, 최근 더 큰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미국에서는 지난해 11월 한 달 동안 3쇄를 연달아 찍어내며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1 긴 회랑을 통해 주방, 개인 공간, 아틀리에, 거실이 이어진다. 빨간색과 녹색 사슴벌레를 쌍을 이뤄 그린 ‘비밀의 방’에는 악어와 은밀한 표정의 가면 등 개인적 추억이 담긴 미스터리 코드가 마치 보호색에 가려진 듯 비밀스럽게 자리한다.
2 드로잉과 컴퓨터 작업을 하는 아틀리에 겸 서재. 예술과 철학, 시문, 고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서적이 진열돼 있다. 전체적으로 이탈리아 공장의 굴뚝과 베네치아 기둥에서 볼 수 있는 패턴과 색상을 사용했다.
그동안 수수께끼 같은 언어로 점철된 책의 비밀을 밝혀달라는 무수한 인터뷰가 쇄도했으나 세라피니는 책이 지닌 미스터리에 대해 철저히 함구해왔다. 독자에게 상상의 여지를 주는 것, 스스로 책과 소통하게 하는 것이 그의 의도. 여기에 열정적인 현대의 독자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있다. 인터넷 상에 책의 내용을 연구하고 토론하는 각종 커뮤니티가 개설됐으며(알파벳의 암호를 풀었다는 글도 심심찮게 올라온다), 그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젊은 예술가의 시도 또한 다채롭다. 디지털 프로젝션 디자인 스튜디오 볼복스랩스(VolvoxLabs)는 지난해에 열린 디지털 드림 뮤직 페스티벌 2013에서 이 책을 통해 영감을 얻은 3D 드로잉 영상을 선보이기도 했다.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그의 작품과 최신 기술의 혁신적 결합으로 이목을 끌었다. 책에 관한 한 신중한 표정으로 말을 아끼는 그지만 근래에 다시 번진 인기의 비결을 묻자 미소를 띠며 말문을 연다. “글쎄, 도저히 모르겠어요. 이상하고 신기해요. 그렇지만 한편으로 그런 생각이 들어요. 지난 33년간 세상은 너무 복잡해졌고 사람들의 삶은 삭막해져 상상력과 환상을 펼칠 여유가 줄어들었죠. 그에 대한 반발로 이런 책을 이전보다 더 찾게 되는 건 아닐까요?”
1 밀라노 스튜디오 작업실에서 인생 최고의 역작, <코덱스 세라피니아누스>를 들고 있는 루이지 세라피니의 모습
2 거실 한쪽에 위치한 거대한 손 모양의 동상
3 거실 풍경. 거울 탁자를 사이에 두고 빨간색과 검은색 의자를 배치했다. 충직한 인상의 개 모형과 벽을 타고 있는 인어공주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4 아틀리에 입구. 2007년 밀라노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를 위해 설치한 작품을 옮겨놓았다. 왕관을 쓴 도넛 형태의 심벌은 ‘킹보토(King Botto, 구멍 난 왕)’라는 이름의 세라피니가 즐겨 사용하는 캐릭터다.
상상력을 향해 열린 환상의 공간
<코덱스 세라피니아누스>의 성공 비결은 각박한 현실을 이기는 묘안으로 실존하지 않는 환상의 세계를 떠올린 현대인의 ‘동경심’ 덕분 아닐까. 같은 의미로 아틀리에를 겸하는 그의 집 또한 매력적으로 비친다. 정형화된 집의 틀에 익숙한 우리에게 느닷없이 나타나는 낯선 공간의 신비로움이 가득한 곳이다. 15세기 초현실적인 종교화가 히로니마우스 보스, 평면 위에 미로처럼 연결된 무한한 3차원의 공간을 표현한 판화가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스허르, 사물을 이용해 사람의 얼굴을 그려낸 주세페 아르침볼도를 연상시키는 몽환적인 드로잉 세계가 펼쳐진다. 발길 따라 주위의 환경이 완전히 새롭게 변하는 것이 좋아 여행을 사랑한다는 그의 취향을 반영한 듯, 그의 집 회랑의 동선을 따라 걸으면 전혀 다른 색감과 연출, 스토리가 담긴 각 공간이 극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의 영혼의 동반자로 매니저 역할을 자처하는 아내 다니엘라와 단둘이 살고 있는 이 공간은 흔한 60대 부부의 집과 달리 생동감과 재기발랄함마저 느낄 수 있다. 부부의 소중한 추억과 의미까지 코드로 만들어 장식했는데, 집 전체를 말 그대로 두 손으로 그려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자신의 작품에 대해 극도로 말을 아끼는 그인지라 집에 대한 묘사와 의미를 듣고 싶다 해도 흡족한 답을 얻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그는 주방에 놓인 그가 디자인한 서스피럴(Suspiral) 의자의 형태처럼 ‘물음표(?)’를 던지며 상대에 따라 달라지는 새로운 이야기, 열린 해석을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방문객은 각자 상상력을 발휘하며 수수께끼를 풀어나가야 한다. 마치 탐정처럼, 열정적으로.
1 자료 정리와 도색 작업을 하는 아틀리에 공간
2 응접실. 이탈리아인인 세라피니에게 응접실은 지인들과 소통하는 가장 중요한 공간으로 다른 공간보다 부드럽고 편안한 색채를 사용했다.
3 밀라노에 위치한 스튜디오 실내. 다양한 동식물 오브제와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표지판에 상상력을 부여한 작품들이 놓여 있다.
루이지 세라피니의 작품은 특유의 자유로운 발상으로 일견 직관적이고 감성적으로 보이지만 동시에 상당히 논리적이며 수리적이다. 그의 공간에서도 이런 특징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무형의 상상력이 건축가인 그의 이성적 질서에 의해 조율되고, 무대 연출가의 구성력에 근거해 스토리와 융합하며, 공간 사용자의 합리성에 맞춰 체계적으로 정렬된다. 대조적인 색채와 다양한 패턴이 무아지경의 느낌을 주는데도 이 공간이 시각적으로 불편하지 않은 이유는 채도의 일관성, 적절한 무채색 배치, 패턴 간의 일정한 사용 비율 등 철저한 계산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다. 신비로운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정밀한 운율의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시편을 써 내려간 윌리엄 블레이크, 수학자이면서 독창적인 상상력과 유머로 환상 문학의 시초를 연 루이스 캐럴의 작품에서 엿보이는 논리의 조화를 그 역시 택하고 있다.
작가는 침묵하지만 그의 공간과 그 속의 작품은 끊임없이 말을 건다. ‘자, 상상력의 나래를 펼쳐 당신만의 이야기를 풀어보시오’ 하며. 그의 역작인 <코덱스 세라피니아누스> 또한 각자가 처한 새로운 환경의 맥락에 따라 새로운 감성과 상상력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을 내포한다. 모호함이 주는 불확실성을 경험하는 것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단숨에, 새로운 해석의 여지가 없는 즉각적이며 일관적인 답을 얻는 현재의 우리에게 낯설고도 신선하다. 이 집, 그리고 이 사람. 편리함을 좇느라 앓게 된 우리의 조급함을 치유해주는 동시에 아날로그적 가치에 대한 향수를 일깨우며, 획일화에 익숙한 삭막한 어른이 된 우리를 무지개색 꿈을 꾸던 유년 시절의 감성으로 돌아가게 해준다. 소리 없는 소통을 통해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한 주거 공간의 가치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오늘날 집은 당신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나요? 당신은 그 속에서 어떤 꿈을 꾸고 있습니까?”
에디터 이재연 (jyeon@noblesse.com)
사진 Aurora di Girolamo 현지 취재 여미영